20110411 이라크파병반대 서울대인 동맹휴업의 기억

dolmin98@hanmail.net  돌민



1. 학생운동사 참고 서지


 옛날 계간지 가운데 『우리사상』이라는 것이 있는데요, 그곳에 실린 학생운동사 연재도 내용이 괜찮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우리사상』1호, 2호, 3호에 학생운동사가 두 번만 연재되었던 것 같은데요. 1호, 2호에 실렸던가 1호, 3호에 실렸던가는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아마, 1호와 3호에 이렇게 두 번 연재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게시물에 파일 형태로 첨부한 8, 90년대 학생운동사입니다. 80년대 학생운동사는 정확한 출처를 찾아봐야 될 것 같구요. 90년대 학생운동사는 지금은 폐간된 <<대학생신문>>이라는 신문에 연재되었던 것일 겁니다.

 더해서, 2000년대 학생운동사에 대해서는 제가 직접 개인적인 기억정도라도 이 아래부터 써서 덧붙입니다. 혹시나, 도움이 될까 해서요.


 하지만, 조정환 대표님의 『지구제국』(갈무리, 2000)에 나온 「오늘날의 계급구성에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관계 재정립에 관한 시론」이라는 글과 『미네르바의 촛불』(갈무리, 2009)에 나온 2008년 촛불 봉기에 대한 내용이 참고가 될 만한데요. 참고가 될 만하다는 뜻은 학생운동사 즉 학생운동의 역사는 아니더라도 꼭 도움이 될 만한 내용들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계급구성에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관계 재정립에 관한 시론」은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라는 기본적인 관점을 세우는 데에서, 2008년 촛불 봉기에 대한 내용은 그 기본적인 관점을 적용하는 데에서 모범이 될 만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학생운동이란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쓸 수 있을지에 필요한 고민의 출발점이 될 만합니다. 역사는 아니라도 말입니다, 학생운동의.

 그리고, 역시 같은 조정환 대표님의 「‘정치적인 것’의 주체로서의 다중」(『진보평론』47호, 2011년 봄호)라는 논문도 참고가 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학생운동사는 아니더라도 운동사를 평가하고 반성하는 방법을 미루어 배울 수 있는 글이기 때문입니다. 68운동에 대한 평가와 반성이 나오는데요, 이와 같은 방법으로 학생운동사를 평가하고 반성하도 무방하겠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저의 생각을 잠시 밝히고 나서 “이라크파병반대 서울대인 동맹휴업의 기억”을 이어서 쓰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서울대인 동맹휴업이 2002년 고 신효순, 심미선 씨 장갑차 사망 사건부터 2008년 촛불 봉기까지의 사회운동과 함께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나하면, 고 신효순, 심미선 씨 장갑차 사망 사건의 반전평화라는 문제의식과 촛불 봉기의 문제의식 가운데 즈음에 서울대인 동맹휴업의 문제의식이 있다고 저는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반전평화라는 문제의식과 관련해서는 서울대인 동맹휴업의 이라크파병반대라는 문제의식이 촛불 봉기의 문제의식 관련해서는 서울대인 동맹휴업의 문제의식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촛불 봉기의 문제의식과 서울대인 동맹휴업의 문제의식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좀더 고민을 해야할 것 같습니다. 다만, 안또니오 네그리와 펠릭스 가따리의 『자유의 새로운 공간』이라는 책이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68혁명에 대한 평가부터 통합된 세계자본주의에 대한 문제의식까지를 다루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서울대인 동맹휴업을 생각하며 참고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2. 고 신효순 심미선 씨 장갑차 사망 사건과 앙마, 촛불 봉기와 안단테


 고 신효순 심시선 씨 장갑차 사망 사건에서 촛불시위를 제안했던 앙마라는 분이 있었고, 촛불 봉기에서 촛불시위를 제안했던 안단테라는 분이 있었다면, 서울대인 동맹휴업에서는 황인준 씨이던가 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2003년 서울대, 저를 포함해서 대체로 학내 운동권이 모인 <<서울대학교 반전평화위원회>>(이하 서울대 반전평화위원회)라는 <<46대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이하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산하 특별위원회가 있었습니다. 황인준 씨인던가 하는 분이 회의에 참가해서, 우리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이러면 안 된다며 동맹휴업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며 제안을 한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당시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부총학생회장을 맡고 있던 홍상욱 씨인가 하는 분의 입장은 동맹휴업을 위한 총투표가 장난인 줄 아냐며, 부결되면 책임은 누가 질 거냐는 식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서울대 반전평화위원회>>는 동맹휴업을 위한 총투표는 이 자리가 아니라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운영위원회에서 결정하는 것이 맞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최초 제안자인 황인준 씨가 다시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운영위원회에서 제안을 하고, 결국 이것이 통과, 이라크파병반대 서울대인 동맹휴업 찬반을 묻는 총투표, 가결, 하루 동맹휴업까지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참고로,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부총학생회장 홍상욱 씨는 그 후 1, 2년인가 후에까지도 포함해서 서울대인 동맹휴업과 관련해서 했던 몇몇 인터뷰에서 서울대인 동맹휴업의 성사를 통해 학우들의 민주주의와 소통, 네트워크를 긍정하게 되었다 뭐 이런 류의 답변을 하는 기사를 본 기억이 있네요. 역시 참고로, 황인준 씨는 서울대인 동맹휴업 성사 이후에 저를 포함해서 같이 운동하던 친구들 몇몇과 함께 종이상자 골판지에 크레파스인가 매직인가로 파가 꽂혀 있는 병을 그린 다음 그 위에 큰 가위표를 치고 “파병 반대”라는 구호를 쓰는 식으로 만든 삐뚤빼뚤하고 허접한 피켓을 매고 몇몇 반전집회를 찾아 서울 시내를 돌아다녔습니다.


3.


 유인물 안 갖다 준다고 독촉받기는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서울대 반전평화위원회>> 명의였나 아니면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명의였나로 유인물을 냈었는데, 아마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명의였을 거예요.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운영위원회를 통화한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사업이었으니까, 저를 포함한 <<서울대 반전평화위원회>>에서 내용을 만들었더라도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명의로 나갔을 거예요. 당시 <<서울대학교 법대 학생회>> 학생회장이던 성두현 씨인가 하는 분이 빨리 유인물 갖고 오라고 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사실은, 조금 버겁다고 느꼈습니다. 학교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라서 동맹휴업 성사까지 가니까 쫓아가지를 못하겠더라구요. 단적으로, 동맹휴업하는 날 <<민주화를 위한 서울대 교수협의회>> 김세균 교수님께서 연대발언하시면서 4.19 이후로 서울대학교 동맹휴업이 처음이라고 하실 때야 “아 이게 장난이 아니구나!”라고 느낄 정도로 쫓아가지를 못하겠더라구요. 또 단적으로, 서울대학교 이애주 교수님이라는 분께서 문예공연을 하셨는데요, 학생들 보고 무반주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라고 하시면서 그걸 무용음악으로 한국무용을 하시는 거였는데 잘 안 맞았어요. 학교에서 6년 동안 있었던 저도 이애주 교수님하고 데모한 게 그날이 거의 처음이었으니까, 책에서 봐서 그 분이 명망있는 운동가이신 건 어렴풋이 알았지만, 그분이 문예공연 하시는 걸 거의 처음 맞춰 보다 보니 저를 포함 학생들이 좀 어리둥절, 뭘 해야 되는 거야, 무반주인데 이게 저 춤이랑 엇박이면 어떡하지, 아니 이게 정박인가 하면서 막 고민하면서 자신 없어서 중간에 소리가 좀 작아지면, 이애주 교수님께서 공연하시면서도 중간중간 “아니 그냥 부르면 돼, 임을 위한 행진곡 그냥 부르면 내가 맞춰서 하는 거니까, 요즘 학생들은 이런 것 모르나보지!”라며, 지금 생각해 보면 멋드러진 공연을 무사히 마치셨지요.


4. “서로가 서로에게 배움이 되는 그런 운동”과 “평화를 호흡처럼”


 어디 그날 그곳에서 뿐이었겠습니까? 동성애자인권연대 활동가 분들과 함께 반전집회를 조직하기도 했습니다. 장애운동을 하시던 분과 반전평화운동을 토론하기도 하고, 여성운동을 하시던 분들과 연대사업을 하기도 하고, 이라크로 가서 전쟁을 막겠다며 중동에 가있던 이라크반전평화팀을 위한 후원 모금운동을 교내에서 하기도 하고, <다함께 서울대지부> 활동가와 함께 공동 캠페인을 하기도 하고, 전국의 활동가들과 함께 데모도 많이 하고, 이라크파병을 반대하며 선택적 병역거부를 선언한 강철민 씨의 농성장이었던 한국기독교회관 그게 몇 층이었던가 사무실이나 복도 바닥에서 수십 명이 함께 자기도 하고, <상도 2동 철거민 대책위원회> 회원 분들과 <삼성 해고자원직복직투쟁위원회> 위원 분들과 <<전국빈민연합>> 분들과 연대투쟁을 하기도 하고, 발전노조 해고자 분들과 본사 앞 천막 농성 돌입 엄호 투쟁하다 노동자 분들과 함께 공권력 방패에 몇 대 맞고 사지를 들려 나가기도 하고, 비정규직 열사 이용석 열사가 대열 맨 뒤에 앉아 있던 자기들 하필이면 앞에서 분신했다며 반쯤 멍한 표정으로 울먹이던 양윤혁이었던가 하는 후배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함게 소주잔을 기울이기도 하고, 꼭 저희 학생들과 함께 학교 청소를 하시며 항상 존댓말을 해주시던 김명길 선생님이라는 고등학교 은사를 서울 광화문에서 데모하다가 만나기도 하고, 석민아 너 여기 웬일이냐? 아니 선생님은 어쩐 일이세요? 어 <인천 전교조> 선생님들이랑 올라왔지, 저도 데모하러 나왔죠 뭐, 그래 짜식 수고해라, 선생님 감사합니다라고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비 내리는 가운데 열린 한미 에프티에이(FTA) 저지 일, 이만 규모의 집회에서 조정환 대표님, 신은주 책임운영님을 비롯한 여러 선생님들과 함께 행진을 하기도 하고, 명동성당 천막농성장에서 같이 카레 끓여서 이주노동자들과 <<대항지구화행동(CGA)>> 회원분들과 나눠먹기도 하고, 도롱뇽을 살리기 위해 천성산 관통 터널을 반대하시던 지율스님께 조금의 힘이라도 보태기 위해 양산으로 2박 3일 투쟁을 가기도 하고, 성노동자 분들의 노동권을 위한 토론회를 찾아다니며 공부를 하기도 하고, 갯벌을 살리기 위한 새만금 문화제에서 노래 공연을 하기도 하고, 핵폐기장 건설 반대를 위해 연대 투쟁을 했던 전라남도 영광군 반핵운동 활동가들과 함께 서울에서 열린 집회에서 만나 인사를 나누기도 하고······.

 그 와중에, 저는 또 얼마나 많은 잘못을 하고 반성을 해야 했는지 말입니다.

 김정식 활동가라는 분께서 쓰신 적이 있는 표현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배움이 되는 그런 운동”과 “평화를 호흡처럼”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렇다면 운동은 무엇일까요? 행동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걸어가며 묻기”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빠띠스따가 했다는 그 표현, “걸어가며 묻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