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으로 읽는 동학 강의 : 논리와 열망을 같이 읽어야...

 

 

저는 곡성다지원 강좌를 가능한 한번은 서구 지식의 관점, 한번은 동양적 사유 이렇게 번갈아 가면서 하고 있습니다.

이번엔 동양적 사유에서 찾았고, 제가 오랫동안 공부해 오고 있는 동학을 같이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서울에서 해월 최시형 선생님의 진리이야기 강좌는 몇 번 했는데, 동경대전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인류는 중요한 역사의 고비마다 혁명을 일으켰고, 그 혁명의 뒤에는 반드시 혁명에 관여한 책이 있습니다.

혁명을 불러 일으킨 책들은 당시의 시대를 기준으로 할 때 논리와 함께 민중의 열망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책들은 책의 논리 뿐만 아니라 시대의 느낌을 같이 읽어야 합니다.

 

동경 대전은 마음 잡고 읽으면 1시간 정도면 다 읽을 수 있는 짧은 내용입니다.

수운 최제우 선생님께서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고 서문에 해당하는 ‘포덕문’, 동학이라고 이름지었을 때 중요한 비교 대상이 되었던 서학(기독교)과의 차이에 대한 제자들과 질의 응답을 담은 ‘논학문’, 동학 세력의 확대와 함께 점점 더 국가와 성리학 세력의 압박이 심해지는 과정에서 성리학 세력의 공격을 방어하면서도 새롭지만 근원적인 유교 가치의 회복임을 논증하는 ‘수덕문’, 동학의 철학적 사유 방법을 산문시로 노래한 ‘불연기연’ 이 네 편이 동경대전의 중심 내용입니다.

내용 자체가 어렵진 않은데, 이 글을 쓴 상황과 함께 읽지 않으면 잘 이해가 안되고, 무엇보다 고어체 변역이 이해를 가로막습니다.

함께 읽으면서 이 두가지를 하나씩 풀어 나갔습니다.

 

그리고, 금요일 저녁에는 고려대 철학 교수이고, 우리 사회 최고 수준의 동학 해석가이신 김용희 선생님의 특강이 있었습니다.

김용희 선생님과 함께 한 시간은 참가한 여러 분들에게 강인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삶과 죽음에 대한 고민의 해결, 새로운 인식 방법에 대한 이해, 수련법 등 다양하게 평가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모든 강의가 마친 뒤에 참가자 모두 시를 한편씩 썼습니다.

시의 중요 부분을 읽으면서 공부의 의미를 다시 새깁니다.

 

 

인문으로 읽는 동학

 

김재형

 

동경대전 읽기가 만만하지 않다.

드러난 것인데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어려운 내용은 아닌데 왜 이렇게 안될까?

마음을 연결해야 겠구나.

 

19세기 말 동경대전을 만들던 사람들.

책을 가지고 있는 것 만으로도

삶과 죽음의 경계를 생각해야 했던 사람들.

그들에게 동경대전은 어떤 의미였을까?

해방의 복음임과 동시에

자기를 깨워나가는 ‘인문의 도구’였겠구나.

 

동경대전, 용담유사를 읽기 위해

한글을 깨우치고

짧은 글을 여러번 반복해 읽으면서

논리적 생각이 시작되고

그리고, 삶의 혁신이 시작되었겠구나.

 

혁명은 단초, 작은 계기로 시작하는 것.

동학은 인문의 각성을 일으키고

작은 불씨는 마른 들판의 들불이 되는구나.

마른 들판에 번져가는 불길의 마음

그 마음에 연결되니.

동경대전이 읽히는 구나.

살아서 꿈틀거리고

우리의 언어로 새로 살아나는구나.

 

 

세상 가장 낮은 곳.

 

김현지

 

이름없는 돌도, 풀도, 나무도

그 나름 생의 의미를 지녔으리라.

못난 이도 잘난 이도 착한 이도 나쁜 이도

그 나름 삶의 가치를 지녔으리라.

세상 무엇 하나 부족한 것도, 잘난 것도 없으니.

가장 낮은 곳에서 참 삶을 살아가리라.

비움과 모심의 삶으로

한울의 가장 가까운 곳으로 다가가리라.

 

 

죽곡에서 (期然 혹은 不然)

 

박기범

 

외로우면 길을 떠나는 버릇이 있었다.

문득 떠난 길. 죽곡에서

해월의 그림자를 밟았다.

길 떠나면 외로움이 동지가 되어

더 강해지는 것 같다.

 

 

위 세편의 시 ‘인문으로 읽는 동학, 세상 가장 낮은 곳으로, 죽곡에서’는 동학을 공부했던 사람들의 마음 속으로 직접 들어가고자 하는 내용이 중심입니다.

지금 이 자리보다는 그 때 그 자리의 마음을 지금 이 자리에서 바라보고 싶어 합니다.

 

 

죽음에 대한 의문

 

아로미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

죽음이 무엇이지?

열 한 살 소녀는 끔찍하고 무서워

멈추지 않는 생각을 거두려 했네.

 

여러날을 무수하게 들려오는 소리.

죽음이 무엇이지?

교회에 갔더니 구원을 받으면 천국이 열리네.

내 의문은 깊어가네.

불교의 윤회설을 만나 위안이 되었고,

발도르프는 의식의 단계가 차곡하게 쌓여가는 생을 말해주네.

 

마흔 둘에 동학은

우주의 영이 내 육을 빌려 이생을 살고

육신이 다하면

나의 영은 대우주의 기운으로 귀환한다는 내세관은

거인의 어깨가 되어주네.

내가 우주의 일부가 된다는 죽음은

편안하게 죽음을 받아들이게 하네.

 

 

 

또 다른 깨달음을

 

어린 왕자 정재영

 

동학에 대해 처음으로 책을 읽었습니다.

동경대전을 읽었습니다.

깨달음은 알듯 말듯 합니다.

종교로서 이해하려 해도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선악에 대한 개념이 오히려 더 모호해 집니다.

깨달음이 민중성에 바탕을 두었다는 느낌이 어렴풋이 옵니다.

주문 21자를 외웠습니다.

정신 수양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아직 전부를 읽지 않아서 그럴 겁니다.

아마도 몇 번 읽는다면 조금이나마 이해가 될까요?

주문을 외워보며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립니다.

 

 

모든 진리가 그렇듯, 동학도 중요한 질문에 대한 나름의 길을 가지고 있습니다.

삶과 죽음의 문제는 오래된 주제입니다. 아로미님은 11살 때부터 이 질문이 시작되었고,

 종교로 귀의할 수 밖에 없는 삶이었을 겁니다.

기독교와 불교, 슈타이너의 신지학 등을 공부합니다.

동학의 죽음관인 ‘기운의 환원’에 위안을 얻습니다.

어린 왕자님은 동학을 역사가 아닌 직접적인 책으로는 처음입니다.

쉽지 않았을 겁니다.

종교도 아니고, 선악을 구분하지도 않고, 주문이라는 새로운 수행 방법을 제안하고, 익숙하지 않은 난해함이 있습니다.

 

 

내 안의 동학

 

잎싹

 

그냥

즐거웠습니다.

마음 길을 거스르지 않음이

 

몸 추스르고

마음 다잡으며

먼 길에 두려워 하지 않으니

아름다운 이들 연이되어

돌아 돌아

가닥 가닥 추려보니

 

향기로운 그네들 노래와 몸짓은

먼 옛님을 닮아 있네요.

 

잠시

몸짓 익혀 가락 읊조리니

평안이 내 안에 조용히 들어 앉네요.

 

 

시천주(侍天主)

 

감자

 

내 안에 천주님.

너 안에 천주님.

그 모습이 달라도

구별은 하지 않아.

경계를 넘어서는

너와 나

그리고,

우리

 

 

나무가 숲에 안겨

 

자연

 

토란대를 지나며

와룡집을 향할 제

가을 햇살 김용휘

선생님을 만났네.

 

막걸리 거르고

기연인듯 불연인가

나무가 숲에 안겨

빛살이 더해지매

내 삶의 다시 개벽

 

나무 그네 아래서

주문을 외자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만 만사지

 

 

‘내 안의 동학, 시천주, 나무가 숲에 안겨’ 이 세편의 시는 한울님을 마음에 모시는 시천주의 상태를 그대로 드러내 줍니다.

한울님 모심으로 내 안으로 들어오는 ‘평안함, 경계를 넘어섬, 다시 개벽’ 이런 감성을 느낄수 있습니다.

 

 

동경대전 네 편의 글은 수운 최제우 선생님께서 사회적 이단으로 몰리면서 위기를 돌파하기위한 논리적 입장을 쓴 글입니다.

그는 최선을 다해 그가 살았던 시대에 저항하였고, 새로운 길을 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오래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자기 삶의 과제가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삶의 최종적 과제가 ‘미완성’ 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수운과 해월은 두 사람이라기 보다는 한 사람의 양면, 혹은 한 사람의 전반기와 후반기 이렇게 보입니다.

수운 선생님은 사형 당하기 전날 마지막 글을 써서 해월 선생님에게 보냅니다.

 

燈明水上 無嫌隙 등명수상 무혐극

柱似枯形 力有餘 주사고형 역유여

 

등불이 물위에 빛나고 있으니 온 세상을 밝힐 것이요.

기둥이 제법 말랐으니 떠받치는 힘 넉넉하다.

 

‘등불이 물 위에 빛나고 있으니’ 이 말은 주역의 마지막 부분인 화수미제(火水未濟)를 말합니다.

미제라는 말은 완성하지 못함을 말합니다.

우리는 완성되는 것을 끝으로 생각하지만 주역은 완성하지 못함으로 새로운 시작이 있음을 말하는 미제로 끝을 맺습니다.

하나의 삶이 끝나고 새로운 삶으로 이어집니다.

해월의 새로운 삶이 이어지는 길에 수운은 죽어 든든한 기둥이 되어 받쳐주겠다는 의지를 드러냅니다.

동경대전의 드러난 모습은 논리적 논증이지만 드러나지 않은 모습은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하는 다시 개벽의 열망입니다. (不然期然)

이 두가지를 같이 읽으면 동학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