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민이 이러한 요구(특정 가족이 귀족이라 불리어, 원로원 의원이 될 독점적 권리와 기타 공직권을 요구함)를 받아들임으로써 현실적 권리가 되었다는 사실은 로물루스가 최초의 원로원 의원들과 그 후손들에게 귀족의 신분과 특권을 주었다는 전설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1.1 원로원은 아테네의 평의회와 마찬가지로 온갖 집무들에 대해 결정권을 갖고 있었으며, 새 법령 같은 것은 사전 심의할 권리를 갖고 있었다. 법령의 최종적 채택은 쿠리아 회의라 불리는 민회가 했다. 인민은 쿠리아별로, 그리고 각 쿠리아에서는 씨족별로 패를 지어 모였다. 30개의 쿠리아에는 각각의 투표권이 하나씩 있었다. 쿠리아 회의는 레크스를 포함한 고위 공직자 선출권, 선전포고 결정권, 사형선고 문제의 최종판결권을 가지고 있었다.

1.2 레크스는 절대군주에 가까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 군사사령관, 제사장, 재판장을 겸임했다. 민사 행정의 권한이나 시민의 생명, 자유 및 재산에 대한 권력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레크스의 직위는 세습적인 것이 아니었다.

2. 왕정시대의 로마 인들도 씨족, 포록 및 부족에 기초했고, 또 그것들로부터 발전한 군사민주주의가 있었다. 쿠리아와 부족은 인위적인 구성이기는 했지만, 사회의 진정한 원초적인 형태에 따라 조직된 것이다.

2.1 귀족이 견고한 기반을 획득하고 레크스들이 자신의 권한을 확대시키려고 노력했으나, 이러한 것들 때문에 제도의 본래/기본성격이 바뀌지는 않는다!

3. 로마 시내와 정복으로 확장된 로마 영역 내의 인구가 이주민 때문에, 정복된 지역의 주민들(주로 라틴 지역 주민들) 때문에 증가했다. 그들은 온갖 정치적 권리를 박탈당한 평민을 이루고 있었다. 수가 날로 늘어난 그들은 기존의 포풀루스(본래 로마인의 구성성분)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3.1 토지재산은 포풀루스와 평민 사이에 거의 균등 배분된 것 같다. 상업적 및 공업적 재화는 미미했으나 평민의 수중에 있었던 것 같다.

4. 법학적 소양이 있는 문한학자들의 합리주의적, 실용주의적 해석 시도로 인해, 고대의 씨족제도를 마무리 지은 혁명의 시기, 과정, 원인 등에 관해서 밝히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4.1 그러나 그 원인이 평민과 포풀루스 사이의 투쟁에 있었다는 것만은 의심할 바 없다! 5. 세르비우스 툴리우스라는 레스크는 그리스의 모범, 솔론을 본따 새로운 민회를 창출했다.

5. 이 민회에 참석할 수 있는 여부는 포풀루스, 평민 차이가 아닌, 군복무의 여부에 따라서 결정되었다!

5.1 병역의 의무를 지는 전체 남성 주민은 그 재산에 따라서 여섯 계급으로 구분되었다. 

5.2 제6계급인 최하층민(proletariat)은 가난했기 때문에 병역과 납세가 면제된 자들이었다.

5.3 새로운 켄투리아 민회에서는 시민들이 중대별 각각 100명씩 한 켄투리아를 이루어 군대식으로 정렬했고, 각각 한 표를 가졌다. 97표면 과반수를 차지할 수 있는 구성에, 기사와 제1계급이 합쳐서 98표, 즉 그들이 단합하기만 하면 나머지 사람들에게 의견을 전혀 물어보지 않고도 유효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6. 이전에 쿠리아 회의가 가지고 있었던 정치적 권리는 이제 모두 새로운 켄투리아 회의로 넘어갔다.

6.1 따라서 쿠리아와 그것을 구성하는 씨족은 아테네에서처럼 순전히 사적-종교적 단체로 전락했다. 쿠리아 회의는 얼마 후 완전히 없어지고, 그 대신 국가가 혈연부족을 대체하는 네 개의 지역부족을 조직했다. 이들은 각각 도시의 4분의 1씩을 차지해 살았으며, 일련의 정치적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7. 이와 같이 로마에서는 영토에 따른 구분과 재산상의 차별을 기초로 한 새로운 현실적인 국가제도가 수립되었다.

7.1 이 새로운 제도의 틀 안에서 로마 공화국의 전체 역사가 전개된다. 귀족과 평민 간에 공직 점유와 국유지 분재에 참여하는 문제를 가지고 전개된 투쟁, 대토지 소유자 및 화폐 소유자라는 새로운 계급의 출현 등이 나타났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이탈리아를 황폐화시켰고, 제정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게르만 미개인들에게도 길을 열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