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지원 기획세미나, 삶과 예술. ∥2018년 1월 19일∥멍먼지
모리스 메를로-퐁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東文選, 2004 79~99,4
지각적 신념과 부정성
철학은 지각적 신념을 유보하고 지각적 신념을 받쳐주는 동기들을 발견내는 것에 의해 지각적 신념에 내포된 모순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잘못된 듯 하다. ··· 우리에게 하나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하는 이유들에 근거한 믿음을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유들은 지각이 흔들릴 때 지각을 대신하거나 보호하기 위해서만 거기 있다. 우리가 굳이 이유를 찾는 것은 우리가 아무리 해도 보지 못하기 때문이거나, 착각과 같은 다른 실상들이 우리에게 지각의 명증성 자체를 거부하게 부추기는 탓이다. 79
우리는 결국 반성과 함께 반성을 통해서 주관-존재와 존재 자체를 다른 식으로 고찰해야 한다. 반성적 우주의 끝에서. 반성적 우주야말로 우리의 이 구축작업에서 우리를 은밀하게 인도하며, 우리가 반성적 우주를 재구성하기위해 취한다고 자부하는 반성적 과정들의 진실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계의 지평에 주의를 집중하여서. 세계의 지평이 곧 우리의 회의에 대한 어떠한 부정도 그 등가물이 되지 못하는 최초의 긍정이니까. 80-81
사르트르 존재와 무 (다음 발제문에서도 이어질듯)
혹자는 결국 반성 이전에 반성이 가능토록 하기 위해서는 세계와 순진하게 교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81
요컨대 ‘주관성’이나 ‘에고’조차도 없게, 의식에는 ‘주민’이 없게끔. 나는 의식을 몸의 이면으로, ‘정신현상(psychisme)’의 특성으로 만들어 버리는 이차적 통각(aperceptions)으로 부터 의식을 자유롭게 해주어야 한다. ··· 바로 이 절대적 충만과 절대적 긍정성으로서의 존재에 대한 직관에 의해, 그리고 우리가 무에 집어넣은 존재적인 것을 모두 삭제하고 순수하게 만든 무에의 관점에 의해서 사르트르는 사물들에의 우리의 최초 접근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82
사람들이 무의 관념에 반대하여 내놓을수 있는 모든 논거들을 사르트르는 받아들인다: 요컨대 그러한 논거들은 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바로 무가 존재하는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부정적인 것을 사유하는 유일한 태도는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83 각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있는 것과,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은 같은 것이다. ··· 나라고 하는 것이 내가 될 수 있는 것은 단지 멀리, 저기, 내가 내앞에 내세우고 있으며 나와 가장 조금 떨어져 있는 나의 먼 것들에 불과한 나의 몸, 이 인물, 이 사념들 속에서일 뿐이다. 그리고 역으로 나는 내가 아닌 이 세계에 나 자신에게만큼이나 밀접하게 매어있다. 세계는 어떤 의미에서 나의 몸의 연장선일 뿐이다. 88 (각주- 나의 몸은 별들에게까지 이어지고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지각하는 것과 동일한 세계에 도달한다는 지각적 신념의 또 다른 확신을 고찰하면서, 그러한 확신이 진정으로 부정주의적인 철학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는 보자. 89
부정의 철학은 지각적 신념이 우리에게 수적으로 하나이고 모두에게 공통된 세계를 우리들의 것인 전망들을 통해, 열어 주겠다는 주장을 전면적으로 승인한다고 하겠는데, 왜냐하면 기본적 부정으로서 고독한 자기는 자신의 모든 전망을 넘어서는 배후-세계에 미리 부터 열려 있기 때문이요, 왜냐하면 ‘비길 데 없는 괴물’은 자기의 관점들이 그 어느것에도 합치하지 못함을 마음속으로 부터 확신하고 있는 한편, 만일 누군가를 만나면 가족을 이룰 준비가 되어 있고, 또한 자기를 넘어서 멀리 갈 태세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 사실의 상황에 가담하는 것이나 사실의 상황을 존재와 자신을 연결하는 끈처럼 지지하는 것은 자기의 정의 자체가 된다. 이 외부는 자기를 그의 개별성 가운데서 확인함과 아울러 자기를 타자들의 시선에 부분적인 존재로서 가시적으로 만드는가 하면, 동시에 자기를 존재의 전체에 연결시킨다. 96
부정적인 것에 대한 사유는 우리가 출발점에서 기술한 바 있는 지각적 신념의 세번째 요구를 충족시킨다. 96
우리가 처음에 했던 존재와 무의 근원적인 구별, 분석의 추상적이고 피상적인 단계를 넘어서면, 우리는 사물들의 중심에서 다음과 같은 점을 발견한다. 두 대립항이 너무도 배타적이어서 각 항은 대립항이 없으면 추상화에 불과하다는 점, 존재의 힘은 공범인 무의 약함으로부터 확보된다는 점, 즉자의 어둠(모호성)이 ‘나의 의식’의 명료성을 위한 것은 아닐지라도 일반 대자의 명료성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유명한 존재론적 문제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어떤 것이 있는(존재하는)가?”는 양자택일과 함께 사라진다. 요컨대 아무것도 없는 것 대신에 어떤 것이 없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것은 어떤 것의 자리나 존재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 요컨대 무는 비존재하며(부정적인 의미에서), 존재는 존재한다. 한쪽이 다른 한쪽에 정확히 부합하는가 하는 의문은 더 이상 의문도 아니다. 부정적인 것을 생각하지 않았을 때는 모든 것이 불분명하지만, 부정적인 것을 부정적인 것으로서 생각하면 모든 것이 명료하다. 왜냐하면 이제 부정이라고 불리는 것과 긍정이라고 불리는 것은 공범으로 나타나고 일종의 등가관계로까지 나타나기 때문이다. 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