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자본주의/정치세미나, 120825, 돌민
엥겔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두레, 2012, 195~200쪽

 

1. 그리스 인들의 경우에는 사정이 달랐다. 가축들과 사치품에 대한 사적소유의 출현은 개별적 사람들 간의 교환을 초래했고, 생산물의 상품화를 가져왔다. 바로 이것이 그 후에 있었던 모든 변혁의 싹이다.

 

2. 그러나 일단 개별적 사람들 간의 교환이 발생하고 생산물이 ‘상품(Waren)'으로 전환됨에 따라 생산자에 대한 생산물의 지배가 얼마나 급속히 진행되는가를 아테네 인들은 몸소 체험해야만 했다.

 

3.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고대의 씨족제도는 화폐의 개선 행진 앞에 무력했을 뿐만 아니라 씨족제도 그 자체 내에서는 화폐, 채권자와 채무자, 빚을 강제로 받아내는 따위를 받아들일 여지조차 없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새로운 사회 세력이 실존했기 때문에, 좋았던 옛 시절로의 복귀를 아무리 동경해도 화폐나 고리대금없을 이 세상에서 다시 없앨 수는 없었다. 그뿐만아니라 씨족제도는 부차적이기는 하지만 다른 일련의 틈들도 만들어 놓았다.

 

4. 한 마디로 말해서 씨족제도의 종말이 다가온 것이다. 사회는 나날이 커져 씨족제도의 울타리를 벗어나고 있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최악의 폐단조차 씨족제도는 억제하지도 제거하지도 못했다. 그러는 동안에 국가는 슬그러미 발전했다.

 

5. 씨족제도는 피착취 인민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었으므로 인민들이 기댈 수 있는 것은 형성 중인 국가뿐이었다. 그리하여 국가는 솔론이 제정한 행정조직의 형태로 그들에게 도움을 주었으며, 동시에 국가는 낡은 헌법을 희생하여 자체를 다시 강화했다. 솔론 - 기원전 594년 이루어진 그의 개혁안의 실시방법은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 은 소유에 대한 침해로서 일련의 소위 정치혁명의 막을 열어 놓았다.

 

6. 평의회는 각 부족에서 100명씩 모두 400명의 일원으로 구성되었다. 여기서는 부족이 아직도 그 기초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낡은 제도 중에서 새로운 국가가 받아들인 유일한 것이었다.

 

7. 이와 같이 통치 조직에 사적소유라는 전혀 새로운 요소가 도입되었다.
 씨족제도는 또 다시 패배를 당했다.

 

8. 그러나 재산에 따른 정치적 권력을 부여하는 것이 국가가 성립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제도의 하나인 것은 결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