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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문 11/22 발제문 모음

2016.11.22 19:32

보미 조회 수:73

다지원 세미나 : 2016년 11월 22일 /발제자: 김선미

텍스트: 스피노자, 황태연 옮김, 『신학정치론』, 비홍출판사, 2014,

 

제12장 신성 법칙의 진정한 원본에 대하여, 어떤 점에서 성서를 성스럽다고 부르며 신의 말씀이라고 부르는지. 성경은, 신의 말씀을 포함하고 있는 한에 있어서, 더럽혀지지 않은 채로 우리에게 전해졌다는 것이 밝혀진다.

 

하나의 사물은 그것의 목적이 경건과 종교를 촉진하는 것일 때 성스럽고 신성하다고 일컬어지며, 또한 그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종교적인[경건한] 방식으로 사용하는 동안에만 성스럽다.

예) 같은 어떤 한 장소 벧엘(신의 집), 같은 단어(책) 등

따라서 오직 정신에 관련해서만 그런 것이라는 결론이 내려진다.

 

성서도 마찬가지로, 오직 그것이 사람들을 감화시켜 신을 향한 신앙심에 이르게 하는 동안에만, 성스러우며, 또한 그것의 단어들[말씀들]이 신성하다.

예) 모세가 최초의 석판들을 깨부쉈을 때도, 또 두 번째 석판들도 파괴를 피할 수 없었던 때에도, 즉 모든 것들 중에 가장 성스러운 것, 신의 서약의 진정한 원본조차도 완전히 사라져 버릴 수 있었음을 생각하면, 모세의 저술의 원본 역시 더 이상 현존하지 않는 것은 놀랄 일도 아니다.

 

다바르 여호와(주의 말씀)라는 어구는, 말, 이야기, 명령, 그리고 것[사물]을 의미한다. 신의 말씀은, 신 자신 외에 다른 어떤 것과 관련하여 사용되었을 때, 신성한 법칙을 의미한다. 즉 전체 인류에게 일반적인 종교, 또는 보편적인 종교, 이에 대해 그는 참된 삶의 길이 자선과 진실한 마음에 있다고 가르치면서, 그것을 신의 법 및 신의 말씀으로 구별 없이 부른다.

 

성서가 신의 말씀으로 일컬어지는 세 가지 이유 :

첫째, 그것은 진정한 종교를 가르치는데, 신이 이것의 영원한 창시자이기 때문이다.

둘째, 이것이 미래에 관한 예언들을 신의 명령들로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셋째, 성서의 진짜 저자들은 대부분 자연적 빛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에게 특유한 빛에 의해 가르쳤으며, 그들은 신을 이러한 발언들을 창조하는 존재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신이 어떤 의미에 있어서 성서의 저자로 이해되어야 하는지, 그것은 그 속에서 가르친 진정한 종교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왜 성서를 구약과 신약으로 나누는지도 또한 설명한다. (황태연본, 220쪽) 그리스도의 내림 이전 예언자들은 모세 시대에 만들어진 서약의 효력에 의하여 종교를 자신들 나라의 법으로서 선포하는 것에 반해 그리스도 이후의 사도들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수난의 효력에 의하여 종교를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법으로서 전도했다. 신약의 책들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다”

 

비록 구약에 관한 책들을 적게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신의 말씀(진정한 종교)을 빼앗기지는 않을 것이다. 이 율법서는 약속의 원본, 그리고 전쟁에 관한 책들, 연대기에 관한 책들, 그리고 수많은 다른 책들처럼 신전 안에서 열성적으로 수호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견해를 확증하는 많은 다른 논거들이 있다.

 

우리는 성서가 ‘신의 말씀’이라고 합당하게 일컬어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종교에 관해서만 즉, 보편적인 신성 법칙에 관해서만 그렇다는 것을 밝혔다. 이제 우리에게는 성경이, 그것이 합당하게 그처럼 일컬어지는 한에 있어서, 결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더럽혀 있지도 않으며, 훼손되어 있지도 않다는 것을 밝힌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의 취지가 더럽혀지지 않은 채로 우리에게 도달했다는 것이다. 설령 그것을 표현하면서 사용했던 말들이 변화(섞음질 등)를 겪어왔다고 할지라도....성서의 신성함을 전혀 감소시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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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지원 스피노자 세미나 ∥ 2016년 11월 18일 ∥ 발제자: 파일로

텍스트: 스피노자, 『신학정치론, 정치학논고』, 비르투, 13장 255-263쪽.

 

2장 예언자(지력이 아닌 상상력..신으로부터 계시를 받음)

5장 성서의 메시지(일반 사람들의 이해 수준에 맞게..믿음을 불러일으키며..경험에 호소하며..대중 정서에 가장 호소력 있는 문체와 표현양식..)

7장 언어(성서를 이해하는 데 있어 진정한 어려움)(255쪽)

 

게다가 예언자는 식자층이 아니라 거의 예외 없이 유대인 전체를 대상으로 설교했으며, 사도는 공공집회가 열리는 교회에서 복음을 설파했음을 추가적으로 지적할 수 있다...성서의 교리는 고매한 사변이나 철학적 논증이 아니라 그다지 높지 않은 지적 능력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 만한 대단히 단순한 문제를 담고 있다는 결론..(255-256쪽)

 

성서에는 철학적 영역에 속하는 교리가 대단히 적으며, 설령 있다고 해도 매우 단순한 내용이다. 왜냐하면 성서의 목적이 과학적 지식을 전하는 데 있지 않고, 인간에게 오직 복종만을 요구하며, 무지가 아니라 완고함이나 고집스러움을 나무라는 데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256-257쪽) 더구나, 신에 대한 복종은 오직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놓여 있기 때문에 성서는 거기에 언급된 방식에 따라 모든 사람이 신에게 복종할 수 있도록 하는 데 필요한 내용만을 담고 있다. 복종이나 복종을 위한 훈육과 직접 관련 없거나 자연현상과 관련된 지식 및 자연과 연관된 여타의 사변적 물음은 성서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같은 이유에서 우리는 자연지식을 종교로부터 완전히 분리해야 한다.(257쪽)

 

신에 대한 지적이며 대단히 정교한 지식은 복종과 같이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재능이 아니며, 다음으로 예언자를 매개로 하여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신에 대해 알도록 요구되는 지식이란 정의와 자비에 관한 지식이라는 점이다.(257쪽) 일반 사람이 신의 속성에 관한 지식을 반드시 소유할 필요는 없으며, 이러한 지식은 오직 독실한 신도 가운데에서도 극히 소수의 사람에게만 주어졌다.(259쪽) 성서는 신에 대한 어떤 정의도 명시적으로 제시하지 않으며, 앞에서 말한 내용을 제외하고는 다른 어떤 속성도 반드시 터득해야 하는 것으로 제시하지 않고, 의미가 제한된 특정한 용어로 그 밖에 속성을 찬양하지 않는다.(261-262쪽) 따라서 신에 관한 순수지식의 문제에 관해 잘 몰랐다 해도 죄를 짓는 것은 아니라고 결론 내릴 수 있다. 성서의 목적은 대중으로 하여금 학식을 갖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복종하도록 만드는 것.(262쪽) 따라서 우리는 행위를 고려하지 않고 단지 어떤 견해에 대해 경건하다거나 불경하다고 할 수 없다. 누군가 진실한 믿음을 통해서 반항적으로 된다면, 그는 신앙적으로 불경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반대로 잘못된 것을 믿음에도 순종한다면 그의 신앙은 경건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2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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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지원 기획세미나 : 스피노자의 철학 세미나 | 2016년 11월 22일 발제자: 손보미
텍스트: B. 스피노자 [신학정치론]  최형익 옮김, 비르투,  264~275

 

제14장 신앙과 신도 그리고 철학과 분리된 신앙의 근본 원리에 대한 정의

 

1. 요약

 

1.1. 신앙의 근본 원리를 정의해야 하는 이유

성서의 말을 자신의 신념에 꿰어 맞추는 것이 그로 하여금 정의와 자비에 관련된 문제에서 진정 신에게 복종할 수 있게 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자유이다. 하지만, 그러한 자유를 다른 사람에게는 인정하지 않으려 하면서, 유덕한 사람을 자신과 견해가 다르다고 해서 박해하는 자를 책망할 뿐이다.

개인의 자유는 일정 정도까지 확장되어야 하며, 견해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이 충실한 신도로 간주되어야만 하는가를 결정하기 위해선 우리는 신앙의 본질에 대해 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 (265)

 

1.2. 성서 전체의 의도와 목표 그리고 그 근본원리

 성서의 목적은 오로지 사람들에게 자발적 복종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다. … 복음이 전하는 교리는 단순한 신앙에 속한다. 단순한 신앙이란 신에 대한 믿음과 신에 대한 존경으로 그것은 곧 신에 대한 복종과도 같다. … 성서는 모든 사람이 신을 섬기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사항에 대해 아주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즉, 성서에서 말하는 의무는 ‘너희 이웃을 사랑하라’는 한마디에 잘 요약되어 있다.

 이러한 가르침이야 말로 기독교 신앙 전체의 유일 기준이며, 오직 그것에 의해서만 신봉할 필요가 있는 다른 여타의 교리가 결정되어야 한다. (266)

 

신앙의 근본원리 중 전체 성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이 하나의 가르침이다.

 

1.3. 신앙이란 무엇인가 (신앙의 정의)

 신앙이란 신에 관한 지식이다. 따라서 신에 관한 지식 없이 신에 대한 복종은 불가능하며, 이는 또한 오로지 신에게만 복종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267)

 

1.4. 이와 같은 신앙의 정의에 따른 결론

1)신앙은 신앙 그 자체가 아니라 오직 순종을 통해서만 구원을 가져온다. (267)

2)진정으로 순종하는 자는 필연적으로 참되고 구원을 주는 신앙을 갖는다.

<요한 1서> 4장 7절과 8절을 통해, 우리는 오직 행위에 의해서만 누군가가 독실한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게 된다. <요한 1서> 4장 13절을 통해, 요한은 신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는 우리가 사랑을 베푸는 일에 참여함으로써 오로지 사랑만으로 신의 속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268)

3)신앙은 마음을 감동시켜 사람들을 복종하게 만드는 경건한 교리 이상으로 참된 교리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269)

 

1.5. 보편종교는 어떠해야 하는가

 신앙의 정의에 따라, 기독교와 같은 보편 종교는 선량한 사람들 사이에 분란을 야기할 소지가 있는 어떤 교리도 담지 말아야 한다. (270)

 

1.6. 보편신앙의 근본적 교리

 보편신앙의 근본적 교리는 다음과 같은 단 하나의 교리로 수렴되는 경향을 지닌다.

 정의와 자비를 사랑하며, 구원받기 위해서는 모두가 그에게 복종해야 하는 최고의 존재자로서 신이 존재한다는 것, 신에 대한 경배는 이웃에 대한 정의와 자비의 신천에 놓여 있다는 것이 바로 그 교리이다.(271)

 

1.7. 참된 신앙과 관계없는 문제들

1)신은 실제로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불? 성령? 빛?...)

2)신이 참된 삶의 모범인 이유가 무엇인가 (기질? 존재인?)

3)신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실제로? 잠재적으로?)

4)신은 어떻게 만물을 관장하는가 (명령으로? 필연성으로?)

…. (272,273)

성서를 통해, 신은 사람들에게 신의 본질에 속하는 절대적 속성을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 즉, 이성적 논증이 아니라 신앙을 통해 오로지 자신에게 복종시키고자 했다. (274)

 

1.8. 신학과 철학 사이의 차이

 신학과 철학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나 친화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철학의 목적은 진리인데 반해 신앙의 목적은 오직 복종과 경건이다. 즉, 철학은 자연이나 자연의 본성에서 구해져야만 하는 일정한 공리에 기반해야 하면, 이와 달리 신앙은 역사와 언어에 기반하고 오직 성서와 계시로부터 도출해야 한다. (274)

 

 

2. 질문 & 토론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는 ‘보편 신앙’과 ‘보편 교리’의 의미에 대해 함께 토론해 보았으면 합니다.

 

‘보편’ 적인 신앙과 교리에 대해 스피노자가 서술하는 대목들을 읽으면서, 민주주의체제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 중에 하나라고 여겨지는 ‘표현의 자유’에 관한 문제들이 많이 떠올랐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헌법상의 권리이기도 한 이 ‘표현의 자유’는 점점 더 글로벌화, 네트워크화 되고 있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여러 가지 쟁점들을 발생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현재 우리 사회에서 그러한 쟁점들을 바라보는 사회적 틀은 ‘ 과연 자유로운 표현의 범위를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 라고 하는, 단순히 드러난 표현의 수위를 가리는 것에만, 그리고 단순한 외형적 기준을 만들어 그것을 적용하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우스꽝스러운 방송 심의 규정들…) 물론, 그러한 논의와 그것을 통해 어떤 기준을 만드는 것이 완전히 무의미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에 대한 좀 더 본질 적인 논의 없이 외형적 기준을 만드는 것에만 집착한다면 현재의 쟁점들을 재대로 바라 볼 수 없음은 물론이며, 급기야는(스피노자도 우려했듯이) 이해할 수 없는 공포와 희망 속에서 그 우스꽝스러운 규정들이 억압의 도구로 까지 사용되는 상황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표현의 자유’라는 권리와 그 진정한 가치를 지켜가기 위해서는 보다 본질적인 논의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스피노자가 이야기 하는 ‘보편’적인 신앙과 교리의 의미는 그가 이야기하는 ‘자유’의 의미와 함께 이 소중한 권리에 대한 논의의 또 다른 틀을 제공해 줄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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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은 이성에 대해, 이성은 신학에 대해, 보조적이지 아니하다는 것이 증명된다. 우리가 성서의 권위에 대해 확신하는 이유

 

‘성서와 이성 중 하나만 선택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스피노자: “모든 재능들 중에 가장 위대한 것이고 신성한 빛인 이성을, 죽어있고 인간의 악의에 의해 타락되어 있을 수도 있는 글자들에 종속시킬 마음이 사람들에게서 생길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나는 완전히 놀랐다.”

 

마이모니데스:

‘성서는 이성과 일치하도록 구성되어야만 한다’ (스피노자는 7장에서 이를 반박한다)

< - >

예후다 알카파:

이성이 성서에 대해 보조적이어야 하며 철저하게 종속적이어야 한다’

‘성서구절이 이성에 대해 모순되어 보여도 “은유적 설명”에 근거한 해석이 필요 없다.’

‘특정 구절이 다른 구절에 대해 모순되어 보일 때만 은유적 설명을 필요로 한다.’

사무엘상 15:29: ‘신은 후회하지 않는다’       예레미야18:8 ‘신은 후회한다’

(스피노자: 위에 대해 어떻게 은유적 설명이 가능한가?)

 

스피노자:

‘알파카와 마이모니데스의 견해는 버려야 할 것’

이성은 실제로 정신의 빛이고, 이것이 없으면 정신은 몽상만 본다’

‘신학이란 계시, 즉 순종을 달성하는 길, 또는 진정한 경건과 신앙에 속하는 교리들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신학이란 올바르게 이름지어진 신의 말씀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고정된 수의 책들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이해된 신학은 교훈들과 도덕적 가르침을 고려한다면, 이성과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비록 모든 신학 이론을 수학적으로 정확하게 증명할 수는 없을지라도, 그것을 받아들 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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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 22일 <신학정치론> 16장 발제자: 한성주

 

 

요약

 

290pg.

 

 16장 이전까지는 신학과 철학 영역의 분리 및 사상의 자유가 사실은 철학과 신학 모두를 보장한다는 사실을 다루었습니다. 16장부터는 이러한 사상의 자유와 토론의 자유가 이상적인 국가체제 아래에서 어느 정도까지 확대될 수 있는지를 결정해야 할 시점입니다. 이 주제를 보다 잘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국가의 기초에 대해 고찰할 필요가 있는데, 이를 위해 스피노자는 개인의 자연권에 대해 검토한 후 전체적으로 국가와 종교에 대해 논의합니다.

 

 스피노자는 자연의 권리와 명령을 일종의 자연법으로 이해합니다. 자연법, 자연의 힘이란 물고기가 물 속에서 살도록 되어 있는 것,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을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이 각각의 사물이 자기를 제외한 다른 무엇도 고려하지 않으면서 자기만을 보존하기 위해 전력하는 권리를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회에 존재하는 바보, 광인, 비정상적인 인간 같이 일반적으로 우리 눈에 비합리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이는 이들조차도, 자연에 의해 조건 지워진 방식으로 행위하는 것입니다. 각각의 인간, 사물은 모두 자기 욕구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삶을 완전히 영위할 최고의 권리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연권은 건전한 이성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욕구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물론 자연의 지배 아래서 어리석은 것이든, 게으른 것이든 그 나름대로 자신에게 유용하다고 생각되는 것이면 각각의 존재는 무엇이든 추구할 수 있는 최고의 권리를 지닌 것은 맞지만, 다만, 이성의 법칙과 확실한 명령에 의거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보다 이롭기 때문에 우리는 이성의 법칙에 따라 살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사는 것이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에 진정으로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 각각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적의와 증오가 아닌 안전과 평화의 상태에서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293pg)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상태에 살기 위해 저마다 다른 욕구의 충동을 제어할 수 있는 전체적인 힘과 의지가 필요하고, 그래서 다음과 같은 원칙을 세워 나가야 합니다.

 

 그 원칙이란, 우리는 오직 이성에 의해서만 지도받아야 하며, 동료에게 해가 되는 욕구를 억제하고, 자신에게 행해지기 바라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행하며, 자기의 권리와 마찬가지로 이웃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 협약이 효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사회계약이 필요합니다.

 

 이에 대해 스피노자는 우리의 본성에 관해 잠시 언급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에게 더 큰 선, 더 큰 해를 기준으로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계약을 통해 국가를 위한 최선의 행위를 하도록 약속해야 하고, 그 약속을 어길 경우 더 큰 해를 초래하는 방식으로 계약이 체결되어야 합니다.

 물론 모든 인간이 이성에 의해 이끌리도록 설득될 수는 없고, 개인의 자연권은 자신이 보유한 힘 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강제적이든 자발적이든 개인은 자신의 힘을 타인에게 양도하는 만큼, 자신의 권리 역시 그 정도로 양도해야 합니다.(297pg)

 만인에 대한 최고의 권리인 주권은 최상의 권력을 보유한 사람에게 속하며 그는 주권에 의거해 폭력이나 처벌의 위협 등으로 사람들을 제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자연권에 대한 침해 없이도 한 사회는 형성될 수 있으며, 맹약은 엄격히 지켜질 수 있습니다. 또한 각 개인이 그의 힘 전체를 특정 정치체제인 국가에 양도한다면 국가는 이로부터 사물에 대한 최고의 자연권인 주권을 보유하게 될 것입니다. 국가는 이제 유일하고 의문의 여지가 없는 지배권을 지니며, 극형에 처해질 수도 있다는 공포 때문에 사람들은 국가에 복종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종류의 국가를 민주주의라고 합니다.

 

 민주주의는 정의에서 모든 사람이 전체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때 최고권인 주권은 어떤 법에도 구속받지 않으며, 반대로 만인은 모든 면에서 그것에 복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각 개인이 자기보존의 힘 혹은 다른 말로 자신의 모든 권리를 묵시적이건, 명시적이건 특정 정치체제에 양도했을 때를 의미하는 사물의 상태입니다. 국가의 분열과 그에 따른 국가의 파괴 없이는 자신의 권리를 보존할 수 있는 대비책을 마련할 수 없기 때문에 최고권력, 즉 주권의 의지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만 했습니다.

 

 이 때 최고권력의 소유자인 주권자가 전혀 사리에 맞지 않는 명령을 내릴까봐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의 의지를 강제할 수 있는 한에서만 자신의 의지를 부과할 수 있기 때문에, 그 범위를 넘어서버린다면 무언가를 명령할 권리 역시 사라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민주주의에서 비합리적 명령에 대해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이유가, 인민의 다수는 그 규모가 커질수록 부당한 명령에 동의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의 근본 목표와 토대는 비합리적 욕망을 피하고 사람들을 가능한 한 이성의 통제 아래 둠으로써 평화롭고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게 하려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기본 원칙이 사라지면 민주주의의 구조 전체가 붕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최고 권력인 주권의 관심사이며, 신민은 주권의 명령을 수행하고 설정한 권리를 인정하는 의무를 갖습니다.

 명령에 복종하는 행위란 어떤 의미에서는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을 노예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노예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전적으로 행위의 목적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국가의 선을 위한 것이냐, 아니면 자신의 선을 위해 최고 권력에 복종하느냐에 따라 노예와 신민이 구분됩니다. 따라서 법이 건전한 이성에 기반해 있는 국가야말로 가장 자유롭기 때문에 거기에 속한 모든 구성원은 자신이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면 얼마든지 자유로울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시민의 권리가 무엇인지, 과실죄 및 정의와 불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국가와의 관계의 관점에서 규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아가 무엇이 동맹과 적, 그리고 반역죄를 구성하는 지에 대해서도 결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301pg)

 

 시민의 권리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기 위한 자유를 의미합니다. 이 때 자유의 한계는 최고 권력인 주권의 명령에 의해 결정되며 그것의 권위에 의해서만 유지됩니다.

 

...

305pg.

본질적으로나 시간적 선후관계에서나 자연상태가 종교에 앞섭니다. 그러므로 신의 계시 이전에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신법에 구속될 필요가 없습니다. 이는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지니게 되는 자유와 관련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피노자는 최고권력인 주권 역시 신민과 마찬가지로 신법에 의해 구속된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주권이 자체의 자연권을 보유하며, 행동에 그 어떤 제약도 받지 않는다고 주장해왔습니다. 이는 자연상태에서 모든 사람이 건전한 이성의 명령에 따라 살아갈 의무를 지니는 것과 동일한 정도로 신법에 따라 살아갈 의무를 지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주권자의 명령이 신과 약속한 복종 서약에 반했을 경우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해, 무엇보다 신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경우 각자의 판단대로 행동하며 자기 멋대로 하려고 들 것이기 때문에 국가의 권리가 완전히 파괴될 수 있다고 우려합니다. 스피노자는 여기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 국가의 법을 수호하고 보존하기 위해 신적, 그리고 자연적 권리 양자에 유일하게 구속되어 있는 최고 권력인 주권은 종교와 관련하여 자신이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법률을 제정하는 문제에서 최고의 권위를 지닙니다. 또한 모든 사람은 신이 그것을 어기지 말라고 명했던 맹약에 의거해서 종교와 관련한 법률 제정에서도 국가의 법령과 명령에 반드시 복종해야 합니다.'

 

 

# 297pg에서 자연권에 대한 침해가 없다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느 정도로든 자신의 힘을 타인에게 양도한다는 것이 곧 자연권의 침해가 아닌가요? 우리가 타고난 대로 사는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 주권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모순적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얘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 301쪽에서 '자유의 한계는 최고 권력인 주권의 명령에 의해 결정되며 그것의 권위에 의해서만 유지됩니다.' 라는 것은 우리의 자유가 주권의 명령, 가령 최고 권력을 지닌 자가 만든 법질서에 의해 통제된다는 의미로 보아도 무방할지 궁금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최고 권력을 지닌 주권자를 신뢰할 수 있어야 하는데, 자신의 자유가 이 사람에 의해 보존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어야 하는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지는 아직 나오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대의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이유이면서, 동시에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이 주권자를 선택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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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세미나를 순연하실 경우 게시판에 공지를 올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2] 김정연 2016.03.15 926
공지 <안티 오이디푸스> 세미나 첫 시간 결정사항입니다 김정연 2015.10.20 1046
공지 <푸코 세미나> 세미나 참가자 명단 - 2017년 10월 김정연 2015.10.20 106
공지 다중지성 연구정원 세미나 회원 에티켓 요청 김정연 2015.09.08 1023
275 11/29 18장 발제문입니다 영대 2016.11.28 59
274 11/29 <신학정치론> 20장 발제 한성 2016.11.28 56
273 19장 에드가(Fe) 2016.11.27 47
272 [11/29] 발제공지입니다 rara 2016.11.23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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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 11/22 <신학정치론> 16장 한성 2016.11.22 72
269 11/22 [신학정치론] 제14장 보미 2016.11.22 59
268 11/22 13장 발제문 파일로 2016.11.22 46
267 [11/22] 신학정치론 제 12장 rara 2016.11.21 73
266 15장 신학정치론 에드가(Fe) 2016.11.20 59
265 다음주(11.22) 발제공지입니다. 영대 2016.11.16 63
264 [11/15(화)] 결석계 - 비즈니스 미팅 / 한대희 ARTLOVER 2016.11.15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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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 11/15 10장 발제문 영대 2016.11.15 67
261 11.15 (화) 11장 그리스도의 12사도가 사도들 및 예언자들로서, 또는교사들로서 사도서를 썼는지 어떤지에 관한 연구. 사도서한의 역할이 설명된다. Fe 2016.11.13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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