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의 반근대성

안토니오 네그리

번역 : 양창렬(nomade02@hotmail.com)


  이 아티클은 1990년 1월 21일 소르본느에서 열린 "스피노자와 20세기" 세미나 중간에 읽혔던 것이다. 그것은 Les Temps Modernes, 46, 1991년 6월, n.539, pp.43-61에 "스피노자의 반근대성"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역자 : 번역 대본은 Spinoza Subversif, Paris, ed. Kim , p.111-129이며, 인터넷에 떠도는 영역본을 참조했다. 영역본에는 불어본에는 없는 구절들이 몇 군데 첨가되고 문단 나누기도 약간 다른데, 불어본이 원래 네그리 본인의 글이므로, 최대한 불어본에 우선권을 두었고, 주석 역시 불어본을 따랐다.]


  스피노자, 낭만파

  근대성에서 스피노자의 재출현을 표식하는 역설은 아주 잘 알려져 있다. 만일 멘델스존이 "스피노자를 라이프니쯔와 볼프의 철학적 정통에 접근시킴으로써 그에게 시민권을 돌려주길" 원했다면, 그리고 야코비가 "스피노자를 그 용어의 고유한 의미에서 이교도로 제시하면서, 근대 기독교를 위해 그를 명백히 제거하길 원했다면" ― "그 둘은 모두 그들의 목적에 있어 실패했고, 복귀된 것은 바로 이교도 스피노자였다"(1). 멘델스존-야코비 논쟁은 특정한 철학적 모델의 위기 위에 접목되며, 당대의 격화된 정신적 긴장을 완화시킬 수 있는, 그리고 능력과 실체 사이의, 주체와 자연 사이의 관계의 서론적 체계를 구성할 수 있는 스피노자의 형상을 발생시킨다. 스피노자, 그 빌어먹을 스피노자는 낭만주의적인 철학자로서 근대성 안에서 다시 나타난다. 레씽은 감정과 지성, 자유와 필연, 역사와 이성 사이의 관계를 조화시킬 수 있는 자연 개념을 스피노자에게서 인식함으로써 승리했었다. Sturm und Drang의 주관적이고 혁명적인 조바심에 반대하여, 헤르더와 괴테는 종합과 재구성된 객관성의 이 강력한 이미지―스피노자는 단지 낭만주의의 형상이 아니라, 그는 그것의 토대와 성취를 구성한다―에 자신들을 근거지웠다. 자연의 전능함은 더 이상 감정의 비극 안에서 손상되지 않으며, 그것은 그것을 완결된 형식들의 왕국에 대립시킴으로써 그것에 대해 승리했다. 낭만주의의 한 가운데에 스피노자가 처음으로 초대된 것은 이와 같은 미학적인 초대, 운동과 완전함, 역동성과 형식들에 대한 지각이다. 그리고 그것은 심지어 낭만주의의 일반적인 틀과 특수한 구성 요소들이 철학적 비판 작업에 종속되었을 때조차도 그렇게 남아있다. 낭만주의의 진정한 철학적 영웅인 피히테는 스피노자의 체계와 칸트의 체계를 "완벽하게 긴밀히 결합된 것으로"(2) 간주하며 그리고 이것을 자아(Moi)의 멈출 수 없는 존재론적 운동 안에서 고려한다. 셸링, 1790년대의 바로 그 셸링의 경우, 비판 철학과 교조주의적인 철학 사이의 근본적인 대립, 즉 비판주의 위에 자신을 근거짓는 절대 자아의 철학과 절대적인 객체와 스피노자주의의 철학인 교조주의적 철학 사이의 근본적인 대립을 긍정하는 것은 객관적인 것의 무게를 변증법적으로 가정하는 행동의 분석(헤겔이 직접적으로 그것을 아는 것처럼)안에서 재빨리 해결된다(3). 반유명론자가 되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자아의 절대적인 지위는 그것으로부터 비극을 넘어, 주체와 실체 사이의 정신적인 자동주의를 고양시키는 필연적인 과정을 구성한다(4). 이러한 종합의 미학적인 차원은 끊임없이 그리고 지칠 줄 모르게 완전함, 능력(puissance)과 실체, 생산적인 요소와 생산의 형식으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구성된다. 헤겔에 따르면, 낭만주의는 미와 진리의 참된 관념으로서 관념과 자연의 순수 객관성을 극복하는 능력, 최초에는 관념과 그것의 실재성의 연합을 파괴하는 능력, 그리고 차이 속에서 후자를 위치지우는 능력으로 특징지워진다. 그렇게 함으로써 절대적인 주체성의 내적인 세계를 선언하게 되고, 그것의 객관성을 재구축하게 되며, 감성의 극복은 그 결과의 절대적인 특성 속에서 가라앉는다(5). 이 과정의 파생은 여전히 레씽주의적인 것이지만, 그 새로운 변증법은 절대적인 것에로 이끄는 길을 따라서 아름다운 것에 대한 준비 작업을 주장하면서, 그것의 동기들을 표현하고 절합한다. 스피노자, 다소 커다란 스피노자(un certain Spinoza)는 이 과정의 중심적인 형상이 된다.


  낭만주의에 맞서는 근대성

  이 연주회 속에 불협화음은 존재하는가? 확실히 헤겔같은 사람, 달리 말하면 낭만주의에 스피노자주의를 가장 높은 수준으로 흡수시키는데 밀어붙이는 헤겔, 그는 불협화음들을 표현한다. 왜냐하면 낭만주의와 미학은 세계의 일부만을 구성하며 그 자체로는 그것의 절대성―효과성, 역사, 그리고 근대성의 절대성―을 고갈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낭만주의와 미학은 진리의 불충분함(insuffisance)으로 고생하며, 그것은 반성이 부재(absence)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반성의 부재는 결정의 부재이기도 하다. 스피노자적 존재의 약분불가능성(=측정불가능성incommensurabilit )은 결정의 결핍(manque)의 기호이며, 그것은 진리의 결점에 의해 특징지워진다. 스피노자적인 존재론의 극도로 독창적인 회복을 넘어, 헤겔이 스피노자에게서 느꼈던 정감적인 경쟁 관계를 넘어, 적대와 분리가 성취되는 것은 바로 척도에 대한 논리학Logik의 그 챕터 안에서이다(6). 여기서는 이 에피소드를 세밀하게 다루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찬란하게 그 작업을 이미 한 바 있다(7). 우리는 헤겔이 스피노자에게 귀속시킨 부정적인 존재개념을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왜냐하면 근대성의 존재론에 대한 20세기의 논쟁의 확실히 본질적인 흐름들이 발전할 것은 바로 이러한 정의 주변(혹은 결국에는 그것의 거부 주변)에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헤겔의 공격은 두 가지 축을 따라 전개된다. 말하자면, 첫 번째 축은 현상학적인 것이다. 그것은 스피노자의 "양태"에 대한 해석과 관련되어 있다. 양태는 결정적인 것을 결정된 것으로 위치지우는 실체의 변용으로 정의된다. 양태는 자신과는 다른 것 안에 있으며 다른 것에 의해 파악되어야 한다. 그러나 헤겔은 이 양태는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며, Nichtigkeit, 즉 '무(n?ntit )로서 인식되는 것이 아니며, 그러므로 변증법적인 반성의 필연성으로 인식되지 않는다면서 반대한다. 스피노자적인 현상학은 무미건조하며, 그것은 절대성 위에 세워진다. 하지만 이 경우에 양태들의 세계는 추상적인 결정의 세계일 뿐이다. 거기에서는 정확히 결정은 스스로를 절대적인 것으로 주장하길 원하기 때문에 차이는 부재한다. 양태는 측정불가능(d?esure) 속으로 사라진다(8). 그러나―여기에서 우리는 현상학으로부터 너무나 짧은 존재론으로 넘어간다― 양태들의 세계에 의해 드러난 이 차이와 이 측정불가능은 스피노자에게는 일반적인 존재의 정의에서 동등하게 재출현한다. 존재는 그 자신을 양태들의 비결정성으로부터 회수하지 않는다. 양태들의 세계의 비차이는, 함축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이 실재성 속에서 용해되는 존재의 구성적인 비결정들의 전체이다. 스피노자에게 존재는 Dasein으로 드러나며 결코 용해될 수 없을 것이다. "절대적인 비차이는 스피노자의 실체의 근본적이고 구성적인 결정이다(9)", 그리고 이러한 비차이 속에는 변증법적인 전도의 이성이 없다. 스피노자의 실체는 결정들 그 자체의 절대적인 닫힘이며, 그것들을 미분화하는 텅빈 전체성이다. 스피노자의 실체, "원인, 그 스스로 자신의 존재 안에 있는, 어느 것도 자신을 관통하도록 놔두지 않으려 하는 원인은 이미 지위의 상태(Gesetzsein)를 통과하는 필연성 혹은 운명에 복종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복종은 가장 견고한 것이다... 스피노자의 실체에 대한 가장 위대한 직관은 즉자적 존재(en soi), 곧 유한한 대자적 존재(l'?re-pour-soi)로부터의 해방일 뿐이다. 하지만 그 개념과 그 자체로는 필연성의 능력과 실재적인 자유이다"(10).

  결론적으로 스피노자의 실체를 헤겔은 1) 실재의 측정되지 않는 지평으로서 그 자신을 재현하는 능력, 즉 일반적인 존재의 현존(pr?ence)으로 인식한다, 2) 그는 스피노자의 실체의 직접적이고 용해될 수 없는 미학적 능력을 그의 "즉자적인" 특성이라고 주장함으로써 확신한다, 3) 그는 스피노자의 실체에 Wirklichkeit 속에서 그 자신을 성취할 수 있는 근본적인 부적격(무능력inaptitude), 즉 실재의 조화라는 변증법적인 차원에서 그 자신을 용해할 수 있는 무능력[역자: 스피노자의 실체는 Wirklichkeit안에서 그 자신을 성취할 수 없음, 즉 실재의 조화라는 변증법적인 차원 속에 녹아들어갈 수 없음]을 귀속시킨다. 이것은 헤겔에게 스피노자의 존재 개념은 낭만주의적이며,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근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피노자가 없다면 철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변증법 외부에서 근대적인 것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근대성은 실재의 평화이며, 역사의 성취이다. 스피노자의 존재와 그것의 능력은 우리에게 이러한 결과를 제공할 수 없다.


  근대성의 시간

  하지만 다른 계기―근대성의 테마 주위에, 우리가 스피노자와 맞대면한 헤겔의 지위를 평가하는 것이 가능한―가 존재한다. 이 계기는 시간의 문제와 관련 있다. 우리는 스피노자에게 시간은 한편으로 현존의 시간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무한정한 지속(la dur? ind?inie)의 시간임을 알고 있다. 무한한 지속의 시간은 "모든 것이 그의 존재 안에 보존하려는 노력"의 시간이다. 만일 이 능력이 "사물의 지속을 결정했던 제한된 시간을 포함했다"면, 그것은 사실 부조리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의 파괴는 사물의 본질로부터 유래할 수 없고 오로지 외적인 원인에 의해서만 지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11). 현존의 시간, 즉 특이성으로서의 시간, 결정으로서의 시간은 본질을 위한 지속의 무의미함의 추론의 잔유물의 모습을 띈다(12). 그러나, 동시에 그리고 무엇보다 이러한 잔여성의 긍정적인 토대이자 존재론적인 전화로서 신체, 그것의 현실적인 실존, 그리고 신체에 묶여있는 한에서의 정신은 "신체의 본질을 영원성의 일종으로 표현하는(13)" 하나의 관념으로 뭉쳐진다. 하지만, 만일 헤겔이 무한정한 지속이라는 시간에 대한 스피노자의 정의에 반대하는 것이 놀라운 일이 아니라면, 현존하는-시간이라는 정의에 대한 그의 입장은 모호함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무한정한 지속에 반대하는 헤겔적인 논쟁은 실체의 양태들의 비차이에 반대하는 논쟁의 새로운 절합을 구성할 뿐이다. 헤겔에 따르면, 정말 무한정한 것은 무한한 것과 유한한 것에 관계하는 어려움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화시키는 것이다. 그것의 개념[무한정한 지속]은 따라서 극복되어야 한다. 지속은 척도, 따라서 질을 향한 양의 매개가 되며 그것이 그것의 길을 만드는 과정에서 무제한성은 그 자신의 필연성의 실현에 도달해야 한다(14). 지속을 시간성으로 환원하는 것 그리고 추상적인 시간성을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시간성으로 환원하는 것은 스피노자적인 존재를 그것의 이론적인 운명, 즉 존재가 순수 무로 전환되는 것을 제거하기 위해 헤겔이 지적하는 경로이다. 여기서 또한 변증법은 실재성의 존재를 회복시키는 척도를 가지며 이러한 시간의 구체화를 통해 근대성의 정의를 정교하게 만드는 데 공헌할 것이다. 남는 것은 시간에 대한 스피노자의 두 번째 정의, 즉 현존으로서 그리고 능력의 개방으로서 "영원성의 일종으로서(영원성의 상 아래에서sub specie aeternitatis)"의 시간이다. 하지만 어떻게 Dasein에 대한 스피노자적인 정의 오히려 양태라는 결정된 존재에 대한 스피노자의 정의―그것은 그것의 특이성 안에서 Gewordensein으로 환원 불가능한 것이며, 결정된 존재를 어떠한 변증법적인 종합에도 근본적으로 반대하는 것이다―에 반대할까? 여기에서 제기된 반대, 특히 헤겔이 시간성에 대한 변증법적 개념이 구체적인 결정, 달리 말하면 사건을 취소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때 자신에 의해 지각된 그 반대, 결정(마찬가지로 행위 : Bestimmung로서, 결과 : Bestimmtheit로서의)은 그것의 구체성 속에 남는다. 만일 근대성의 시간이 성취의 시간이라면, 이 실재의 성취는 사건의 광채를 신비화하거나 은폐하지 않는다. 헤겔의 변증법은 어떤 경우에도 특이성의 풍부함을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모호함은 극복할 수 없는 어려움을 가린다. 스피노자의 현존은 능력으로 충만한 존재의 현존이며, 특이성의 파괴불가능한 지평의 현존이다. 헤겔은 능력을 전도시키려고 시도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과정은 궤변론의 양상을 띈다. 왜냐하면 추구되는 그 목적은 동일한 능력을 재긍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헤겔은 스피노자의 존재 안에서 환원 불가능한 현존의 격렬함을 고발하고 그것을 비차이와 무로 밀어넣을 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특이한 현존이 다시 나타날 때마다, 헤겔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주장하는 그 실재성은 반대로 그 자신을 모든 특이한 잠재성들을 가지는 것으로 드러난다. 헤겔은 파악된 시간의 전망을 불만족스러운 무한정한 지속으로 생각할 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단지 반복적이고 메마른 초월적인(transcendental) 운동을 시간의 이론적인 실천―여기에서 후자는 현존의 결정으로 나타난다―에 대립시킬 수 있을 뿐이다. 헤겔의 체계가 위험에 처하게 되는 것은 바로 여기이다. 여기에서 역사적 발전의 성취로서의 근대성의 시간이 특이성의 출현에 반대할 때, Dasein의 긍정적인 시간에, 스피노자의 현존의 시간에 반대할 때 말이다. 헤겔의 근대성 개념은 이제 무엇이 될까? 헤겔은 그의 개념적 구성의 실체적인 모호성을 드러내야 한다. 왜냐하면 초월적인 매개의 리듬은 스스로를 특이성의 출현에 무겁게 포개기 때문이다. 만일 초월적인 것이 특이한 것의 에너지를 흡수하길 바란다면, 그것은 어쨌든 그것을 정당하게 평가하는데 성공하지 못한다. "무질서하고(acosmique)", "비시간적인(atemporal)" 것, 스피노자는 시간 개념을 거대한 변증법 기계가 몰수하길 원하는, 그러나 성공하지 못하는 현존으로서, 특이성으로서 표현한다. 근대성은 스스로를 낭만주의의 반대자로 드러낼 뿐 아니라, 특이성의 생산적인 힘을 회복하는 좌절한 의지를 증언한다. 하지만 이러한 좌절은 반복의 효능을 제거하지는 않는다. 근대성은 헤겔과 더불어 초월적인 것이 능력을 지배하는 기호, 능력의 도구적 합리성 안에서, 능력을 기능적으로 조직하려는 지속적인 시도의 기호가 된다. 따라서 이중의 관계가 동시적으로 헤겔과 스피노자를 동시에 연결하면서 분리시킨다. 둘 모두에게 존재는 충만하고 생산적인 것이지만, 스피노자는 능력을 무매개성과 특이성에 고정하는 반면, 헤겔은 매개와 능력의 초월적인 변증법을 특권화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만 스피노자적인 현존은 헤겔적인 생성에 반대된다. 스피노자의 반근대성은 Wirklichkeit의 부정이 아니라 그것을 Dasein으로 환원하는 것이다―헤겔의 근대성은 정반대의 견해를 구성한다.


  근대성의 운명

  실재적인 것, 즉 근대성은 "본질과 실존의 직접적인 통일성, 즉 변증법의 형식 하에서 내부와 외부의 직접적인 통일성"이다. 그런 것이 거의 두 세기 이래로 철학적 비판에 유행해온 폭풍우의 기원이다(15). 은의 시대 동안 그리고 훨씬 더 현대 독일 철학의 청동기 시대(즉, "비판의 비판"의 19세기, 그리고 아카데믹한 철학의 그 위대한 세기의 최후) 동안, 실체와 능력, Wirklichkeit와 Dasein은 항상 더 분리된다. 능력은 무엇보다 적대로 느껴지고, 그리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정의된다. 철학은 자신을 조금씩 조금씩 비합리적인 것을 몰아내는, 즉 능력을 방향전환시키는 숭고한 노력으로 변환된다. 무엇보다 절대적인 실체의 변증법적 헤게모니를 고정시키려는 헤겔의 맹렬한 의지는 위기와 비극적인 지평에 반대된다. 다음으로 그것은 계속해서 창백함을 제공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성의 효과적인 이미지를 제공하는 지평의 교체―그리고 이것은 맑스와 니체같은 위대한 인물들의 역설을 피하지 않는다― 속에, 다소간의 변증법적인 형식을 따라 초월적인 목적론을 끊임없는 갱신하는 임무에 반대된다. 생산력에 대한 생산관계의 우위는 헤겔적인 절대의 유토피아로부터 따온 것이며 개량주의적인 목적론의 외양을 취한다. 변증법적인 무한의 그것에 반대하는 무한정한 지속의 셰마들은 점증하는 지배의 합리성의 기획으로 갱신된다. 근대성은 침대를 바꾸지 않고 씨트를 갈아치운다. 그리고 이것은 그 어떠한 갱신 능력도 소진시키면서, 메마르고, 권위주의적이며 유토피아적인 헤겔의 근대성에 대한 위협을 우회함으로써 수 천개의 방법들을 발명하면서 지속한다. 그것은 이성과 초월성의 도식주의의 익숙한 형상들로 대체하려고 시도한다. 이것은 그 소진이 그 자신을 소모하고 그 자체에 대한 반성으로 회귀할 때가지 지속된다(16). 하이데거는 이러한 과정의 극한을 보여준다. 만일 Sein und Zeit의 목적들 중 하나가 초월적인 도식주의를 재사유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완벽하게 통합된 과정(17).

  하지만 그 과정이 평범한 자취 위에 다시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에 완벽히 벗어던져진 것이라면 말이다. ""존재"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구체적으로 정교화하는 것이 지금의 에세이의 의도를 구성한다. 시간을 일반적인 존재의 여하한 이해의 가능한 지평으로 해석하는 것, 그런 것이 그 잠정적인 목적이다"(18) 그러나 "존재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 과제가 될 때, Dasein은 1차적으로 물어야할 기체(l'?ant)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또한 이미 그 자신의 존재 안에서 우리가 이 질문을 던질 때 우리가 묻는 것에 대해 항상 적합한 기체이다. 그러나 존재의 문제는 존재의 본질적인 전존재론적인 경향의 급진화에 다름 아니다"(19). 현존의 테마는 다시 중심적인 것이 된다. Dasein은 부서지고, 현존으로서의 각 순간에 재발견되는 시간성이다. 현존이란 "그것들(On)"의 여하한 운동성과 산포(dispersion) 그리고 문화적인 유배(추방d?aysement)의 여하한 형태와 관련해서 안정성이며 자율적인 정착성(enracinement)이다. 그러므로 생성과 역사의 운명은 상업과 낙담의 기호 하에 위치한다. 효과성은 더 이상 헤겔적인 Wirklichkeit이 아니라 조잡한 Faktizit?일 뿐이다. 근대성은 운명이다. Sein und Zeit의 마지막 페이지들에서, 헤겔의 매개와 절대 정신에 반대하면서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반대로, 앞선 실존주의적 분석은 그것의 본원적인(originaire) 가능화로서의 시간성을 벗겨내기 위해 사실적으로 던져진 실존의 "구체(concr?ion)" 안에서 단숨에 이동한다. 무엇보다 "정신"은 시간으로 떨어지지 않지만, 그것은 시간성의 본원적인 시간화로 존재한다.... "정신"은 시간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사실적인 실존은 본원적이고 권위적인 시간성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면서 동시에 '추락한다'"(20). 여기, 이 추락에서, 이러한 "근심"이 되면서, 시간성은 자신을 가능성이자 미래에로의 자기-투사로 구성한다. 여기, 목적론과 변증법의 덫으로 빠지지 않으면서, 시간성은 Dasein의 가장 본원적이고 존재론적인 결정으로서 가능성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운명이 가능성을 열어젖히고 미래를 다시 한 번 여는 것은 바로 이 현존 안에서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Dasein을 증명할 수 있을까? 이 비극적으로 얽힌 실타래 안에서 죽음은 자신의 가장 확실한 Dasein의 가능성이다. 그러나 후자[죽음]는 또한 현존의 불가능성이기도 하다. "불가능성의 가능성"은 그러므로 자신의 가장 확실한 Dasein의 가능성이 된다. 따라서 바로 이렇게 근대성에 대한 헤겔의 테마는 성취된다. 실존과 본질의 직접적인 통일성은 무 안에서, 죽음 안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Bestimmung에 대한 향수어린 헤겔적 요구는 하이데거에서는 절망적인 Entschlossenheit이 되며, 자신의 진리에 Dasein을 개방하려는 숙고와 해결책은 곧 무인 것이다. 결정과 초월적인 것의 춤에 리듬을 제공하던 음악은 끝을 맺게 된다.

  능력의 시간(Tempus potentiae)

  하이데거가 근대성의 운명의 예언자인 것만은 아니다. 그가 분리되자마자, 그는 또한 반근대성으로 개방되는 전환점이다. 즉 존재론적으로 구성적인 관계―초월적인 것의 실체의 헤게모니를 부수고 그럼으로써 능력에로 개방되는―로서의 시간 개념으로 개방되는 전환점이다. 해결은 단지 폐쇄(Ent-schlossenheit)를 제거한다는 사실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기대와 개방과 관계되어 있으며, 그것은 그것이 Dasein 안에서 그 자신을 벗기는 한에서 진리이다. 존재의 발견은 미리 존재하는 개방의 사실(Ent-decken)만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On)"의 산포적인 이동성을 통해 그리고 그것에 반대하여 Dasein의 정초된 자율성을 위치지우는 사실로 구성된다. 그 자체에 유한을 부여함으로써, 거기-있음(거기-존재l'?re-l )은 열리며, 이 개방은 보여진다(Sicht) : 그러나 시각 이상으로 그것은 Umsicht, 즉 예견하는 신중함이다. 거기-있음은 가능성이지만 그것은 그보다는 존재하려는 능력이다. "우리는 "진리"를 가정하는데, 왜냐하면 Dasein의 존재 양태 안에서의 기체인, "우리"는 "진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Dasein―그리고 이것은 근심으로서의 존재의 구성을 함축한다―은 매번 그 자체를 넘어선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 안에서의 대자적인 존재이며, 그것은 거기에서[자신의 존재 안에서] 세계-내에-존재-하려는-능력이다. 그에 결합하여, 그것은 곧 내-세계적인 존재를 신중하게 발견하는 선점(선취pr?ccupation)이다. 근심으로서의 Dasein의 존재를 구성함에 있어서, 자신-의-앞-에 있는-존재에게, 가장 본원적으로 "가정되는 것"이 포함된다(21). 따라서 현존은 단순히 진리 안에, 존재의 비-은폐 안에서 현존하는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에, 진정성에, 존재의 새로운 뿌리에 투사되는 것을 의미한다. 시간은 능력을 열망하고, 그것의 생산성을 암시하며 그것의 에너지를 풀어놓는다. 그리고, 그것이 무로 되돌아갈 때, 그것은 어쨌든 그 능력을 잃지 않는다. 스피노자는 이 절합의 한가운데에서 다시 솟구친다. 능력의 시간(Tempus potentiae). 현존에 대한 스피노자의 주장은 하이데거가 우리에게 단순한 가능성으로 남긴 것을 채운다. 스피노자의 형이상학을 헤겔의 형이상학으로부터 구별시키는 [헤겔의] 생성과 관련하여 [스피노자의] 현존의 헤게모니는 하이데거적인 텅빈 현존과 맞대면하면서 그 자체로 현존의 충만함의 헤게모니로 그 자신을 거듭 주장한다. 근대성에 결코 진입하지 않으면서도 스피노자는 시간 개념―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생성 혹은 무로 채우길 원했던 것이다―을 긍정적으로 개방적이고 구성적인 시간으로 전도시키면서 여기서 근대성으로부터 빠져 나온다. 동일한 존재론적 조건들 하에서, 사랑은 "근심"의 자리를 대체한다. 스피노자는 체계적으로 하이데거를 전도시킨다. 그는 Angst(근심)을 Amor(사랑)에, Umsicht(신중함)을 Mens(정신)에, Entschlossenheit(해결)을 Cupiditas(욕망)에, Anwesenheit(현-존재)를 Conatus(코나투스)에, Besorgen(관심)을 Appetitus(충동)에, M?lichkeit(가능성)을 Potentia(능력)에 대립시킨다. 이러한 반대 속에서, 종말목적론에 반대하는 현존과 가능성은 존재론의 다른 정향이 분리시키는 것을 통합한다. 동시에, 차이나지 않는 존재들의 의미들은 정확히 나눠진다―하이데거는 그 자신을 무로 정향하며, 스피노자는 충만함으로 정향한다. 공허 속에서 흔들리는 하이데거의 모호함은 현재를 충만함으로 파악하는 스피노자의 압력(tension) 속에서 용해된다. 만일 하이데거에서와 마찬가지로 스피노자에게 양태의 현존, 오히려 현상-논리학적인 기체들이 그것들로부터 결과된 자유를 갖는다면, 하이데거와 달리 스피노자는 그 기체를 생산적인 힘으로 인식한다. 시간을 현존으로 환원하는 것은 반대 방향, 즉 무 혹은 현존에 대한 창조적인 주장에로 자기 자신을 정향시키는 현존의 구성으로 열린다. 두 구성적인 방향은 동일한 지평으로부터 개방된다. 만일 하이데거가 근대성에 대한 그의 설명을 해낸다면, 스피노자(결코 근대성에 진입하지 않았던)는 완벽하게 미래를 향해 투사된 반근대성의 길들여지지 않는 힘을 보여준다. 스피노자에게 사랑은 능력의 시간을 표현한다. 그 시간은 그것이 영원성을 구성하는 활동인 한 현존이다. 심지어 윤리학 5권(22)의 어려우면서도 문제 설정적인 발생에서조차, 우리는 충분히 이러한 개념적 과정을 결정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현존과 영원성의 동일성에 대한 형식적 조건은 모든 것에 앞서 주어진다. "정신은 일종의 영원성을 가진 것으로 인식하는 모든 것을 신체의 현재의 현실적 실존을 파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신체의 본질을 일종의 영원성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인식하는 것이다(23)". 명제 30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우리의 정신이 자신과 신체를 영원성을 가진 사물들로 인식하는 한, 그것은 필연적으로 신에 대한 인식을 가지며, 자신이 신 안에 있으며 신에 의해 파악된다는 것을 안다"(24). 최종적인 설명은 명제 32에서 발견된다. "제 3종의 인식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신에 대한 지성적인 사랑이 발생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종류의 지식으로부터 원인으로서의 신에 대한 관념을 동반하는 기쁨, 즉 현존하는 것으로 우리가 그것을 표상하는 한에서가 아니라, 신이 영원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한에서 신에 대한 사랑이 발생한다. 그것을 나는 신에 대한 지적인 사랑이라고 부른다"(25). 따라서 영원성은 현존의 형식적인 차원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는 다음의 역전과 설명이 있다. "비록 신에 대한 이 사랑이 시초를 갖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마치 그것이 생겨난 것처럼 여전히 사랑의 모든 완전함을 가진다"(26). 따라서 지속의 덫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라. "만일 우리가 인간들의 의견에 신경을 쓴다면, 사실 그들은 자기들의 정신의 영원성을 의식하기는 하지만, 영원성을 지속과 혼동하며, 표상이나 기억에 영원성을 부여하며 그것들이 사후에도 존속한다는 믿음을 우리가 알게 된다"(27). 이와 비슷하게, "정신의 이러한 사랑은 정신의 활동과 관계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이 활동은 원인으로서의 신 관념을 성취하면서 정신이 자기 자신을 고찰하는 활동이다. 즉 이 사랑은 인간 정신으로 설명될 수 있는 한에서의 신이 자신의 관념을 동반하면서 스스로를 고찰하는 활동이다. 그러므로 정신의 이러한 사랑은 신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무한한 사랑의 일부이다"(28). "이로부터 우리는 우리의 구원, 즉 지복 혹은 자유―내가 신을 향한 끊임없는 영원한 사랑 안에서 혹은 인간들을 향한 끊임없고 영원한 사랑 안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가 무엇에 있는지를 명확하게 인식한다. ... 그리고 이 사랑은 사실 신에 관계하는 한, 그것은 기쁨이다"(29). 그리고 논증은 어떠한 더 이상의 가능한 모호함도 없이 명제 40으로 끝을 맺게 된다. "각 사물이 완전함을 가지면 가질수록, 그것은 더 능동적이고 덜 수동적이다. 그리고 역으로 그것이 더 많이 활동하면 할수록 그것은 더욱 완전해진다"(30). 능력의 시간은 따라서 구성적인 활동이 현존 안에 머무는 한 영원성으로 구성된다. 여기에서 가정된 영원성은 결과로서, 행동의 긍정의 지평으로서 보여진다. 시간은 스피노자적인 충만함이다. 혹은 오히려 영원성의 역설, 현 세계의 충만함, 특이성의 탁월함이다. 근대성의 개념은 사랑에 의해 불태워진다.

  스피노자의 반근대성

"이 신을 향한 사랑은 시기나 질투의 정동(une affection)에 의해 더렵혀질 수 없다. 그러나 인간들이 동일한 사랑의 유대로 신과 결합하기를 상상할수록, 그것은 더욱 촉진된다"(31). 따라서 추가적인 요소가 스피노자의 반근대성의 정의에 첨가된다. 그 자신의 체계―그것은 본질적으로 윤리학의 3권과 5권에서 형성된다―의 동역학에 따라, 스피노자는 신성에 대한 사랑의 집단적인 차원을 구성한다. 근대성이 개체주의적이고, 이러한 토대로부터 출발하여 토월적인 것 안에서 매개와 재구성의 장치(dispositif)를 찾는 것에 구속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스피노자는 인간 공동체의 구성적 과정에, 그것의 절대적인 내재성에 어떠한 외적인 차원도 근본적으로 부정한다. 이미 신학 정치학-논고에서 부분적으로 드러나는 것이지만, 이것은 정치학 논고에서 완전히 명확해진다. 왜냐하면 아마도 윤리학 5권 명제 20을 지배하는 사유의 선을 이해하게끔 하고, 보다 잘 집단적인 본질로서 지적인 사랑의 구성적인 운동들의 전체 배치(dispositif)를 이해하게끔 하는 것은 바로 정치학 논고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지적인 사랑은 사회화의 형식적인 조건이며, 꼬뮌주의적인 과정은 지적인 사랑의 존재론적 조건이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지적인 사랑은 대중의 역설과 그것의 공동체-되기를 밝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적인 사랑만이 능력(potentia)을 대중(multitudo)으로부터 절대적인 정치 질서―potestas democratica(민주주의 권력(32))―의 통일성으로서 그 자신을 결정하게 이끄는 진정한 메커니즘을 기술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근대성은 민주주의를 어떻게 정당화 해야하는 지를 알지 못한다. 근대성은 항상 민주주의를 한계로 파악하며, 그럼으로써 그것을 초월적인 것의 전망으로 변형시킨다. 헤겔적인 절대는 일단 모든 특이성들은 부정성으로 환원된 채, 단지 집단적인 생산 능력을 설명하거나 그것으로부터 유출되는 권력을 설명할 뿐이다.

  그 결과는 항상 필연적으로 형식적이기만 한 민주주의 개념(33)이다. 그리고 이러한 작용의 진정한 결과는 생산적인 힘들을 생산관계들의 지배에 종속시키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어떻게 집단적인 생산의 억제할 수 없는 물질적 층위들이 그런 패러다임이 되도록 할 수 있을까? 근대성의 가장 소박한 차원에서, 이러한 지배 관계는 항상 그랬듯이 다시 한 번 지속을 통한 현존으로 환원하고 재생산하는 과정을 통해 "끝나지 않은 것"의 범주로 바꾸어 놓여진다(34). 아니다. 특이성들의 승리, 그들 스스로를 대중으로 위치 짓는 방법, 그들 스스로를 더 넓은 사람의 결속 안에서 구성하는 방법은 끝나지 않는 어떤 것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말을 알지 못한다. 반대로 이 과정들은 항상 완결되어 있으며 항상 열려있다. 그리고 완결과 개방 사이에 그 자신을 놓는 공간은 절대 능력, 총체적인 자유, 해방의 경로의 공간이다. 스피노자에게서 유토피아를 부정하는 것은 현존 지평으로의 해방 능력의 총체적인 회복 때문에 발생한다. 현존은 리얼리즘을 유토피아에 반대되는 것으로 부과한다. 그리고 유토피아는 현존을 구성적인 투사(기획)에 개방시킨다. 헤겔이 바랬던 것과는 반대로, 측정 불가능함과 현존은 절대적인 결정과 절대적인 자유의 영역 위에 함께 머문다. 개방을 채울 수 있는, 자유 안에 틈새를 만족시키거나 채울 수 있는 어떠한 이상도, 어떠한 초월도, 어떠한 비완결된 투사도 존재하지 않는다. 개방, 측정불가능 그리고 절대는 현존 안에서 완결되며 완결되어 있다. 그 현존을 넘어서면 새로운 현존만이 주어질 수 있다. 사랑은 영원한 것을 현존에 되돌려주며, 집단성은 절대적인 것을 특이성에 되돌려준다. 하이데거가 내-세계성과 세계-내-존재의 진정성 사이에서 특이성에 대한 사회적인 현상학을 발전시킬 때, 그는 스피노자에 의해 수행된 것에 유비적인 초월적인 것에 대한 반대를 발전시킨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근대성의 위기의 고리는 그 위에 닫히며 생산적인 능력은 무 안에서 요동친다. 반대로, 결정 속에서, 기쁨 속에서, 스피노자적인 사랑은 그것이 시간성의 지평에서 발견하고 그것을 집단성으로 구성하는 것을 고양시킨다. 스피노자의 반근대성은 집단성으로서 존재론적으로 구성된 생산적인 힘에 대한 분석과 설명으로서 저항할 수 없는 방식으로 여기에서 폭발한다.

  되살아난 스피노자

  헤겔에 의해 막이 열린 근대성에 대한 정의의 싸이클―즉, 능력을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형태로 환원시키는 것이 그것의 극점에 다다른, 그리고 결과적으로 관계의 위기가 능력을 쫓아내고 비합리성과 무로 그것을 환원시키는 것에 의해 지배되는 싸이클―은 따라서 만기에 다다랐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스피노자주의는 더 이상 단순히 역사적인 표시기로서가 아니라 작동하는 패러다임으로서 현대 철학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정말로 스피노자주의는 항상 근대성을 비판하는 참조점을 대표해왔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데카르트로부터 헤겔 그리고 하이데거에 이르는 근대성 개념을 형성하는 주체-개인의 개념, 매개와 초월적인 것의 개념을 집단적인 주체, 사랑 그리고 현존의 능력들로서의 신체라는 개념에 대립시키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종말목적론에 의해 찢긴 시간 이론을 구성한다. 그것은 구성 과정으로 파악된 존재론의 토대가 된다. 바로 이 토대 위에서 스피노자주의는 근대성의 정의에 대한 대안의 촉매제로 작용한다. 그러나 왜 우리는 그것을 '대안적인'이라는 제한된 용어로 정의함으로써, 근대성의 형태들을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그 오래된 지위에 반대해야 하는가? 대안의 영역에서, 우리는 매개의 기술에 아주 숙달된 타협의 지위들을 발견한다―하버마스의 지위들 같은 것. 그는 그의 근대성 이론의 기나긴 발전 과정 속에서(35), 헤겔이 현상학적으로 근대성을 상호작용과 미완성 속에서 자기 자신을 형성해나가는 절대성으로 구성한 페이지들에 대한 희미하고 온화한 반복을 결코 성공적으로 극복하지 못했다.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다. 되살아난(redivivus) 스피노자는 다른 곳에 있다. 그는 근대성의 기원을 파괴하는 것―생산적인 힘(생산력)과 생산 관계 사이의, 능력과 매개 사이의, 특이성과 절대 사이의 파괴―이 다시 취해진 곳에 있다. 근대성에 대한 대안이 아닌 반근대성, 강력하고 진보적인 반근대성. 어떤 현대 저자들은 행복하게도 스피노자의 반근대성에 대한 우리의 정의를 알려준 바 있다. 알튀세르: "스피노자의 철학은 우리가 그를 철학적인 관점에서 맑스의 유일한 직접적인 선조로 간주할 수 있을 정도로, 철학사에서 전례가 없는 이론적 혁명, 의심의 여지 없이 모든 시대에 가장 커다란 철학적 발견을 도입한다"(36). 왜일까? 왜냐하면 스피노자는 목적론 없는 절대적으로 독창적인 실천 개념의 설립자이기 때문이며, 그는 그것들의 효과 안에서 원인의 현존을 사유하고, 그것의 효과들과 현존에서 바로 그 구조의 실존을 사유하기 때문이다. "구조의 전체적 실존은 그것의 효과들로 구성된다 ; 단순히 그것의 고유한 요소들의 특정한 조합일 뿐인 구조는 그것의 효과들 외부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37). 푸코에게서 스피노자는 이 토대 없는 구조적 독창성을 규범들의 생산의 메커니즘으로 전화시킨다. 그것은 그 자체를 집단적인 현재에 토대지운다: "그 때문에 우리는 철학자에게 이 현재를 포함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더 이상 어떤 교리 혹은 어떤 전통을 포함하는 문제가 아님을, 그것은 더 이상 일반적인 인간 공동체를 포함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님을, 그것은 어떤 "우리(nous)"를, 그것들 자신의 현실성을 특성으로하는 문화적 전체와 관련 있는 우리를 포함하는 문제임을 보게된다. 철학자에게 그 자신의 성찰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이다. 따라서 철학자들이 이 우리를 포함하는 그의 특이한 질문을 무시하는 것의 불가능성. 이 모든 것 때문에, 현실성을 문제설정하는 것으로서의 철학 그리고 자신이 그 일부를 구성하는 현실성의 철학자에 의해 물어진 철학 그리고 그가 자신을 위치지어여만 하는 관계 안에서, 철학은 근대성의 그리고 근대성에 대한 담론으로서 철학을 특징지을 지 모른다"(38). 이러한 관점에서 푸코는 운명으로서의 근대성이라는 개념을 현존과 소유로서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전도시키는 지위로부터 "진리에 대한 정치 이론" 혹은 "알고자 하는 의지의 정치 경제학"(39)을 제안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들뢰즈에게서 스피노자는 현재에서의 실천의 내재성을 효과성에 대한 비시대적인 것의 승리의 극한으로까지 밀어붙인다―그리고 여기에서 주체는 내부와 외부의 상호 운동의 결과로서 스피노자적인 방법으로 제시되면서, 항상 절대적인 가능성에 다시 열리는 세계의 단조로운 현존 위에서 그 자신을 집단적인 주체로서 발견한다(40). 그러므로 반근대성은 현재의 역사의 개념이며, 집단적인 해방 개념으로 고쳐진다. 극한으로서 그리고 극한의 극복으로서. 그것의 신체와 영원성 그리고 현존으로서. 가능성에 대한 무한한 재개방으로서. Res gestae, 이론의 역사적 실천.

Notes :

1) Manfred Walther, Spinoza en Allemagne. Histoire des probl?es et de la recherche, Spinoza entre Lumieres et romantisme, "Les Cahiers de Fontenay", n. 36-37, mars 1985, p. 25.

2) Peter Szondi, Poesie et poetique de I'idealisme allemand, Paris, Ed.de Minuit, 1975, p. 10.

3) Antonio Negri, Stato e diritto nel giovane Hegel, Padoue, Cedam, 1958, p. 158.

4) Martial Gueroult, La philosophie schellingienne de la libert , Studia philosophica. Schellingsheft, XIV, 1954, p. 152, 157.

5) G.W.F. Hegel, Asthetik, Berlin, Aufbau, 1955, II Teil, Ⅲ Abscnitt.

6) G.W.F. Hegel, La Th?rie de la Mesure, trad franc. de Andr  Doz, Paris, PUF, 1970. 그것은 Wissenschaft der Logik의 1권의 3섹션을 다룬다. 여기에서는 Lasson, F. Meiner, Hambourg, 1967, p.336-398이 이용되었다.

7) Pierre Macherey, Hegel ou Spinoza, Paris, Maspero, 1979.

8) G.W.F. Hegel, Logik, p. 338-339인용; Martial Gueroult, Spinoza I, Dieu, Paris, Aubier, 1968, p. 462; Ernst Cassirer, Das Erkenntnis-Problem in der Philosophie und Wissenschaft der Neueren Zeit, Berlin, 1952.

9) G.W.F. Hegel, La science de la logique, t. I, Paris, Aubier Montaigne, 1972.

10) Pr?is de l'Encyclop?ie des Dciences philosophiques, Paris, Vrin, 1970
  p.159. 이 페이지에 대해서는 E. Cassirer의 논평 참조. 위의 책, p.443-444

11) Spinoza, Ethique, Paris, Garnier-Flammarion, 1965, Ⅲ, 8과 증명

12) Ethique, IV, Pr?ace.

13) Ethique, V, 23, Scolie.

14) 다음의 것을 위해서는, La Th?rie de la Mesure, 위의 쪽, Encyclop?ie, 92쪽, 그리고 카시러의 논평 참조, 위의 책, p.429.

15) K.Lowith, De Hegel   Nietzche, Paris, Gallimard, 1969.

16) Antonio Negri, chapters VIII (L'irrazionalismo) 그리고 IX장(Fenomenologia e esistenzialismo), vol Ⅹ, La filosofia contemporanea, Mario Dal Pra에 의해 기획, Corno-Milan, Vallardi, 1978, p. 151-175. 위르겐 하버마스의 신-칸트주의를 재평가하려는 시도, Le Discours philosophique de la modernit , Paris, Gallimard, 1988.

17) 그 기획은 Sein und Zeit의 서문 말미에 언급되었다. 그러나 역시 Heidegger, Kant und das Problem der Metaphysik, Cologne, Cohen, 1929를 보라.

18) Etre et Temps, trad. E.Martinau, Paris, Authentica, 1985, p.23.

19) Ibid., p. 34.

20) Ibid., p. 295.

21) Ibid., p. 168.

22) Antonio Negri, L'Anomalie sauvage, puissance et pouvoir chez Spinoza, Paris, PUF, 1982. 이 에세이에서 나는 윤리학 5권이 깊은 모순을 보여주며, 두 가지 다른 정향이 거기에 공존함을 주장했다. 오늘날 나의 해석에 반대하여 제기된 많은 비판들을 평가한 이후에, 나는 특히 분리의 과도한 선을 주장했던 것을 유지한다. 특히 나는 내가 훨씬 나중에 강조했던 것처럼, 5권에서 만들어진 지적인 사랑이라는 개념이 정치학 논고로부터 시작해서 재독해될 수 있으며, 따라서 스피노자의 체계의 전체의 빛 속에서 재평가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23) Ethique, V, 29.


24) Ethique, V, 30.

25) Ethique, V, 32, Coroll.

26) Ethique, V, 33, Scolie.

27) Ethique, V, 34, Scolie.

28) Ethique, V, 36, Scolie.

29) Ethique, V, 36, Scolie.

30) Ethique, V, 40.

31) Ethique, V, 20.

32) 나는 여기에서 어떻게 윤리학 5권의 상대적인 모호함이 지적인 사랑과 정치학 논고에서 기술된 민주주의 구성 과정을 통합하는 독해를 통해 해결될 수 있는지를 새롭게 강조하고 싶다. 이러한 입장에 반대하는 것으로는 C. Vinti, Spinoza. La conoscenza come liberazione, Rome, Studium, 1984, IV장을 보라. 그것은 야생적 별종에서 발전된 나의 해석 입장을 사용하면서, 스피노자의 체계 내에서 초월성의 경향을 발견해내기 위해 그것을 급진화시킨다.

33) 나는 여기에서 R. Haym(1957), F. Rosenzweig(1920), 그리고 E. Weil(1950)으로부터 구성된 그러한 헤겔에 대한 자유-민주주의적 해석을 참조한다.

34) Jiirgen Habermas, Kleine Politischen Schriften, I-IV, Francfort, Suhrkamp, 1981, p. 444-464.

35) 1968년의 Travail et interaction부터 1980년의 La Modernit , un projet inachev , 1985년의 Discours philosophique de la modernit涌  이르기까지.

36) Louis Althusser, Lire le Capital, Paris, Maspero, 1965), vol. II, p. 50.

37) ibid, p. 171.

38) M. Foucault, L'ordre du discours, Paris, Gallimard, 1971.

39) M. Foucault, La Volont  de savoir, Paris, Gallimard, 1976.

40) G. Deleuze, Foucault, Paris,  Ed. de Minuit, 1986, p.1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