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자본주의정치세미나, 120225, 돌민 실비아 페데리치, 캘리번과 마녀, 갈무리, 2011, 297~303쪽.

 

1. 요약(4장 유럽의 대마녀사냥 297~303쪽)

 

마녀, 치유자, 그리고 근대과학의 탄생

 

1.1. 마녀박해 이면에 작동하던 다른 동기들도 있다. 마녀고발은 재산권에 대한 공격, 그 중에서도 주로 토지와 농업의 사유화가 증가한 이후 16세기와 17세기에 급격하게 늘어난 절도를 처벌하는 데 사용되곤 했다.
 마녀를 직업으로 삼았던 “선한 마녀”가 더 혹독하게 처벌받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1.2. 역사적으로 마녀들은 마을의 산파이자 의료진이었고, 예언자 혹은 마법사였다.

 

1.3.

 

1.4. 트렌토 의회(1545~1563년) 이후 반종교 개혁물결은 지역 공동체 문화에 깊이 뿌리박고서 권력을 행사하는 대중치유사들을 두려워했으며, 이들에게 적대적인 입장을 강하게 취했다.

 

1.5. 민간치유자들에 대한 박해가 진행되면서 여성들은 수 세대에 걸쳐 전수하고 축적해 왔던 약초와 치유법에 대한 경험적 지식의 유산을 박탈당했고, 이로 인해 새로운 형태의 인클로저가 나타나게 되었다. 다름 아닌 전문의학이 등장하게 된 것인데, 그 결과 “낮은 계급” 앞에는 치료의 형태를 띠고 있으면서도 값비싸고 낯설며 도전할 수 없는 과학지식의 벽이 우뚝 솟아올랐다(Ehrenreich and English 1973; Starhwak 1997).

 

1.6. 민간치유사로서의 마녀가 의사에게 밀려났다는 사실은 근대과학의 발달과 과학적 세계관이, 마녀사냥의 성쇠에 어떤 역할을 했던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을 낳는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두 가지 상반된 견해가 있다.

 

1.7. 계몽주의에서 유래한 한편의 이론에 따르면 과학적 합리주의의 등장은 마녀에 대한 박해를 종식시키는 데 핵심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1.8. 사실 신과학이 해방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브라이언 이슬리아가 확실하게 보여 준 바와 같이) 마녀사냥이 최후를 맞은 것은 승승장구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요구했던 사회적 규율이 가동되기 시작하면서 마녀의 세계가 소멸해 갔기 때문이다.

 

1.9. 또 다른 문제는 근대적인 과학수단의 등장을 마녀사냥의 원인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1.10. 머천트의 설명은 과학적 합리주의가 진보의 견인차였다는 가정에 도전한다는 큰 장점을 가지고 있으며, 근대과학 때문에 발생한 인류와 자연간의 심원한 단절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마녀사냥을 환경파괴와 연결시키고 있으며, 자연계에 대한 자본주의적 착취를 여성에 대한 착취와의 관계 속에 바라본다.

 

1.11. 하지만 머천트는 전前과학적인 유럽에서 엘리트들이 포용했던 “유기적인 세계관”이 노예제와 이단의 몰살을 가능케 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또한 다종다기한 우주론적 사고 속에는 자연에 대한 기술적 지배와 여성의 창조력에 대한 전유의 열망이 또아리를 틀고 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2. 기타(출처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03g0181a)

 

2.1. 조셉 글랜빌(Joseph Glanvill) : Glanvil이라고도 씀. 1636 잉글랜드 데번 플리머스~ 1680. 11. 4 서머싯 배스.
영국의 자칭 회의론자, 왕립학회의 대변자.

 

영혼이 육체에 앞서 존재하고 마법과 유령이 실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를 심리 연구의 선구자로 보는 사람도 있다. 엑서터와 옥스퍼드의 링컨 칼리지에서 공부했으며, 배스의 애비 처치(Abbey Church)로 옮겨가기(1666) 전에는 프롬 셀우드와 스트리트의 신부(rector)로 봉직했다. 1672년부터 찰스 2세의 지도신부로 활동했으며 1678년 우스터의 참사회록수입자(參事會祿受入者)로 취임했다.

 

〈독단의 공허함인가, 아니면 의견의 확실함인가 The Vanity of Dogmatizing, or Confidence in Opinions〉(1661)에서 스콜라 철학의 독단주의를 공격하고, 그 대안으로 실험방법을 제시했다. 실험방법으로 보편법칙을 확립할 수 없다는 점은 인정했지만, 과학적 접근법이 자연에 관한 지식을 획득하고 그것을 지배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플러스 울트라:아리스토텔레스 시대 이래 지식의 진보와 발전 Plus Ultra or the Progress and Advancement of Knowledge Since the Days of Aristotle〉(1668)에서 왕립학회의 실험방법이야말로 신의 활동을 드러내보이기 때문에 더할 나위 없이 종교적이라고 옹호했다. 마녀와 유령이 존재한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는 그의 노력은 무신론을 논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몇 가지 중요한 주제에 관한 에세이 Essays on Several Important Subjects〉(1676)는 종교와 이성에 대해 더욱 성숙한 몇 가지 사상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