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방금 최원氏의 홈페이지(www.geocities.com/spinoc)의 철학란에 실려있는, 에티엔   발리바르의 <스피노자, 안티-오웰: 대중들의 공포>란 논문을 읽으며 한 생각이다.

  그 글을 읽으며 나는 내 공부법이 갖고 있는 두 가지 결함을 발견하게 되었다. 굳이 이름짓자면, 그것은 '사상적 소급주의', 그리고 '원전주의'이다.

  예를 들면, '사상적 소급주의'란, 화이트헤드가 "서양철학사는 플라톤의 각주이다"라고 한 언명에서 읽히기 쉬운데, 맑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헤겔을 읽어야하고, 헤겔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칸트를 읽어야하며, 칸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흄, 흄의 문제설정을 이해하려면 데카르트를 읽어야한다는 식의 주장을 일컫는다. 그것은 '원전주의'에서 비롯하는데, 이전 세대 사상가들의 원전을 정확히 독해해내지 않고서 후대 사상가들을 이해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논리이다.

  물론 지난 봄에 민예총 문예아카데미에서 김재인氏의  <천 개의 고원> 강좌를 들으며, 들뢰즈가 그런 식의 입장에 크게 반대했다는 말을 듣고 반성해왔다. 본인 스스로 수많은 철학자들에 대한 주석서를 썼으면서도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그 모든 철학자들을 섭렵하길 바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스스로 니체주의자라고 말하는 들뢰즈를 보며 니체 자체에 대한 정확한 독해를 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것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만일 니체를 보며 들뢰즈가 오독한 부분을 찾는다면, 내가 들뢰즈를 넘어설 수 있는 지점이 바로 그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면서 말이다.

  내가 지금 철학아카데미에서 참여하고 있는 니체 세미나를 이끄시는 백승영 선생님의 경우, 들뢰즈는 니체주의자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영원회귀의 필연성의 부분에 있어, 니체와는 달리 들뢰즈의 경우 다분히 우연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럴 때 나의 당혹스러움이란! 니체가 먼저인지, 들뢰즈가 먼저인지! 아, 내가 들뢰즈를 넘어설 수 있겠구나, 하며 좋아해야 되나? 그렇게 들뢰즈가 만만한가? 그럼 그의 독창성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지? 이런 아포리아를 어떻게 벗어나야 할까?

  다행히도 내가 지금까지 의식해왔지만 충분히 그렇지 못했던, '사상적 소급주의'와 '원전주의'에 대한 반성을, 앞서 말한 발리바르의 논문을 읽으며 하게 되었다. 그의 논문을 읽으며 그간 들뢰즈와 네그리에 대한 얘기를 통해 접해온 스피노자와 상당히 다른 스피노자를 알게 되며 일종의 깨우침을 얻게 되었다. 백승영 선생님식으로 하자면, 네그리 역시 스피노자주의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백선생님과는 달리 생각하게 되었다: "들뢰즈는 니체주의자이다. 다만 니체가 아닐 뿐이다. 마찬가지로 네그리도 스피노자주의자이다. 다만 스피노자가 아닐 뿐이다."

  들뢰즈/가타리가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강조하듯이, 철학자에게 중요한 것은 '개념의 창조'이다. '창조'는 새로운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들뢰즈나 네그리를 비판할 때, 그들이 얼마나 니체와 스피노자와 유사하고 다른지를 놓고 논리를 전개하면 안된다. 너무 당연하게도 그들은 현대 철학자들이다! 그들을 논할 때 현대라는 문맥을 놓쳐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비판의 척도는, 가장 중요하게는 '실천에의 유용성'-줄여서, '실용성'-이어야 한다.

  그렇다고 실천을 위한답시고 마구잡이로 그들을 오독의 칼로 난도질하는 것도 대단한 실례일 것이다. 적어도 그들이 구사하는 개념의 용법은 정확히 익힐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개념들이 갖고 있는 힘은 저자들의 삶의 '견실성(consistance)'이 갖는 해방적 잠재성에서 뿜어질 것이며, 또한 우리 삶의 '견실성'이란 잣대로 우리는 그 개념들을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쉽게 말해 '자알' 살고 있는 사람이 글도 잘 읽고 쓸 잠재력이 있고, 나아가 더 큰 해방을 이루어낼 잠재력이 있다. 그렇기에 우리가 다시 돌아가야 할 지점은 -어쩌면 싱겁게도- 바로 우리의 삶인 것이다.

  어떻게 우리의 삶을 견실하게 만들어낼 것이냐는 또다른 큰 의제이므로 나중으로 미루겠다. 다만, 나에게 있어 오늘 깨달은 공부법은 현대 이론을 전유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내 삶이 그 이론들을 비판-성찰적으로 다룰 만큼 견실하길 소원한다. May God bless 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