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cyworld.com/gnosisagape 움베르토 에코는 우리 시대에 있어 가장 중요한 학자들 중 하나이다. 현재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의 기호학 교수인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에서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박학다식을 쌓았다. 그래서인지 그의 저작들을 읽노라면 활자로 인쇄된 책에 하이퍼텍스트를 구현해놓았다는 느낌이 든다. 그의 박람강기가 우리들을 한 담론에서 다른 담론으로 자유로이 이끌어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에코를 시대가 주목하는 학자로 만든 것은 단지 그의 박학만이 아니었다. 사실 그 축적된 양에 있어서라면 한 번 본 것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어떤 러시아 인의 전설을 당할 이가 없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 러시아 사람을 학자로써 존경하지는 않는다. 진정 에코가 우리 시대 가장 중요한 교수가 된 까닭은 그 박학을 토대 삼아 우리들이 추구해야할 것을 일깨워주는데 공헌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이데올로기의 종언 이후 세계는 다양성과 상대주의를 추구하게 되었다. 바야흐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가 온 것이다. 세계는 더 이상 한 세대를 지배하는 절대적 이념이나 이론들을 원하지 않게 되었다. 심지어는 절대적인 진리로 인식되던 과학 이론조차, 패러다임들의 권력 다툼에 의해 잠시 지배력을 행사할 뿐이라는 주장이 토마스 쿤에 의해 제기되기도 하였다.  

에코는 바로 이러한 세계의 흐름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세계가 더욱 다양성을 존중할 수 있도록 이끄는 데 천착하고 있다. 그의 대표작 '장미의 이름'에서도 이러한 그의 신념이 나타나 있지 않은가. 권위주의가 첨가된 도그마가 끝내 여러 생명을 앗아가는 현장에서 말이다.

권위주의적 도그마에 대한 그의 경멸은 칼럼 <글을 잘 쓰는 방법>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어느날 에코는 인터넷에서 글을 잘 쓰는 방법에 대한 일련의 지침들을 발견한다. 이를테면 '두운을 피하라,외국어를 남용하지 말라.'와 같은. 이러한 지침들에서 에코는 오만한 권위주의가 내포되어 있음을 인식한다. 에코는 그런 지침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비꼰다. 가령 '괄호는(꼭 필요해 보일 때도)담론의 흐름을 방해한다는 것을 (언제나) 기억하라' 혹은 ''어울리지 않는 은유를 사용하지 마라. 비록 <노래하는>것처럼 보일지라도.그것은 마치 탈선한 백조 같다.' 독자들은 이런 식으로 도그마에 대항하는 에코를 보면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또한 에코는 아무리 민주적인 주장일지라도 그것이 극단으로 흐를 경우 결국 파쇼와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다.  세계는 반유대주의 등 인종주의의 망령을 두려워하여 가능한 한 유대인 등 다른 민족에 대해 차별이 없게 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그 노력이 극단까지 치닫는 경우,오히려 그것은 관용을 가장한 위험한 형태의 불관용임을 에코는 칼럼을 통해 주장한다. 예컨대,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이 반유대주의에 대한 뉘앙스를 내포하고 있다 하여 대학에서 아예 셰익스피어에 대한 강의를 철회한다는 것은 또한 문화의 다양성을 침해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현대 사회의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의 주장 또한 도그마가 되지 않을까 저어하고 있다. 이 책에 수록된 마지막 칼럼 <세 번째 천 년의 보도 기사:마침내 사립학교>은, 전통적인 가톨릭 국가인 이탈리아에 부는 각종 사립 재단의 학교 설립에 관한 그의 생각을 싣고 있다. 이탈리아 헌법 33조의 최종적 수정으로 사립 단체들이 국가 비용으로 학교를 설립할 수 있자 이탈리아에는 이슬람 계열, 유대 신비주의 계열, 심지어는 예수의 신성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모독하기 까지 하는 내용이 수록된 교재를 사용하는 학교들이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난다. 여기서 움베르토 에코는 자신의 주장을 직설적으로 주장하지 않는다. 단지 마지막에 교황의 선언을 인용하고 있다. '교회는 국가가 책임을 지고 통일적인 공교육의 주체가 되어 사립 재단의 학교 설립 권리를 박탈하고, 가족들이 모험적인 선택을 할 권리를 박탈할 것을 요구한다.' 아마 에코는 '자유로운 교육을 받을 권리'를 천명하고 싶었지만 세간에 의해 그것마저 도그마가 될 것이 두려워 직접적인 언급을 피했으리라.




이렇듯 나흘 간에 걸쳐 '미네르바 성냥갑'을 독파하며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할 수 있었다. 단지 독파할 때 어려웠던 점이라면 지나치게 많은 주석이 담론의 체계적인 흐름을 방해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현 이탈리아의 정세 등 한국 독자들에게는 익숙하지 못한 내용이 많아서 이해하기에는 까다로운 점이 다소 있었다. 하지만 사물을 다른 시각으로 들여다보며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하려 한 그의 노력과 지적 정열에 큰 찬사를 보내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