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작은 것이 아름답다 2월호에 제 인터뷰 기사가 실렸어요.

우리집을 찾아와서 인터뷰 할려고 했는데, 요즘 우리 마을은 어느 정도 통제가 되고 있어서

제가 서울오는 일이 있어 작아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했어요.

인터뷰 전에 질문지를 먼저 보내와서 거기에 답을 보내줬어요.

 

실제 인터뷰 기사는 제가 구하는 대로 따로 올려둘게요.

 

 

1102_작아가 만난 사람 - 김재형 선생님

<삶과 가치>

1. 삶을 가로질러온 화두는 무엇이었습니까? 지금껏 활동해 오시면서 품고 있던, 삶과 사건과 일상에서 늘 담아내고 풀어 오신 화두는 무엇입니까?

무엇에도 억압당하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살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이 생각을 통해 ‘땅에 뿌린 내린 삶’을 생각했다.

땅과 자유 - 아나키즘의 이상 중 하나이다.

자유롭게 살더라도 나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순종하고 받아들여야 할 가치도 있을 것 같다.

진리와 겸손

2. ‘김재형’은다. 선생님을 스스로 정의하신다면, 어떻게 말씀할 수 있을까요.

아나키스트이다.

프롤레타리아, 아나키스트, 다중 이런 말들은 정의가 불가능한 언어이다.

이 말들은 시대와 상황이라는 배경을 깔고 있어서 굳이 정의하고자 하면, ( ) 시대의 ( ) 상황에서는

( ) 이런 의미이다. 이렇게 표현할 수 밖에 없다.

각자가 처한 시대마다 아나키즘의 정의는 다르다.

우리 시대의 아나키스트는 국가 권력에 대한 저항 뿐만 아니라 삼성같은 재벌, 원자력 에너지, 초고속 운송 수단, 은행, 병원, 학교, 거대 종교, 거대 네트워크에 대한 거부를 포함하게 된다.

각자 처한 상황마다 해석이 다를 수 있고, 나 경우는 아이가 있어서 아나키즘을 학교없는 사회로, 소규모 자급농이어서 아나키즘을 신자유주의 반대, 거대 시스템 거부로, 무소유의 의지가 있어서 저축에 대한 거부(돈을 주고받는 기능으로 은행은 받아들이지만) 이런 내용을 아나키즘으로 해석한다.

3. 선생님께서 현재를 마주하는 방식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무엇에 초점을 두고 살아가시는 지요.

현재를 고정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어떤 방식으로든 변화가 있고, 변화의 때가 되면 흐룸이 바뀐다.

4. 살아오시면서 어떠한 선택을 하거나 결단을 내려야할 때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곤 하셨는지요. 선생님의 선택과 결단 가운데 가장 최선의 선택은 어떤 것입니까.

땅,자유,진리

특별히 한가지를 말하긴 어렵다.

모든 선택이 살아왔던 삶에 영향을 받아서 독립된 사건의 선택은없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대학을 졸업하는 시점에 헨리 조지의 사회 변혁론인 ‘진보와 빈곤’이 사회를 보는 눈을 만들어 줬다. 이후는 크게 봐서 이 생각의 범주를 다양하게 변주하면서 살았던 것 같다.

80년대에 헨리 조지를 기준으로 삼겠다고 생각한 사람은 정말 소수였다. 나는 운이 좋았다.

흔히 우리쌀 지키기 100인 100일 걷기 운동을 나의 중요한 운동 성과로 말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건 정말 한 개인의 성과가 아니라 100일 걷기를 함께 한 모든 이들의 공동 성과였다.

보따리학교는 지금 9년째 하고 있는데, 이건 그냥 놀이다.

세상에 이렇게 재미있는 놀이를 같이 즐기지 못하는 지 안타까울 때가 많다.

그런데, 보따리학교에 참여한 20대 이하의 아이들에게 위의 질문을 하면 ‘보따리 학교’에 처음 간 일을 드는 경우가 많을 것 같다. 보따리학교는 15세 이하의 아이들에게는 강력한 생의 관점이 바뀌는 경험이다.

5. 어린 김재형 님이 꾸었던 꿈은 어떠한 것이었습니까. 성장과정을 뒤돌아보시면 그 꿈은 어떠한 방식으로 지금에 닿는지요. 어린 시절, 청소년, 청년기를 거치시면서 관심을 두었던 것, 고민했던 것, 꿈꾸었던 것은 어떤 것이었나요?

가난하게 살았고, 기독교 신앙을 실천하고 싶었다.

가난한 삶에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소박하고 단순한 삶이 늘 편하고 행복했다.

돈이 많으면 그걸 어떻게 써야할지 힘들지만, 가난한 삶에서는 선택의 갈등이 거의 없다.

갈등과 고민이 사라진 자리에 나의 현실에서 누릴수 있는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지혜가 생겼다.

되고 싶은게 있었지만 되지도 않았고, 내가 원했던 게 되지 않았기에 지금의 나가 되었다.

운이 좋았고, 고마운 일이다. 이럴 때 누군가 내 삶을 인도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6. 살아오면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분이 누구신가요. 변화나 전환을 가져온 계기가 있으셨나요.

나는 어떤 하나의 가치가 내 삶을 결정짓는걸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정의되지 않는, 변화하는 가치를 좋아한다.

영향을 받았던 스승도 어느 한분이 아니라 그 시기와 상황마다 달랐다.

농민으로는 김종북, 김복관 정철우, 박종채

교사로는 홍순명, 황선진, 전희식

사상가로는 조정환, 김종철

실천적 수행가로는 도법

서경석, 김진홍 목사님도 나의 청년시절 소중한 스승이시다.

그 분들이 보수 세력과 함께하면서 그래도 보수 세력이 조금 더 나아지는 걸 도울 거라고 생각한다.

직접 만나고 대화하고 같이 활동한 분들은 이런 스승들이지만,

책으로 읽고 공감하고 실천의 근거로 삼는 분들은 수운과 해월 (두분은 동학을 구성한 한사람의 삶으로 봐야한다.) 장일순, 비노바 바베, 이반 일리치. 대천덕, 헨리조지, 자멘호프 이런 분들이 있다.

나는 80년대 청년시기를 거친 전형적인 486이다.

그땐 누구나 광주항쟁에서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받았다.

5.18묘역을 갔는데, 한 비명에 “김재형” 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5.18 묘역에 갈때마다 그 묘 앞에 꽃을 놓고 오는데,

내게는 광주가 주는 의미가 컸고, 훨씬 더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대학 시절에 광주와 전라도 여행을 하면서 언젠가는 전라도에서 살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게 지금 현실이 되었다.

<삶과 활동>

7. 선생님께서는 언제 귀농하셨나요.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처음 내려오셨을 때 이야기를 해주세요.

92년에 경기도 화성 두레마을 공동체에서 생활한 게 첫 귀농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 준비를 하면서 1년 반을 생활한 공동체를 떠났고, 96년까지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했다. 서울 생활은 농촌으로 가기 위해 돈과 실력을 쌓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서 열심히 살았다. 기업에서 인사, 노무, 기획 등의 일을 해봐서 기업이 움직이는 핵심 원리를 어느 정도는 볼 수 있었다. 뒤돌아 보지 않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처음에는 충남 보령으로 귀농했는데, 행정권은 보령이지만, 생활권은 홍성 광천이었다.

오랫동안 준비했던 귀농이어서 참 행복했다. 지렁이 농장을 경영해서 수입을 얻었는데, 귀농한 다음해 97년에 외환 위기가 발생하면서 직장을 잃은 도시인들이 낚시터로 몰리면서 정말 없어서 못 파는 경험을 했다. 지렁이 농장은 지금은 지렁이가 가진 생태적 가치를 이해하는 사람이 많아졌지만, 당시는 생소한 농업 분야였다. 작은 규모이지만 농업 벤처라고 볼 수도 있는 일이었다.

지렁이똥(토분)을 이용한 농산물 생산을 중요한 목표로 했는데, 지렁이 수요가 지나치게 많아지면서 결국 낚시밥 장사꾼이 되었다. 귀농 초기에 일을 너무 많이 했고, 익숙하지 않은 경험이 많아서 지쳐 있었는데, 위기 순간에 우리를 구해 준게 ‘화재’와 ‘둘째 아이 본이의 탄생’이었다.

화재 사고로 그 동안 벌었던 돈은 다 잃었고, 본이가 태어나는 과정을 준비하면서 생활을 전환할 수 있었다.

저는 돈이 없어지면 진보했습니다.

그런 경험을 통해 돈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힘을 키울 수 있었다.

8. 김재형 님을 농부이자 도서관장이시고, 보따리학교, 생명평화 활동을 비롯해서 다중지성의 정원에서 활동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하시고 계신가요?

그리고 선생님은 스스로 어떠한 일을 하는 분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자기 정체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스스로에게 어떤 의미를 두시나요?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일들은 그런거죠.

밖으로 드러난 활동은 사실 생각보다 그렇게 시간을 많이 쓰는 일을 아닙니다.

단지 그 하나 하나를 깊이 생각하고 하는 정도입니다.

저는 고정된 이미지를 원하지 않아서 하나의 정체성으로 규정되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이미지가 만들어지면 쉽게 놓아버리곤 했는데, 크게 봐서 ‘농부와 교사’ 인 것 같습니다.

삶을 자급하고 스스로 디자인하고, 가르치고 배우는 걸 즐깁니다.

9. 곡성 지역사회에서 김재형 님은 스스로를 어떻게 자리매김하고 계신가요? 지역에 어떤 의미를 두고 계신가요? “우리는 장소다”라는 생태운동가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사는 자리, 공간과 자신을 떼어놓을 수 없다는 성찰입니다. 지역공동체는 자신의 삶과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자리매김 되어 있다고 보시나요? 지역에서 어떠한 지점에 가장 큰 관심을 두시나요?

지역의 의미나 소중함은 말할 필요가 없다.

나는 연애하는 아이들 보는 게 제일 행복한데, 어른들은 먼 거리에서 살아도 연애할 수 있지만, 아이들은 동네에서 만나는 아이들 끼리 연애한다.

서울에 아무리 멋있는 아이돌 스타가 있어도 옆집에 사는 철이와 영이가 서로에게 더 매력적이다.

곡성에 온 지 이제 10년이 되었다.

아직도 마을에서는 나를 객지 사람으로 생각하지만, 내가 가진 곡성에 대한 애정과 비교해 보면 평생 곡성에 살았던 사람보다 내가 지역에 대한 애정이 더 많다.

곡성에서 태어나 곡성에서 일하지만 광주에 사는 친구들이 이곳에는 많다.

그런 경우 그들은 지역에서 곡성 사람으로 누리는 권리는 다 누리지만, 실제 해야할 의무를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나는 권리없이 의무를 받아들인다.

손해보는 일 같지만, 조금도 손해 아니다. 나는 곡성에서 받은 게 정말 많다.

내가 곡성에서 하는 역할이 있다면 이런 마음 때문이다.

내가 가진 이 마음을 읽어 주신 분이 두 분이 있는데, 한분은 함석헌 선생의 제자이고 지역 농민 운동의 큰 어른이신 박종채 선생님, 또 한 분은 죽곡에 같이 사는 이균열님이다.

이균열은 내게 내 인생의 친구이다.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사회적 자산을 나를 위해 사용했다.

나에게 조금만 어려운 일이 생겨도 자기 일처럼 해결할려고 했다.

이웃과 스승, 좋은 친구들 모두에게 갚아야 할 게 많다.

내가 곡성에서 하는 사회적 역할은 그 빚을 갚는 과정의 하나일 뿐이다. .

교사이니까 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많다.

그런데, 어린이 청소년 활동을 할려고 해도 마을에 아이들 숫자가 너무 적어서 독자적인 청소년 활동을

하기가 정말 어렵다. 그래서 얻어낸 생각이 우리 마을 도서관에서 지역 주민 모두를 위한 프로그램

을 기획하되 청소년들이 준비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이끄는 방법이다.

쉽진 않지만 조금씩 가능성이 보인다.

청소년 활동의 어려움을 ‘평생 교육’ 이라는 관점으로 풀어 간다.

그런데, 청소년을 포함한 평생 교육 관점을 어쩔 수 없어서 택했는데, 의외로 이게 교육의 본질 중

하나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10. 여러 가지 농촌사회가 어려움을 격고 있고, 이 사회가 가지고 있는 위기상황을 어떻게 보고 계신가요?

크게 봐서 균형이 무너진 것 같다.

어느 사회나 선이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천국도 없고, 악이 압도적인 지옥도 없다.

대략 50 : 50 을 기준으로 업치락 뒤치락하면서 조금씩 나아지기도 하고 후퇴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게 지금은 선 : 악 이 48 : 52 수준을 유지하면서 선이 잘해봐야 50 정도이고 못할 때는 45 정도까지 밀리는 느낌이다.

이런 큰 흐름은 어떤 개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분위기여서 쉽지 않다.

농촌 마을에 아이들이 없어지면서 농촌은 일찌감치 균형이 무너졌다.

아이들은 미래를 담보하기에 아이들의 존재 자체가 선의 힘이다.

어린이를 통해 미래를 상상하지 않는 사회에서 선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지난 해 나온 ‘이끼,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 같은 영화는 농촌 현실에 대한 기본 이해를 가지고 만든 작품이다. 솔직히 조금 힘들다.

11. 이 사회에 어떠한 바람이 있으신가요? 사회 변화는 더디고 때로 거꾸로 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진보에 대한 믿음을 여전히 가지고 계신가요? 이 시절을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사회 전체를 바꿀 수 있는 힘과 권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그런 것으로 바꿀 수 있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크게 봐서 계속 진보해 왔는데, 그런 중에도 역행의 시기는 있다. 이런 시기에 할 일은 지나치게 기운을 소진하지 않는거다. 서울이나 도시에 있으면 눈 앞에서 방어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에 마음이 급하겠지만, 이런 반동의 계절에 할 일은 공부하고, 진지를 구축하는 일이다.

그람시의 ‘진지론’은 나 경우는 핵심 전략 중 하나이다.

다들 열심히 하지 않나. 예전엔 진지가 조직이나 거점을 뜻했지만, 우리 시대의 진지는 대부분 인터넷 속에 있다. 힘을 잘 모은 인터넷 활동들이 많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게 많이 보이는 데 절망할 정도는 아니다.

조금 우려된다면 ‘자기 성찰’의 힘에 대해서는 걱정된다.

12. 기후변화 시대, 지구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법, 어떠한 기대와 성찰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이건 짧게 쓸 수 있는 글이 아니어서 언제 한번 독립적인 글 청탁을 해 주시죠.

<미래와 꿈>

13. 생을 뒤돌아보는 일은 늘 수많은 굴곡과 감동, 크고 작은 일상을 마주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시면서 선생님 스스로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운이 좋았다.

그 나마 변화의 흐름을 읽는 힘을 가졌구나.

14. 지금을 살아가시면서 선생님께서 만들어 가는 미래는 어떤 것입니까. 개인과 활동에 있어서 어떠한 삶을 계획하고 계신지요.

죽곡농민열린도서관은 현재 인구 3천명 이하의 농촌 면에 있는 작은 도서관 중에서는 거의 최고 수준이라고 봐야 합니다. ‘죽곡 농민 열린 도서관’ 이 이름 하나 하나는 그 속에 다 가치를 담고 있습니다.

죽곡이라는 지역 가치, 농민이라는 삶의 주체성, 열린이라는 열린 마음의 자신감과 신뢰, 도서관이라는 교육과 문화 공간

오랫 동안 생각한 것의 현실화입니다.

이걸 잘 해야죠. 수준을 높이고, 대중성도 늘이고, 쉽지는 않아요. 조건 자체가 워낙 불리하거든요.

보따리학교는 놀이이고, 공부이고, 어린이들과의 소통이고, 수행의 일부입니다.

존경하는 스승 ‘수운과 해월’ 두 분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표시이구요.

이건 죽는 날까지 하고 싶습니다.

다중 지성의 정원은 칼날이죠.

제가 가진 실력의 상당 부분은 인문학 공동체 다중 지성의 정원에서 왔습니다.

조정환 선생님과 같은 훌륭한 분과 같이 공부한다는 건 이 시대를 사는 축복이죠.

19세기 중반에 영국에 살면서 막스와 같이 공부하는 정도라고 해야죠.

곡성에서 매 계절마다 조정환 선생님과 다지원 공동체 가족들이 같이 모여 같이 이야기 나누고 삶을 즐기는데, 최고 수준의 지식 향연이죠.

여기에 참여하는 분들이 조금 더 늘면 좋겠어요.

삶 디자이너 박활민님(촛불소녀 캐릭터 디자이너)과 함께 ‘삶 디자인 공동체’ 활동을 준비하고 있어요.

곡성 다지원과 동일한 방식인데, ‘삶 디자인 공동체’는 예술 활동을 중심에 둡니다.

아내는 판소리등 전통음악, 나무 조각, 요리(요즘 요리는 예술적 의미가 있는 경우가 많아요) 이런 분야에 실력이 있어요.

삶 디자인 활동은 아내와 활민이 함께 만들 겁니다.

다지원은 3,6,9,12월, 삶 디자인 활동은 1,4,7,10월 이렇게 만날 생각입니다.

광주.

서울에서는 가끔씩 나를 불러 이야기를 들을려는 사람도 있고, 서울에서 우리 집을 오는 경우도 많은데

광주에서 오는 사람은 없어요.

인연이 생겼다가도 잘 이어지질 않아요.

2,5,8,11월은 광주를 위해 비워 둘려구요.

우리 집에서 한달에 한번 2박 3일의 축제를 일년 내내 열고 싶어요.

조금 더 바라는 게 있다면 그 일이 우리 가족의 생활에 조금 도움이 되면 좋겠어요.

이제 더는 돈을 벌기 위해 읍내나 도시에 나가기는 싫거든요.

서울에서 2년 여간 장사를 하면서 정말 고생 많이하고, 망했어요. 좋은 공부였죠.

우리 아이들은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고 가능한 관여를 안할려구요.

어떤 삶을 살든, 무슨 생각을 하든 존중할려구요.

아내와 내가 사는 삶이 매력적이면 당연히 관심을 가질거구, 아니라고 생각하면 스스로 길을 찾겠죠.

점점 갈수록 먹는 문제는 관심이 없어져요.

아내의 요리는 이제 정말 간을 맞추는 정도에서 그쳐요.

마을 어른들이 시장에서 조금 사 먹지 이것 저것 농사를 많이 짓지 않을려는 이유를 알겠어요.

농사 일은 지금도 많지 않지만, 점점 더 줄일 생각입니다.

농민 운동의 궁극적 지점 중 하나는 농민들이 생산을 줄이는 겁니다.

지금처럼 농업 생산이 많은 것은 농민에게나 도시 소비자에게나 서로에게 불리해요.

농민은 제 가격을 못받고, 도시 소비자는 질 낮은 음식을 먹어야 하고...

생활이 단순화되면 사는 게 놀이와 수행이 될 겁니다.

수운과 해월 두 분 선생님의 수행법을 앞으로는 깊이 따라 가 보고 싶어요.

자멘호프가 꿈 꾼 ‘하나의 민족 두 개의 언어 사회’도 해 보고 싶어요.

에스페란토 라는 공통어 운동은 정말 매력적인데, 앞으로 여건이 되면 이런 글을 에스페란토로 써 보고 싶어요. 죽기 전까지 20편 정도의 에스페란토 수필을 써 보고 싶어요.

기회가 많았는데 제대로 익히지 못해서 에스페란토 활동가들에게는 정말 미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