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자 다지원 소식
□ 다지원 미학 시학 세미나 ∥2010년 5월 21일∥발제자: 문영
텍스트: 발터 벤야민,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번역자의 과제 외』, 도서출판 길, 2008, 121~142쪽
번역자의 과제
1. 요약
1.1. 어떤 예술작품에서 수용자를 고려하는 것이 예술작품의 인식을 위해 생산적으로 드러난다면 관객에 대한 모든 관계가 제 길에서 벗어나게 할 뿐 아니라, '이상적인' 수용자 라는 개념은 단지 인간 일반의 존재와 본질을 전제하게끔 되기 때문에 해롭다. 왜냐하면 예술은 인간의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본질을 전제하기는 하지만, 어떤 예술작품도 인간의 주의력(Aufmerksamkeit)을 전제하지 않는다. 어떤 시도 독자를 위해, 어떤 그림도 관람객을 위해, 어떤 교향악도 청중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편의 시는 무엇을 전달하는가? 시에서 본질적인 것은 전달이나 진술이 아니다. 그럼에도 매개(전달)하려는 번역은 전달 이외에 아무것도 매개하지 못한 채 비본질적인 것만 전달할지도 모른다. 이는 열악한 번역이다. 한 편의 시에 전달 이외에 들어있는 것, 그것은 일반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 비밀스러운 것, '시적인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가? 그래서 번역자 역시 시를 지음으로써 재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열악한 번역을‘비본질적인 내용을 부정확하게 전달한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1.2. 번역은 하나의 형식이다. 번역을 번역 그 자체로 파악하려면 원작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원작 속에 번역의 법칙이 그 원작의 번역 가능성을 통해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 작품의 '번역 가능성'은 독자들 중 언젠가 그 작품을 충분히 번역할 사람을 찾게 될 것인가와, 보다 본래적인 물음으로서 작품이 본질적으로 번역을 허용하는지, 번역을 요구하기도 하는가 하는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1.3. 번역 가능성이 특정 작품들에는 본질적으로 속한다. 이는 원작에 내재하는 어떤 일정한 의미가 그 원작들의 번역 가능성 속에서 표출된다는 것을 뜻한다. 번역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결코 원작에 대해 무엇인가를 의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번역은 원작의 번역 가능성 덕택에 원작과 밀접한 연관 속에 있다. 번역은 원작에서 나온다. 그것도 원작의 '사후의 삶'에서 나온다. 이 마지막 단계의 삶은 그것이 표출될 때 명성(Ruhm)이라 불린다. 번역이 매개 이상의 것일 경우 한 작품이 사후의 삶에서 자신의 명성의 시대에 도달했을 때 탄생한다. 번역은 이 명성에 기여하기 보다는 명성 덕택에 생겨나며, 원작의 삶은 번역들 속에서 언제나 새롭게 자신의 포괄적 전개의 단계에 도달한다.
1.4. 이러한 포괄적 전개는 어떤 독특하고 고귀한 합목적성으로 규정되어 있다. 삶의 모든 합목적성 일반은 삶을 위해 합목적적인 것이 아니라 삶의 본질과 의미의 표현, 재현, 서술을 위해 합목적적인 것이다. 결국 번역은 언어들 상호 간의 가장 내밀한 관계를 표현하기 위한 합목적성을 지닌다. 언어들 사이의 가장 내적인 관계는 독특한 수렴의 관계이다. 즉, 그 언어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에서 서로‘근친’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1.5. 번역에서 언어들 사이의 근친성이 입증되어야 한다면, 원작의 형식과 의미를 가능한 한 정확하게 전달하는 일을 통하는 것 말고 다른 방법으로 어떻게 근친성을 입증할 수 있을까? 한 번역에서 언어들 사이의 근친성은 두 개의 문학작품(원작과 번역) 사이의 피상적이고 정의할 수 없는 유사성에서보다 훨씬 더 명확하게 밝혀진다. 번역이 원작과의 유사성을 그 자신의 마지막 본질에 따라 추구한다면 어떤 번역도 가능하지 않다. 사후의 삶이란 새로워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후의 삶 속에서 원작은 변화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위대한 번역이라도 (원)작가의 말은 번역자의 언어의 성장 속에 편입되고, 새로운 번역 속에서 몰락하게 된다.
1.6. 번역에서 언어들의 근친성은 모사와 원작 사이의 모호한 동일성에서가 아니라 그 언어들이 서로 보충하는 의도의 총체성만이 도달할 수 있는 똑같은 것이 의도되어 있다는 점을 바탕으로 하여 표출된다. 그것은 곧 순수언어(die reine Sprache)이다. 즉 서로 낯선 언어들의 모든 개별적 요소들, 단어, 문장, 구문들은 서로를 배제하는 반면, 이 언어들은 그것들의 의도 자체에서는 서로를 보완한다. 이를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의도에서‘의도하는 방식’과‘의도된 것’을 구별해야 한다. 빵을 뜻하는 독일어 'Brot'와 프랑스어 'Pain'에서 의도된 것은 동일하나 의도하는 방식은 다르다. 즉 그 두 단어가 양쪽 사람들에게 상호 대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 결국 서로 배제하는 경향을 띤다는 점은 바로 그 의도하는 방식 때문이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두 단어가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는 점은 '의도된 것' 때문이다. 또한 그 언어의 의도된 것은 개별 단어나 문장에서처럼 상대적 독자성을 갖지 않고 끊임없는 변화 과정 속에 있다. 그 변화는 의도된 것이 의도하는 방식들의 조화에서 순수언어가 될 때까지 지속된다. 그 때까지 의도된 것은 언어들 속에 숨겨져 있다. 작품들의 사후의 삶에서 항상 새롭게 언어들의 성장을 시험해보는 것이 바로 번역이다. 번역 속에서 원작은 보다 높고 순수한 권역으로 성장한다. 그 권역에 원작은 완전하게 도달하지 못하지만 번역이 전달하는 것을 넘어서는 무엇이 놓여 있다.
1.7. 내용과 언어가 원작에서는 열매와 껍질처럼 통일체를 이룬다면, 번역에서의 언어는 주름이 잡혀있는 널따란 왕의 외투처럼 그것의 내용을 감싼다. 왜냐하면 번역의 언어는 그 언어 자체보다 더 상위의 언어를 의미하며, 번역 자신의 내용에 어울리지 않고 강압적이며 낯선 채로 머물기 때문이다.
1.8. 번역자의 과제는 원작의 메아리를 깨워 번역어 속에서 울려 퍼지게 하는 의도, 번역어를 향한 바로 그 의도를 찾아내는 데 있다. 번역은 문학작품과는 달리 자신이 마치 언어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언어와 대면한다고 여기며 원작을 불러들이는데, 자신의 언어로 울리는 메아리가 낯선 (원작의) 언어로 쓰인 작품에 대한 반향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장소로 불러들인다. 번역은 원작의 의미에 스스로를 비슷하게 하는 대신 애정을 가지고 그 세부에 이르기까지 원작이 의도하는 방식에 자신의 언어로 스스로를 동화시켜 원작과 번역이 마치 사기그릇의 파편이 사기그릇의 일부를 이루듯이 보다 큰 언어의 파편으로 인식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번역은 무엇인가를 전달하려는 의도, 즉 의미를 아주 도외시해야한다. 그리하여 번역의 언어는 그 의미의 의도를 어떤 재현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속에서 그 의미의 의도가 스스로 전달하는 어떤 언어를 향한 조화와 보충으로서 그 언어 고유의 의도방식이 울려나오도록 해야 한다. 진정한 번역은 훤히 비쳐나오는 번역으로서 원작을 덮지 않고 원작에게 빛을 가리지 않으며, 오히려 순수언어를 번역 자신의 매체를 통해 강화하여 그만큼 더 원작 위로 떨어지게 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구문의 번역에서의 직역이 해낼 수 있으며, 바로 직역이야말로 문장이 아니라 낱말이 번역자의 근원적 요소임을 드러낸다.
1.9. 번역자의 기본적 오류는, 자신의 언어가 외국어를 통해 강력하게 영향을 받도록 하는 대신 자신의 언어가 처해 있는 우연적 상태를 고수하는 데 있다. 번역자는 특히 자신의 언어와는 멀리 떨어진 언어를 번역할 때, 언어 그 자체의 궁극적 요소들, 즉 말과 형상과 어조가 하나로 합쳐지는 점에까지 소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외국어의 수단을 통해 자신의 언어를 확대하고 심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1.10. 어디까지 번역이 이러한 형식의 본질에 상응할 수 있는지는 객관적으로 원작의 번역 가능성에 의해 규정된다. 원작의 언어가 가치와 품위를 적게 지니면 지닐수록, 그것이 전달에 가까울수록 번역을 위해 얻을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적다. 작품의 종류가 고귀하면 고귀할수록 그 작품을 번역하는 일은 그것의 의미를 아주 잠깐 스치면서도 더욱더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