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지원 성정치자본주의세미나∥2012년 07월 28일∥발제자: bostridge

프리드리히 엥겔스,『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두레, 2012, 76-90쪽

대우혼 가족

1. 요약

1.1. 일정 기간 동안의 대우관계는 이미 군혼에서도 있었고 또 그 이전에도 있었다.

1.2. 남자는 많은 아내들 중에서 본처를 가지고 있었고 또 여자에게도 그는 본남편이었다. 대우관계는 씨족이 발전할수록, 또 이제는 서로 결혼할 수 없게 된 ‘형제’ 집단들과 ‘자매’집단들의 수가 많아질수록 굳어질 수 밖에 없었다.

1.3. 씨족의 형성은 친족 간의 혼인을 방지하는 데 자극을 주었다.

1.4. 이로쿼이 인과 기타 미개의 인디언들 사이에서 모든 친족들 간의 결혼도 금지되어 있었다. 이렇게 결혼 금지가 더욱 복잡하게 되자 군혼은 더욱더 불가능하게 되었으며 그것은 대우혼 가족으로 대체되었다. 이 단계에서 한 남자는 한 여자와 함께 생활한다.

1.5. 그러나 남자에게는 일부다처제의 권리와 정조를 지키지 않아도 되는 권리가 있었다. 반면에 여자에게는 정조를 엄격히 지킬 것을 요구했으며 간통한 여자는 잔인한 처벌을 받았다.

1.6. 부부의 인연은 쌍방이 손쉽게 끊을 수 있으며 자녀들은 여전히 어머니에게만 속했다.

1.7. 원시시대의 가족의 발전을 보면, 최초에는 근친, 다음에는 원친, 그리고 단순한 인척까지도 점차 배제됨으로써. 최초에는 한 부족 전체를 포괄하던 양성 간의 공동 결혼생활의 범위가 끊임없이 줄어들었으며 마침내 모든 종류의 군혼이 실제로 불가능하게 되었다.

1.8. 그 결과 아직도 끈끈하게는 맺어지지 못한 부부 한 쌍이 남게 되는데 이 부부는 일단 분해되면 결혼이 소멸되는 그러한 분자다. 이는 현대적 의미에서의 개인적 성애라는 것이 단혼의 발생과는 거의 무관하다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1.9. 대우혼이 발생한 시기부터 여자의 수가 적어졌기 때문에 여자의 약탈과 매매가 시작된다. 이는 이미 시작된 것이었으며 아내를 얻어 내는 방법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1.10. 아메리카 인디언과 다른 부족들 사이에서 약혼은 당사자들이 아니라 어머니가 맺어 주며 결혼 날짜가 되어서야 약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1.11. 이로쿼이 인들은 이혼을 부정적으로 여기는 경향이었다. 이혼을 하게 될 경우 아이들은 아내가 차지하고 이혼 후 쌍방은 다 같이 재혼할 수 있다.

1.12. 대우혼 가족은 극히 미약하고 견고하지 못하기 때문에 원시공산주의적 세대를 결코 해체시키지 못했다. 원시공산주의적 세대는 가정에서 여성의 지배를 의미하며, 이것은 친어머니만을 인정하는 것이며 이는 여성에 대한, 즉 어머니에 대한 높은 존경을 의미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1.13. 사회발전의 초기에 여자가 남자의 노예였다는 견해는 18세기 계몽사상에서 물려받은 지극히 불합리한 관념 중 하나이다. 어느 야만인들에게서나 또 미개의 낮은 단계, 중간 단계 및 부분적으로는 높은 단계에 있는 어느 종족에서나 여성은 자유를 향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극진한 존경을 받는 위치에 있었다.

1.14. 여자가 대부분 또는 모두 같은 한 씨족에 속하는 한편, 남자가 여러 씨족에 분속되어 있는 원시공산주의적 세대는 원시시대의 어디에서나 일반적이었던 여성 지배의 현실적 토대이다. (바호펜)

1.15. 야만인과 미개인의 여성들은 과도한 노동을 부담하고 있었다. 이에 반하여 문명시대의 귀부인은 외견상 대단히 존경을 받으며 실질적 노동은 전혀 하지 않지만 그 사회적 지위는 심한 노동을 하는 미개시대의 여성들보다 아주 낮다. 하지만 미개시대의 여성들은 자기 종족들에게서 진정한 귀부인으로 인정되었으며, 바로 그 지위의 성격상 귀부인이었다.

1.16. 바호펜은 군혼으로부터 대우혼에 이르기까지 보급된 과도기적 형태를 발견하게 된다. 이는 여자들이 일정 기간 동안 몸을 맡기는 관습인 속신을 말하는데 속신을 위한 이러한 희생은 서부 아시아, 지중해, 갠지즈강 등 아시아인들 사이에서 볼 수 있으며 시일이 지나면서 점차 완화된다.

1.17. 어떤 종족들 사이에서는 신랑의 동료나 친족 또는 결혼식에 참석한 손님들이 결혼식 때 신부에 대한 전통적인 권리를 요구하기도 한다. 신랑의 권리 행사는 맨 마지막이다. 초야권이 그 예로 이는 군혼의 산물이었다.

1.18. ‘난혼’ 또는 ‘문란 생식’으로부터 단혼으로 이행한 것은 여자들이 수행했는데(바호펜), 경제적 생활 조건이 발전하여 원시공산주의가 분해되고 인구밀도가 높아지면서 예전부터의 전통적인 양성관계가 태고의 소박한 성격을 잃을수록, 그러한 양성관계는 여자에게 더 굴욕적이고 억압적인 것으로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여자는 정조에 대한 권리, 즉 오직 한 남자와의 일시적 또는 지속적 결혼에 대한 권리를 구원의 길로 여기고 이것을 획득하려고 더욱더 꾸준히 노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1.19. 여자에 의해서 대우혼으로 이행된 후에야 비로소 남자들은 엄격한 일부일처제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1.20. 대우혼 가족이 발전하여 확고한 일부일처제로 되려면 지금까지 작용하던 것들 이외의 다른 원인인 새로운 추동력, 즉 사회적 추동력이 작용하지 않으면 않되었다. 이러한 추동력이 작용했기 때문에 대우혼에서 더 좁혀진 새로운 가족형태가 발생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