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에 '왜냐면'이라는 지면이 있는데, 교육에 대한 재미있는 논쟁이 꾸준히 되고 있습니다.

저도 참여해 보고 싶어서 글 하나를 보냈습니다.

채택될 지 안될지는 모르겠는데, 그 글을 같이 나눕니다.

 

 

 

‘학교없는 사회’도 상상해 보자.

 

 

 

교육 문제는 워낙 폭발력이 강하고, 어떤 점에서는 자본주의, 사회주의 같은 사회 체제에 대한 논쟁의 의미도 갖는다.

일반적인 사회 체제 논쟁이 정치 사회학자나 이론가들이 중심인데, 교육 논쟁은 사실상의 체제 논쟁임에도 평범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중심이 되는 진정한 의미에서 다중 주체의 논쟁이다.

교육 논쟁의 마지막 지점 중 하나가 ‘학교없는 사회’이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꼭 ‘논쟁 종결자’가 되는 기분이다.

 

학교없는 사회 개념은 사회 사상가 이반 일리치의 책 ‘deschooling socity'에서 시작되었다.

이반 일리치는 현대 사회를 ‘가치가 제도화되는 사회’라고 비판했다.

근대 이전 사람들은 배우고 싶은 것이 있으면 스승을 찾아서 배웠고, 또 많은 공부가 생활과 분리되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인은 교육이 삶과 분리되어 학교에 등록을 하고 졸업을 해야 인정을 받는다.

이 과정에서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누구나 자유롭게 배우고 가르쳤던 ‘배움’이라는 가치는 ‘학교 제도’가 되었고, 이 제도는 배움을 합리적으로 지원하는 기능보다는 제도 자체와 사회 체제를 유지하는데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면서 오히려 ‘배움의 가치’를 파괴한다.

이반 일리치의 학교 비판은 그 이론이 나온지 40여년 만에 한국에서 가장 표본적인 현실이 되었다.

 

한번쯤 이런 상상을 해보면 된다.

만약 학교가 없다면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

이런 상상을 막는 요소 중 하나가 제3세계 가난한 아이들이 학교에 못가고 저임금 작업장에서 일하면서 가장 가고 싶어 하는 곳이 ‘학교’라고 말하는 걸 보면서, 학교는 반드시 지켜야 할 우리 사회의 공동 자산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직접 물어보면, 그것도 가난하고 공부 못하는 아이들 집단과 이야기해보면 아이들이 학교에 대해 가지는 분노는 상상을 초월한다.

학교를 불지르고 싶다는 건 누구나 하는 이야기 정도이다.

 

학교없는 사회는 알렉산더 대왕이 풀 수없는 매듭인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앞에 놓고 누구도 방법을 못찾을 때 칼을 꺼내 단번에 잘라버린 이야기의 현대판이나 마찬가지이다.

현재의 학교는 합리적 이성이나 논리로 풀 수 없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이다.

단칼에 잘라버리고 그 때 우리 앞에 주어지는 빈 공간에서 다시 시작하는 의미이다.

말도 안될 것 같은 이야기인데, 알게 모르게 학교없는 사회는 이미 넓은 지지를 받고있다.

많이 알려진 대안학교 구성원은 학교없는 사회 전체의 1% 정도 될 것 같다.

모습을 갖지 않고, 교육 과정을 갖지 않고, 배우고 가르침의 구분을 없앤 새로운, 어쩌면 유령같은 그렇지만 학교라는 제도 속에 갇히지 않고 배움의 가치에 충실한 사회는 ‘인터넷에서, 길거리에서, 농촌 마을에서, 전국의 도서관에서, 인문학 공동체에서, 극장, 연극 무대, 공연장에서, 다양한 시민단체 모임에서’ 지금도 확산되고 있다.

배움만 가지고 생각하면 ‘학교없는 사회’는 ‘학교 사회’보다 배움의 질에서는 이미 월등하게 앞서있고, 양에서도 결코 학교에 뒤지지 않느다.

 

조선시대 말기 동학 조직은 국가의 탄압으로 외부로 드러나는 종교 조직없이 점과 점으로 연결되어 조선 인구 세명 중 한명을 받아들였다.

조선이라는 국가가 있었지만, 사실상 부패한 사익추구집단이었고,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와 사회 복지를 실현하고, 계급 사회를 넘어 인내천의 근대적 주체성을 자각하도록 도운 조직은 조직없는 조직 방식을 택한 ‘동학’이었다.

 

학교 사회의 문제는 이미 극에 달했다.

아이들과 중요한 교육 과제를 실천해 볼려고 하면 늘 장벽에 부딪치는 게 학교다.

이건 그냥 놔두는 수 밖에 없다.

그 속에 갇힌 아이들이 마냥 안타깝지만 스스로 해방되길 원하지 않으면 누구도 도울 수 없다.

그러나, 학교없는 사회와 학교 사회는 대립적 관계이기 보다는 상호 보완적 관계가 될 가능성이 높다.

학교 사회의 문제는 학교없는 사회를 통해 재구성할 수 있다.

지금까지 학교가 변한 것은 스스로 찾았다기 보다는 ‘대안 학교’같은 학교없는 사회가 생겨나면서 언론의 주목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마 머쟎은 미래에 우리 사회는 무수한 문제 덩어리인 학교 사회에 사는 사람과 해방의 공간인 학교없는 사회에 사는 사람으로 나누어 질 것이다.

대학을 다니다 그만 둔 주커버그가 페이스 북을 만들어 세계 최고의 기업을 만들듯, 해방 공간의 아이들이 시험 공부만 하는 아이들보다 독서량과 사회 경험이 훨신 더 많기 때문에 그 아이들이 학교 사회 아이들을 도우며 미래를 훨씬 더 많이 책임지고 창의적으로 이끌어 낼 거다.

 

교육은 공부를 많이 하는 게 아니라 공부라는 도구를 통해 ‘도덕성, 책임, 창의적 능력 등’을 키우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학교 교육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성공하지 못했다.

단지 학교를 통해 공부한 아이들의 숫자가 많아서 그걸로 ‘학교 사회를 구성하고,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것’ 뿐이다. 우린 그걸 사회성이라고 부른다.

학교없는 사회의 아이들은 사회성보다는 ‘도덕성, 책임, 창의성’으로 사회를 구성하게 될 건데, 아마 대부분 가난한 삶을 스스로 선택하게 될거다.

돈을 적게 벌거나, 생계를 간신히 해결할 지 몰라도 자신과 하늘에 정직하고 떳떳하게 살게 될거다.

우리 시대의 행복은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살려고 하는 의지이고, 학교없는 사회는 그걸 교육으로 도울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