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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미학_삶과 예술

1007 발제문 모음

발제문 조회 수 483 추천 수 0 2016.10.07 19:43:31

이미지의 삶과 죽음/ 451~461쪽/ 명왕성

 

시학으로서의 기술

 

1. 시각 기기의 진화는 신모델 개발과 그 위계 원리에 따른다. 그 결과 예술은 더 이상 예술 속에 없다. 각 시대는 그 지각 건반을 갖고 있다. 즉 집단적 사고와 유사하며, 정서활동의 단계와 동시에 사회적 위신의 단계로서 결정된 중추감각이 있다.

 

2. 새 시대의 기술에 기반한 이미지가 전시대의 이미지를 제압한다. (창유리 세공은 사진 유리판에 의해 밀려나고, 사진 이미지는 전자적 이미지에 의해 밀려났다.)

 

3. 반면 새 기술에 의한 이미지가 전 시대의 이미지를 부활시키기도 한다. (회화를 영화적으로 읽고, 보도 사진이 탐방소설을 창조한다.)

 

4. 조각은 홀로그램으로 복귀하고, 만화는 양방향 게임에 의해 사장되고, 춤은 비디오댄스로 변하고, 서한문은 전화 발명 이후 사라지고, 신문연재소설은 시청각 이미지에 쇠락했다.

 

5. 어떤 이미지의 영역이 박물관으로 은퇴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은 일반적으로 그 충격이 쇠했을 때이다. 고대 입상들이 당대에 그것에 대한 믿음이 끝나기 시작했을 때 공개적인 장소에 세워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 다지원 건축, 도시공간 그리고 사회적 삶 세미나 ∥ 2016.10.6. ∥ 한대희(ARTLOVER)

TEXT : 레지스 드브레, <<이미지의 삶과 죽음>>, 글항아리, 11장. 비디오스페르[주1]의 역설(pp.465~474)

 

[주1] 비디오스페르 : 레지스 드브레는 이미지의 발전을 통해 본 역사를 문자 발명 이후인 '로고스페르(logosphere)', 인쇄술이 나오기 시작한 이후인 '그라포스페르(graphosphere)', 그리고 시청각 기기가 발달하기 시작한 '비디오스페르(videosphere)'의 3단계로 나눈다. 여기서 이미지의 존재 방식은 각 단계 별로 존재에서 사물로, 그리고 지각으로 변하게 된다.

 

0. 배경지식 공유

 

 '서구적 시선의 역사'라는 부제를 가진 〈이미지의 삶과 죽음〉이 국내 초역으로 그의 방한에 맞춰 출간되었다. 이 책은 그가 학계로부터 주목받게 만든 새로운 학문 '메디올로지(매개론)'의 완결편이라 할 만하다. 매개론에 대한 그의 저작 〈일반 메디올로지 강의〉와 〈유혹하는 국가〉는 〈이미지의 삶과 죽음〉과 함께 3부작을 이루고 있다. 매개론의 핵심 사상은, 현대 사회의 인간들이 이데올로기 대신에 이코놀로지(iconology)의 시대, 즉 실체가 아닌 그 재현물이 지배하는 시대를 산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주된 관심은 현대 사회의 인간 관계, 다시 말해 권력 관계를 중개.조작 혹은 통제하면서 각 체제를 공고히 하고자 하는 완고한 의사 전달의 방법과 체계를, 그리고 그러한 매체를 파헤치는 데 쏠려 있다.

드브레는 "지식인에게는 참 힘든 계절이다. 그렇다고 나아질 가능서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가 보기에 현대는 글쓰기의 신성성이 사라지고, 책이 점점 탈신비화하기 때문에 지식인의 역할 역시 축소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식인이 자기 의견을 사회에 내놓기 위해서는 미디어를 통해야만 하는데, 미디어는 그것을 어릿광대로 만든다. 미디어 자체가 스펙터클이자 거대한 쇼 비즈니스이기 때문이다. 바로 거기에 지식인을 노리는 함정이 있다."그러나 드브레는 아직 낙관론에 서 있다. 그는 "역사가 항상 전진만 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문화는, 자동차가 범람해도 조깅을 하듯, 느린 것을 찾아서 돌아오게 돼 있다"라고 말한다.
 
출처 : http://www.sisapress.com/journal/articlePrint/113302 “지성을 지배하는  이미지의 정체 - 비디오 미디어는 지식인의 함정”, 조용준 기자, 시사저널, 1994

 

기계적 영상의 시각은 물론 시신경과 관련되어 있다. 그렇다고 그것이 이미지는 아니다. 이미지가 존재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조건은 異他性이다. - 세르주 다네[주2](463)

 

1. 요약

 

포스트모던의 의고성

 

1.1. 이미지에 대한 현재의 맹목적인 숭배는 예술의 시대보다 아득히 먼 우상의 시대와 더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어디에나 매개 작용이 끼어드는 우리의 시대, 즉 우리의 원시적인 상징 이미지의 현상학을 발견한다. 왜냐하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을 이미 본 적이 있었다는 인상을 주는 ‘후기 근대성’의 매 단계에서 ‘전근대적’인 것으로 사라졌다고 믿던 예스러운 것이 우리 앞에 다시 활기차게 나타나기 때문이다.(465)

 

1.2. 도처에 있는 전자 때문에 거리와 시간 간격이 사리지고 가시적인 것이 다시 우리를 매혹하게 된다.....지구라는 행성은 장난감처럼 작아지고 길들여졌다.(466)

 

1.3. 물질의 성격을 벗어난 비디오는 고대의 ‘작은 거인’ 같은 위력을 되살린다. 작가가 사라진 자기 지시적인 이미지는 자동으로 우상의 자리에 선다. 또 우상숭배자 처지가 된 우리들은 이미지가 가르치는 현실을 숭배하는 대신에, 이미지 자체를 직접 찬양하라는 유혹을 받는다.....우리는 또다른 역사적인 현실, 즉 전자화한 사회가 원시사회처럼 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466)

 

1.4. 작은 컬러 화면은 플로티노스*의 신플라톤주의**적 소원을 들어준다..... 물감 같은 명암의 깊이도 없는 텔레비전 모자이크의 반짝임은 우리에게 그 자체로서 밝은 세계상을 전해준다(466)..,.,. 그러므로 우리는 신의 현시와 텔레비전 뉴스를 견주는 것이 신자에게 신성모독이고 저속한 일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고해자는 전화로 고해할 수 없고, 텔레비전[주3]에서는 신성한 성체배령을 할 수 없다.(467)

 

* 플로티노스(그리스어: Πλωτῖνος, 204년-270년)는 고대 후기 그리스 철학자이다. 플로티노스는 그리스어로 음독한 이름이고, 그 밖에 라틴어로 플로티누스(영어 포함), 독일어로 플로틴 등으로 읽는다. 그의 가족과 성장에 관한 이야기는 전해오는 것이 없으나, 그의 제자 포르피리오스에 의해 작품 54편이 보존되어 전해져 온다. 포르피리오스는 스승의 전 작품을 9권씩 묶어서 총 6집으로 편집했다.

 

**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는 3세기 이후, 플로티노스의 《엔네아데스》를 기초로 전개해 오는 사상 체계로서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스토아 학파 등 고대 여러 학파의 사상을 종합화하기 위에 성립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는 이데아계-현상계(現象界)라고 하는 플라톤적 2원론을 계승하고 있으며, 특히 전자를 세분화하여 전 존재를 계층적으로 파악하려고 하는 것이 특색이다.
  신플라톤주의의 학파로서의 존재는 529년 유스티니아누스 제(帝)에 의한 이교도(異敎徒)의 학원폐쇄령과 함께 막을 내리지만, 사상 자체는 중세·근세의 철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르네상스시대에 있어 플라톤주의 부흥이라 일컬어지는 것도 실제 내용은 신플라톤주적 색채를 진하게 갖는 것이다.

 

1.5. 감각적인 세계는 그것의 고유한 지식이고 현실과 진리는 이제 하나가 된다. 이것은 틀린 소식이지만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킨다. 이것은 환상이지만 우리의 욕말을 끄는 힘을 갖고 있는 환상이다. 알기 위해서 보는 것으로 충분한 것, 바로 이것이 우리의 가장 해묵은 소원이 아닐까? 이보다 기쁜 약속이 또 있을까?(468)...... ‘기쁜 소식’은 ‘영원성에 따라’, 뉴스는 ‘순간성에 따라’ 예고되고 있었다. 그런데 시사성이야말로 새로운 神性이다......텔레비젼 화면은 묵시론적 전망의 빛을 발산하지 않는다.(469)

 

1.6. 서구에서는 이 우상에서 저 우상으로 우상을 전전하는 것이 이미지의 행로일 것이다. 예술은 두 우상숭배의 중개 역할을 했다. 첫 번째 우상숭배는 지나치게 초월적이었고, 두 번째 즉 우리의 우상숭배에는 결함이 있다. 서구에서 이미지는 이 우상에서 저 우상으로 전전했을 것이다. ‘예술’은 두 우상숭배 사이에서 중개역을 했왔다..... 영상 체제에서, 이미지는 그다지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않는다.(469)

 

1.7. 우리의 눈은 점점 더 세계의 내용물을 외면하고, 사물을 보는 대신 도형을 읽는다. 합성물 덕에 원자재에 대한 산업 의존도가 매일 점점 낮아지듯이, 외부 현실에 대한 이미지의 의존도도 줄어들고 있다. 이 때문에 우리의 두 번째 우상숭배는 마력적인 힘을 되찾지만 여기에는 적어도 다른 누군가와 마주하거나 - 이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 자신을 적으로 여겨야 한다.(469)

 

1.8. 주체가 없는 시선과 잠재적 대상의 문화에서, 타인은 사라져가는 인종이 되어버리고 이미지는 그 자체의 의미지가 된다. 이것은 기술적인 나르시시즘, 다시 말해 의사소통이 내부의 중심을 향하여 집단적으로 움츠러드는 것이다..... 재처리는 사건을 철저하게 중요한 인물처럼 만들면서 거짓된 것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해준다.(470)

 

1.9. 영상은 또한 남들을, 특히 독특한 개체를 더는 바라보지 않는 데에 이용된다. 싫증이 났다는 표시일까 아니면 단념했다는 표시일까? 이제 회화에서 인간을 볼 수 없듯이 인간을 부호로 만들어버렸다. 단순한 시각적 기호가 된 것이다. 고르바초프***, 아라파트****, 레이건*****, 카스트로****** 대통령과 같은 이들은 더는 개인이 아니라 표시일 뿐이다. 그들은 인간 집단을 대신하는 상징이고..... 자도자에 대한 환유적인 사고로, 즉 전부를 하나로 여기는 방식으로 시선은 위로를 받는다.(470)

 

***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고르바초프(러시아어: Михаи́л Серге́евич Горбачёв 듣기 (도움말·정보), 문화어: 미하일 쎄르게예비치 고르바쵸브, 1931년 3월 2일 ~ )는 소비에트 연방의 정치가이다. 그는 제8대·9대·11대 소련의 국가 수반 겸 당 서기장을 역임하였으며 1985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고 1985년부터 1990년 3월까지 소련의 총리로 있었다. 역대 소비에트 연방의 지도자들 중 유일하게 러시아 혁명 이후 태어난 소비에트 연방의 지도자였으며 1985년 54세로 최연소 소련 지도자가 되었다. 재임 중 소련의 개방 정책인 페레스트로이카를 추진하였고, 이는 소련을 비롯한 중앙 유럽 공산주의 국가들의 개혁과 개방, 그리고 사상 해방에 큰 영향을 주었다. 소련 붕괴 이후 냉전을 종식시킨 공로로 199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 야세르 아라파트 (아랍어: يَاسِرْ عَرَفَاتْ‎ 야시르 아라파트, 문화어: 야씨르 아라파트, 1929년 8월 4일 - 2004년 11월 11일)는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PLO)의 초대 수반(1996년 ~ 2004년)이었다. 최대 지파 파타(Fatah)의 지도자로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의 의장(1969년 ~ 2004년)이었다. 팔레스타인 정치가로서 많은 일을 했지만, 투명하지 않은 재산 관리, 아내의 사치 등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 로널드 윌슨 레이건(Ronald Wilson Reagan, 1911년 2월 6일 ~ 2004년 6월 5일)은 미국의 40대(1981년 ~ 1989년) 대통령과 33대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지낸 정치인이다. 레이건은 일리노이 주 화이트사이드 카운티에 있는 탬피코에서 태어났고, 일리노이 주 리 컨트리에 있는 딕손에서 자랐으며, 일리노이 주 유레카 대학에서 경제학과 사회학으로 문학사를 취득했다. 졸업 후에 레이건은 처음으로 일리노이 주를 떠나 아이오와로 가서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했으며, 1937년에는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로 자리를 옮겼다.

 

****** 피델 알레한드로 카스트로 루스(스페인어: Fidel Alejandro Castro Ruz (Speaker Icon.svg audio), 영어: Fidel Castro, 러시아어: Фиде́ль Алеха́ндро Ка́стро Рус, 문화어: 피델 까스뜨로 루쓰, 1926년 8월 13일~)는 쿠바의 인권 변호사, 노동운동가, 군인이자 정치가, 공산주의 혁명가이다. 라틴아메리카의 혁명 지도자로서 1959년부터 1976년까지 쿠바의 총리를 지내고, 1976년부터는 국가평의회 의장을 지내다가 2008년 2월에 동생 라울 카스트로에게 의장직을 승계하며 2선으로 물러났다. 처음에 카스트로는 쿠바에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과 이에 동조하는 풀헨시오 바티스타 정권에 대항하는 민족주의자였다. 1953년 그는 몬카다(Moncada) 병영을 습격하다 실패하여 체포되었으며 재판을 받고 투옥되었다가 나중에 풀려났다. 그는 멕시코로 가서 당시 쿠바 정권을 공격할 조직을 건설하여 훈련했고, 1956년 12월에 체 게바라 등을 이끌고 공격을 실행했다. 카스트로는 바티스타 정권을 전복시킨 쿠바 혁명으로 권력을 잡아 쿠바의 총리가 되었다. 1965년 쿠바 공산당 제1서기가 되어서 쿠바를 일당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만들었다. 1976년 그는 각료 회의 의장과 더불어 국가평의회 의장에 취임한다. 또 쿠바군의 최고위 군사직인 "코만단테 엔 헤페(Comandante en Jefe, 최고 사령관)"에 오른다. 카스트로는 장출혈로 수술을 받는 등 고령으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어 2006년 국가평의회 제1부의장이었던 동생 라울 카스트로에게 권력을 이양할 뜻을 밝혔으며, 2008년에는 의장직이나 최고 사령관직을 수락할 생각이 없음을 공식 발표했다. 이에 따라 2008년 2월 쿠바 국회는 라울 카스트로를 신임 국가평의회 의장으로 선출했다. 2011년 4월 20일, 피델 카스트로는 마지막으로 갖고 있던 공식 직함이었던 공산당 제1서기직까지 라울 카스트로에게 물려주며 공식적으로 은퇴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집권한 지도자(52년 2개월 혹은 49년 5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1.10. 영상은 지시하고 장식하며, 가치를 부여하고 시각적으로 보여주며 또 정당화하고 기분을 전환시키지만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은 순식간에 생산물을 확인하도록 만들어진 것이지 그 자체를 보이려고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이미지는 균형을 깨트렸지만 영상은 안정감을 조성한다. 바로 이것이 유규하고 대체할 수 없는 영상의 사회적 기능이다.(471)

 

1.11. “세계는 정말이지 내가 재현한 대로 되었다.” 이러한 세계의 흡수는 절대적 이상주의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존재한다는 것은 지각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바야흐로 버클리(1753년 사망한 아일랜드 주교)가 말한 원칙, 즉 대상의 본질은 우리가 그것을 지각한다는 사실에 있다는 원칙을 실현할 기술적 수단을 갖게 되었다. 대상, 곧 어른, 아이, 영토, 다리, 지붕, 공장 등을 말이다. 이 더없이 ‘유쾌한’ 해소는 텔레비전 시청자나 비디오게임 참가자에게 정신적인 긴장을 덜어준다.... 이미지가 현실 원칙에 따라 기능한다면, 영상은 쾌락 원칙에 따른다.(471)

 

1.12. 걸프전쟁은 시각적인 전쟁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은 보이지 않는 전쟁이었다. 월남전은 이미지의 전쟁이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거기에서 본 것은 대표 자격도 없고 위임도 받지 않은, 이를테면 현 상태로 원래의 위치에 있는 월남인의 앞모습과 뒷모습, 또는 전체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그것은 보도기자와 사진기자를 위한 전쟁이었다. 그들이 만든 가장 훌륭한 작품이었을 것이다.(472)

 

1.13. 이 영상체제가 교훈적이고 설교조는 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문제는 윤리란 타인이라는 사실이다. 타인이 사라지는 자리에서 어떻게 올바른 윤리가 가능할까? 우선 이미지의 윤리성이 문제이다. 대상이나 주체에 대한 존중 이외에도 시각의 상호 교류가 가능함을 전제로 해야 하는 윤리 말이다.... 영상 체제는 소음과 분노로 메아리치게 될까?....전쟁이나 모순 또는 비극성의 개념처럼, 역사의 개념조차 문서의 우선권과 그에 상응하는 축적된 시간을 함축하고 있다.(473)..... 신이 자신의 비춰진 모습과 메아리 속에 홀로 남아 있을 때, 영상 체제는 ‘역사의 종말’을 현실로 만든다....도상의 승리는 이렇게 해서 ‘초이미지’, 즉 ‘비이미지’의 완결된 형태를 낳았다..... 과대한 성상은 폭발해버린 것이다. 바로 이런 까닭에 화상의 문명에서 이미지가 점점 적어지는 것이다.(474)

 

[주2] 세르주 다네 : 영화 비평가(Serge Daney, 1944~1992)
  앙드레 바쟁 이후 프랑스 최고의 비평가로 손꼽히는 세르쥬 다네는 1944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1964년부터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비평가로 일했으며 1975년부터는 편집장으로 일했다. 1981년부터 《리베라시옹》의 기자로 일했으며 1992년에 비평지《트라픽》을 창간했다. 1992년 6월 에이즈로 타계했다. 저서에는『각광La Rampe』(1983),『영화 일지 Cine-Journal』(1986),『핸드백 도난에 주의하세요Devant la recrudescence des vols de sac a main』(1991) 등이 있다. 시네마 시리즈 2권. 프랑스 영화 비평에 있어 세르쥬 다네는 앙드레 바쟁 이후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힌다. 에이즈로 인한 자신의 때 이른 죽음을 예감한 다네는 ‘본격적인 저서’를 위한 소재로서 동료인 세르쥬 투비아나와 인터뷰를 진행했고 이 최후의 인터뷰의 흔적들이 모인 결과물로서 이 책은 그의 사후인 1994년에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 다네는 자신의 실존적 체험을 근거로 해서 영화에 대한 매우 흥미로운 메타포를 제시한다. 여행취미, 우편엽서에 대한 몰입 그리고 외국어에 대한 사랑 등 이 책을 통해 그가 어떤 영화적 사고의 궤적을 밟아왔는가를 살펴봄으로써 영화에 관한 새로운 사고를 만나는 자리가 될 것이다.

 

죽음을 예감하며 쓰여진 영화적 자서전
  프랑스 영화 비평에 있어 세르쥬 다네는 앙드레 바쟁 이후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힌다. 이 책 「영화가 보낸 그림 엽서」는 세르쥬 다네가 결국 완성시키지 못했던 책이다. 에이즈로 인한 자신의 때 이른 죽음을 예감한 다네는 ‘본격적인 저서’를 위한 소재로서 동료인 세르쥬 투비아나와 인터뷰를 진행했고 이 최후의 인터뷰의 흔적들이 모인 결과물로서 이 책은 그의 사후인 1994년에 출간되었다. 삶과 영화가 미로처럼 겹치고 지나가면서 다네 자신의 생이 이야기되고 있는 이 책은 ‘영화’와 ‘20세기의 역사’의 몽타쥬이면서 동시에 가장 치열한 영화적 자서전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프랑스의 “최후의 비평가”
  1962년 영화를 좋아하는 친구들과 「영화의 얼굴」이란 잡지를 만들기도 했던 다네는 1964년에 「카이에 뒤 시네마」에 들어가 그 이후 쭉 이 잡지의 주요한 필자 중 한 사람으로 활동했다. 1975년에 「카이에 뒤 시네마」지의 편집장이 된 다네는 질 들뢰즈, 폴 비릴리오, 장 루이 쉐퍼 등 영화바깥의 다양한 시각을 가진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새로운 영화적 사고를 만들어내려 애썼다. 이러한 소통에의 노력은 그로 하여금 프랑스에서의 영화담론의 중심적 위치로 올라서게 했다. 그리하여 영화에 대한 사고에 있어 다네로부터 적지않은 영향을 받았던 질 들뢰즈는 그를 위해 “낙관주의, 비관주의 그리고 여행”이라는 아름다운 글을 쓰기도 했으며 고다르는 자신의 「프랑스 영화 2 X 50」에서 드니 디드로에서 시작하는 프랑스의 비평가 계보에 있어 맨 끝에 위치한 인물로 다네를 꼽기도 했다.

 

프랑스 영화 비평의 흐름을 개괄
  앙드레 바쟁을 중심으로 창간된 「카이에 뒤 시네마」는 전후 프랑스 영화 비평의 대표적이고 상징적인 잡지였다. 이 잡지에서 초기에 글을 썼던 고다르, 로메르, 샤브롤, 트뤼포, 리베트는 50년대 후반부터 모두 감독으로 데뷔를 하고 '누벨바그'라는 거대한 영화 운동의 중심에 서면서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다. 다네는 1964년부터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비평가로 활동을 시작했는데 「카이에 뒤 시네마」의 비평가들이었던 누벨바그 감독들의 바로 아랫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60년대부터 80년대 초반까지 「카이에 뒤 시네마」에 글을 썼으며 75년부터는 편집장으로 일하기도 했는데 그동안 「카이에 뒤 시네마」의 비평적 경향은 여러번 변화하였다. 알프레드 히치콕과 하워드 혹스로 대표되는 할리우드 장르영화 감독들을 옹호하던 50년대, 60년대를 지나서 68 혁명을 거치면서 「카이에 뒤 시네마」의 비평 노선은 급격하게 정치적으로 좌경화된다. 정치적인 시기를 거친 「카이에 뒤 시네마」는 80년대에 이르러 '시네필의 재발견'이라는 방향으로 선회하기에 이른다. 이 책을 통해 다네가 몸담았던 「카이에 뒤 시네마」의 비평적 방향의 변화를 살펴봄으로써 자연스럽게 프랑스 영화 비평의 흐름도 개괄하게 된다.

 

  ‘시네필이란 무엇인가’--새로운 관객론의 구성
  다네는 초기에 자신의 시네필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전통에 안주하는 기성세대들로부터 벗어나 영화를 통해 새로운 저항적 공동체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에 몰두했다. 68년 5월혁명 이후 혼돈의 시기를 겪으면서 그는 서서히 이러한 시대적 소용돌이로부터 벗어나 관객론의 존재론적 전환을 이룩하는 시기로 들어서게 된다.
영화를 자신의 삶의 중심에 놓는 사람들, 즉 시네필은 어떤 사람인 것인가. 영화 속에 표현된 모순된 갈등과 징후, 그 결핍(구멍)의 실재에서 시네필은 자신의 욕망의 완벽한 성취를 기다리는(혹은 지체시키는) 자이고 그래서 그는 강박증 환자와 닮아있다고 다네는 보게된다. 또한 이 책에서 다네는 자신의 실존적 체험을 근거로 해서 영화에 대한 매우 흥미로운 메타포를 제시한다. 여행취미, 우편엽서에 대한 몰입 그리고 외국어에 대한 사랑 등. 이 책을 통해 그가 어떤 영화적 사고의 궤적을 밟아왔는가를 살펴봄으로써 영화에 관한 새로운 사고를 만나는 자리가 될 것이다.

 

[주3] 텔레비전 : <텔레비전은 현대인의 몸>

  과학기술은 현대인의 몸을 어떻게 가장 다르게 변형시키는가? 이를 아는데 가장 중요한 과학기술은 눈 코 귀 입 피부 등 감각 기관들과 뇌의 연결을 통해 이루어지는 감각 사유의 입출력 시스템을 강화하고 변형시키는 전자 디지털 기술이다. 1830년대 다레르가 사진을 발명했을 때만 해도 그 충격이 대단했긴 했지만 경악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1895년 12월 28일 뤼미에르 형제가 그랑 카페에서 최초로 스크린에 영화를 비췄을 때 사람들이 움직이는 기차에 놀라 밖으로 도망쳤을 정도로 동영상의 별명은 경악스러운 것이었다. 그 이후 100년이 넘게 지난 지금 우리는 어떤가? 텔레비전에서 살아 움직이는 동영상을 보지 않으면 마지 기독교인이 신을 떠나면 불안한 것처럼 불안해 도저히 견딜 수 없다. 왜 불안한가? 텔레비전에서 보이는 동영상들이 바로 우리의 몸을 대신해서 나의 지각적인 인지를 대신해서 떠맡고 있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은 현대인의 몸인 셈이다. 텔레비전이 우리의 몸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프랑스의 이미지 이론가인 레지스 드브레는 역사를 문자가 생긴 이후인 로고스스페르의 시대, 인쇄술이 생긴 이후인 그라포스페르의 시대, 시청각 기기가 생긴 이후인 비디오스페르 시대로 나뉜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비디오스페르 시대에 살고 있는 셈이다. 그가 들고 있는 비디오스페르 시대의 한가지 특징은 미디어가 현실성을 대신하면서 이미지가 사건을 통제한다는 것이다. CNN이 걸프전을 실감 나게 전 세계로 생중계로 전달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전쟁의 참화보다 인공위성을 비롯한 첨단 매체의 힘에 더 경악했다. 전 세계인이 실제 이라크 땅에서 벌어지는 실제 비참한 상황을 마치 전쟁 게임을 보듯이 하면서 텔레비전에서 중계되는 전쟁의 영상 이미지 상황을 실제 전쟁 상황의 전부라고 여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출처 : http://blog.naver.com/hcdasom/220689466090

 

2. 이해가지 않는 대목

 

2.1. “이미지가 존재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조건은 이타성(異他性)이다.”(463)에서 이타성의 의미는?

 

2.2. “신이 자신의 비춰진 모습과 메아리 속에 홀로 남아 있을 때, 영상 체제는 ‘역사의 종말’을 현실로 만든다“(474)에서 역사의 종말의 의미는?

 

 

 

 

 

다지원 기획세미나 : 건축, 도시공간, 그리고 사회적 삶 | 2016년 10월6일 발제자: 이금주
텍스트: 레지스 드브레 [이미지의 삶과 죽음]  정진국 옮김, 글항아리, 474~487

 

텔레비전-통신과 영화계

 

1.1 우리의 영상이 오래된 시각예술과 맺는 관계는 음향효과가 음악과 맺는 관계, 도해가 회화와 맺는 관계, 그리고 통신이 표현과 맺는 관계와 같다.

1.2 영화는 제작에 있어 일종의 수공업이었고, 그것은 지금도 여전하다. 제작자와 감독은 편집인과 작가를 잇는 관계와 비슷한 아주 특별한 관계에 있다. 이 관계가 영화제작자와 텔레비전 편성자를 다르게 만든다. 영화에는 예술산업이라는 애매성이 있지만 텔레비전은 하나에서 열까지 제작과 방송 그리고 산업이다. 한편의 영화는 ‘관객’이, 반면에 텔레비전은 ‘소비자’가 있다.(474.475)

1.3 제7의 예술은 무대감독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연히 ‘무대예술’의 맥을 이었기 때문이다. 방송과 상연, 이것은 이미지의 두 물적 기반이다.  텔레비전과 영화는 가시적인 ‘상태’가 보는 ‘행위’와 구별되듯이 서로 다르다. ‘보다, 지각하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동사 ‘하라오harao’가, 응시하다, 생각하다‘라는 뜻의 ’테오메theo-mai’와 서로 다르듯이(테오메에서 연극과 정리란 말이 나왔다).

1.4 사진 때문에, 회화가 닮아야하는 의무에서 해방된 것처럼, 텔레비전으로 인해 영화는 기록 의무에서-이를테면 사회문제, 사회적인 일상에 대한-벗어났다. 이미지를 통속화하면서, 최경량급의 매체는 보다 무거운 그의 선배를 비범한 영역으로 격상시킴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한다.(476)

1.5 영화가 연극으로부터(그리고 서커스와 음악당으로부터) 내려온다면, 텔레비전은 전화 쪽을 (아직 일방적이라 하더라도) 바라보고 있다. 텔레비전은 전기통신의 역사로부터 기인하지만, 영화는 조형예술의 역사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공화국과 민주주의(다른 말로 하자면 프랑스식 공화제 민주주의와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즉 어떤 사회학자도 맨눈으로 관찰할 수 없는 이 ‘이상형’은 상호관계 속에서만 이해가 된다. (477)

1.6 영화가 여기에서 의미하는 것은 ‘작가가 만든 영화’이고 텔레비전이 의미하는 것은 생방송되는 정보 또는 무대 방송이다. 이는 분명 축소된 의미지만 사물의 정수, 즉 각각 이 두 장르에 고유한 개념-이것은 또한 그 우수성이기도 한데-으로 축소된 의미인 것이다.

이런 것은 생산물보다는 시선의 대위법에 따라 ‘고급’의 이름으로 ‘저급’을, ‘세련된 문화’의 이름으로 ‘대중문화’를 비난하는 행동과 전혀 무관하다.  영화의 초기 시대를 따라다닌 야유가 거의 그대로 텔레비전 비방자에게서 다시 나타난다. 다른 분야에서와 같이 미학에서도 중요한 공헌은 부차적인 장르가 이뤄낸다. 스릴러물이나 광고가 르네 클레르나 세실b.데밀보다 영화를 더욱 크게 혁신시켰기 때문이다. 포스터를 고귀한 장르로, 그래피즘을 징후로 보고, 또 지하철의 낙서꾼과 더불어 단편적인 비디오 음악을 ‘시대정신’의 단면도로 취급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선택한 관점이다.(478). 

1.7 영화를 보는 것은 여전히 개인적인 잔치이고 텔레비전을 켜는 것은 고독하지만 개성은 줄어드는 즐거움이다. 영화 관객은 나중에 합산되어 하나의 관객층 즉 유일무이한 만남의 총합을 형성한다면, 텔레비전 시청자는 순간적인 통계적 집합체로서 ‘시장의 일부’를 이룬다. (479)

1.8 방송의 존재이유는 그 수용이며, 메시지의 가치는 그 청취도로 매겨진다....좋은 영화는 여행을 하지만 좋은 텔레비전 프로는 좋은 포도주처럼 옮겨다니지 않는다. (480)

그것은 민주주의처럼 다수의 정신을 지니고 있다. 강자를 강화시키면서 상대적인 개인의 사회적 관계를 공고히 한다. 영상은 주위 환경의 환한 그늘로서 강자 편에 있고 보다 저항이 적은 노선을 따라간다. 텔레비전은 개방적인 사회가 지닌 양성 ‘피드백’이다(‘양성’이란 좋지 않은 역작용, 즉 기계장치를 마구 회전시키는 역작용이다).

1.9 영화는 소수의 사명의식, 공화제 방식이다. 텔레비전이 허영심 많은 사람의 도구이고 순응주의자가 포착하는 기회라면, 영화의 전설은 오만하고 엉뚱한 사람이 만들었다. 그 걸작은 주변부에서 비롯되고 즉각적인 실패로 영예롭게 된다. 영화는 채플린을 통하여 상징적으로 하층민을 승인했고, 텔레비전은 ‘달라스’를 통해 상류층을 승인했다.(481)

1.10 ‘세상을 향해 열린 창’인 텔레비전은 그것을 통해 바라보는 사람을 틀 속에 가두고, 영화는 외적 현실을 틀 안에 넣어 탈사회화하고 낯설게 만든다. 텔레비전 병에 걸린 사람은 통제할 수 있는 정착민이지만, 영화광은 통제받지 않는 유목민이다. 좋은 텔레비전은 그 시청자를 반영하고, 좋은 영화는 거울을 깨뜨린다. 전자는 토착민을, 후자는 ‘자신의 환경을 배반하는’ 사람이나 세계주의자를 일으킨다. 

1.11 시청각에는 의미 있는 지리적인 공간이란 없다.(483) 단지 기상도(또는 이기적인 지리[국경이나 영토 분쟁, 표기 등에서 나타나듯이])와 같이 추상적이고 인상 기록적인 지리적인 공간뿐이다.

1.12 이념적인, 즉 나르시스적인 기구인 텔레비전은 어떤 소속감을 입증한다.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섬광이 촉매제인 영화는 우리를 우리의 뿌리에서 떼어낸다(우리는 초목이나 채소 같은 꼴을 조금 모면하게 된다). 하나는 가정용 이미지의 무엇보다 사회적인, 안도감을 주고 사회화하는 기능이고, 다른 하나는 관람실 안에서 배회하고 도망가는 꿈의 기능이다. 하나가 최상의 경우 진행 중이거나 지나간 현실과 관련된 목격자라면, 다른 하나는 예언자가 될 수 있다. 

1.13 텔레비전 평론가는 흘러가는 시간의 연대기를 쓴다. 그는 위장한 정치적 논설위원이다. 영화평론가는 글로써 시각적 영원성의 끝을 이어주었다. 

1.14 좋은 영화는 하나의 스타일이고 좋은 방송은 하나의 상황이다.(484) 그리고 좋은 텔레비전용 영화는 우선 좋은 주제이다. 즉 내포와 외연, 시와 산문의 차이다. 하나의 ‘성상’이 그것을 담고 있지 않던 세계에 첨가되는 것이다. 하나의 ‘지표’는 그것이 가리키는 세계의 단편이다.  영화는 우리에게 세계와 인간에 대해 말하지만, 사실주의적 사명을 띤 이 예술은 하나의 관점으로 즉 선택하고 대화하며, 자르고 연출하는 주관성으로 매개되고 정화된 혼돈을 원한다. 반면에 텔레비전은 어떤 상황의 혼돈이 우연의 고유한 떨림 속에서 이미지에 돌출할 때 최상의 상태에 이른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돌발적인 사건이 정점이기 때문이다.(485~487)

 

 

 

다지원 기획세미나 : 건축, 도시공간, 그리고 사회적 삶 | 2016년 10월 7일 발제자: 박찬울

텍스트: 레지스 드브레 [이미지의 삶과 죽음]  정진국 옮김, 글항아리, 487~494

 

텔레비전에서는 모든 것이 항상 현재이고 즉각적이며 자명하다. 지나간 순간은 지나가지 않은 척해야 하고, 거의 현재인 것처럼 나타나 동시적으로 재연되어야한다. 이것이 ‘재연된 순간’, 즉시 현재로 되돌아온 부끄러운 과거이다. 이 과거는 ‘플래시 백’ -시간적인 거리가 변화시킨 그대로의 모습으로 기억에 의해 찬양되고 과거로서 내보이는 영광된 과거-와 반대되는 것이다. 이는 현재의 순간을 사는 두 방식 -절대적인 것처럼(비디오스페르), 상대적인 것처럼(그라포스페르) 사는 방식-을 상징한다. … 영화이미지는 가벼운 문제를 심각하게 만들고, 비디오 이미지는 진지한 것을 가볍게 만든다. (시간에 대한 윤리적 태도이다.)

 

영화에는 ‘먼 것을 근접시키고 가까운 것을 멀어지게 하는’ 장점이 있다. 즉 관객이 매순간 자기에게 멀고 가까운 것을 선택하면서 자유롭게 도피나 이탈과 같은 거리두기의 수완을 발휘할 수 있다.

 

텔레비전은 도리를 가르친다. 그것은 시각성보다 당위성을 지향한다. 중요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고 있다. … 영화가 정신적인 사건이라면 텔레비전은 사회적인 사건이다. 전자가 인본주의에 기인하고 후자는 인도주의를 선호한다. … 텔레비전은 우리 마을의 신부이다. 그것은 사건들과 부침하는 인물들에 그날그날 서열을 매기면서 확고하게 목회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영화의 장점은 바로 영화가 소비하는 시간에 있다. 좋은 영화는 의미 있게 사는 시간, 즉 모두에게 열려 있는 은신처와 고향을 구축한다. 지속성을 추방하는 비디오스페르는 이미지끼리 또는 방송끼리 서로 몰아내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는다. 왜냐하면 단지 순간만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포착할 수 없는 순간은 언제나 우리를 앞서간다. … 그것을 따라잡으려면 현기증을 각오해야 한다.

 

영화에는 이야기가, 역사가 있다. 우리가 본 영화는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음악 곡조처럼 마음속을 떠다닌다. … 우리에게 남아 있는 텔레비전 뉴스의 순간들은 머릿속에서 반짝거린다. 이런 덧없는 순간성 때문에 텔레비전은 시청자와 ‘정기적인 만남’에 집착하고 신회를 사려고 고민한다.

 

이 천장 앞에서 어떤 역사가 태어날까? 영상에 빠지면 사실 반항적이 되기보다는 동화될 확률이 더 높다. 생각한다는 것은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이다. 텔레비전은 그대로의 세상에 ‘예’라고 말한다. 영화는 ‘예, 하지만’이라고 말한다. 회화는 마네의 시대까지 ‘예’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뒤로는 ‘아니오’라고 말할 텐데, 여기에 여전히 그 고유한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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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지원 기획세미나 : 건축, 도시공간, 그리고 사회적 삶 | 2016년 10월 7일 발제자: 손보미
텍스트: 레지스 드브레 [이미지의 삶과 죽음]  정진국 옮김, 글항아리, 494~507

 

제11장 비디오스페르의 역설

 

1. 요약

 

시각적 변모

 

1.1. 역사상 처음으로 한 세대라는 짧은 시간에 매체계가 변화했다…. 1960년과 1980년 사이에 시대의 경첩은 삐걱거렸다. (494)

20년 뒤에, 처음에는 시각적이고 곧이어 개념적인 어떤 것이 발견된다. 그것은 대중이란 있음 직하지 않은 일종의 추상화이고, 개인은 구체성 그 자체, 민주주의 피라미드의 가장 단단한 축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나..-사실을 보자. 어떤 민족은 이 작은 화면 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495) … 우리는 ‘이즘’을 바꾸었다. 경쟁적인 개인주의는 공산주의보다 덜 위험하고, 전체주의보다도 덜 위험하겠지만, 그것 역시 이데올로기이다. (496)

 

1.2. 작은 화면은… 의식 구조를 형성시키는 물건 이상의 것이다. 그것이 그 시대의 가장 왕성한 감별사이다 … 사회적으로 살아남는 상징적인 후보들은 각자의 ‘상징 이미지로서의 가치’에 따라 결정된 어떤 경력을 갖고 있다. (496) 이 가치로써 그것이 유행할 확률이나 프로 편성을 결정하는 방송에 대한 소질을 측정한다. 사회사상은 유전적으로 선택되어 역류한다.(497)

 

1.3. 시각화할 수 없는 담론은 쓸데없는 것으로 치부된다. … 이미지-기호는 생산을 가동시키지만, 기능을 차단한다. (498)

텔레비전은 명성과 보수의 단계를 정해둔다. … 시선을 끌거나 아니면 사라진다. 대중의 시선이 가치를 부여한다. … 보일 수 있는 기회를 늘리는 것이 모든 사람의 지상 과제가 되었다. (500)

 

1.4. ‘매스미디어’가 지배한다. … 비디오스페르는 몹시 야비하고 무책임하다. 왜냐하면 거기에 희미해질 정도로 물질적인 기억이 넘치기 때문이다. … 이 분야에서 무례함과 훌륭한 성과는 동의어이다. 결함이나 실수, 일탈은 서로를 상쇄하며 자석 같은 효력으로 웃으면서 거의 기계적으로 스스로 죄를 사한다. (501)

 

집단적인 무사고

 

1.6. 물질적 이미지(사진, 텔레비전, 영화 등의 지시적, 유사적 이미지)는 부정문을 모른다. … 어떤 금지나 가능성, 프로그램이나 계획은(실제의 사실을 초월하거나 부정하는 모든 것은) 이미지가 되지 않는다. (501) … 상징적인 것에만 유일하게 대립과 부정의 표시가 있다. (502)

 

1.7. 1)이미지는 범주나 유형이 아니라 특수한 문맥 속에 있는 특수한 개인밖에 드러낼 수 없다. 그것은 보편성을 모른다. … 2)이미지는 분리와 가정의 통사적 조작 장치를 알지 못한다. 그것은 종속절도 모르고, 모순관계처럼 인과관계도 모른다. … 이미지는 논리의 상위 차원에 대한 가능성을 지니지 못한 채, 단 하나의 현실 차원에서 늘어놓고 덧붙이는 방식으로만 진행된다. … 3) 이미지는 시제를 표시하는 기호를 모른다.

 이러한 네 가지 결함은 가치판단이 아니라 객관적인 사실이다. (503)

 

1.8. 인쇄된 텍스트의 이론과 편견을 비디오 이미지의 이론과 편견으로 대신한다. … 반성적 행위에 대한 자연발생적 행위의 우위성, 집단에 대한 개인의 우선권, 유토피아와 위대한 이야기의 붕괴, 현재에 대한 고조된 관심, 개인적인 것으로의 침전, 육체에 대한 찬양등…이 새로운 집단적 의식 구조의 특징들은 영상의 진부한 효과로 모두 해석 할 수 있다.(504)

 

1.9. 부정을 하는 데 부적합한 특성은 … 훌륭한 회의주의로 기우는 보수적인 정신을 낳을 것이다. 대립적인 또는 초월적인 가치에 대한 결함이 사실상, 드러난 현실을 대등하게 만든다. (505)

 일반화하는 데 부적합한 특성은 … 추상적인 정의보다 구체적인 자선에 더욱 열중하는 개인들을 만들어낼 것이다. … 그들은 상징적인 기준과 지주를 갖지 못한 채 자신에게만 몰두하기 때문에 …. ‘보편적’인 의지의 표현인 법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 그들은 또한 비판정신을 갖지 않은 해체된 정신의 소유자들이다. (505)

 -그들은- 자신의 시간에 침몰된 채 강렬하게 순간을 살고 자기를 실현하며 일시적인 것에 더 가치를 부여하는 존재들이다. … 그들은 사건 앞에서 어떤 기억도 어떤 내면적인 거리도 두지 않는다. … 그들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506)

 

1.10. 앙드레 말로는 지성을 셋으로 구분했다. 1) 거짓의 파괴 2) 판단력 3) 가정할 줄 아는 정신. 이 셋이 결합된 것이 지성이다. 이러한 작용은 이미지 속에서 혹은 이미지에 의해서 이루어 질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작용은 이미지가 없어도 이루어지며, 이미지에 대항할 때도 이루어 질 수 있을지 모른다. (506)

 그는 … 냉소적이고 유동적인 사회를 보게 될 것이다. … 논리도 연관성도 지니지 않은 근시안적인 정신을 보게 될 것이다.(506) … 그는… 상황과 공감, 신체적인 참여에서 오는 감정적인 가치가 우리를 권태와 논리적 추상성의 냉소적인 비정함으로부터 구원하러 오는 이러한 세상에 태어난 것을 만족해야 할 것이다. (507)

 

 

2. 질문, 토론

 

2.1. <시각적 변모>에서 498쪽에 등장하는 ‘이 모두가 겉치레일까?’ 라고 하는 문장의 맥락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2.2. <집단적인 무사고>에서 503쪽에 등장하는 ‘집단적인 주관성’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 이 말의 의미가 잘 파악되지 않기 때문인지, 이 말을 포함하는 문단 전체의 내용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에 관해 토론해 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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