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중에서 현실타당성을 갖는 생각들만, 마치 연장통에서 연장을 골라내 사용하듯, 필요에 맞게 사용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우리(내)가 실천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생각들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실천 속에서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져서 실제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부할 것인가, 또 어떤 생각을 발전시키고 어떤 생각을 기각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갈등적이고 논쟁적인 성격을 띠고 나타난다. 결국 비판 없이 독해 없고, 사실상 이용 역시 불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판작업이 어떻게 수행될 때 역사적 문헌들이 우리의 삶에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는 것일까?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비판과 부정을 동일시하는 생각이다. 적지 않은 경우에 우리는 독서과정에서 이 책이 현재의 나의 생각/지향과 부합하는가 어긋나는가를 따지고 어긋나는 경우에 책에 나타난 생각이나 혹은 그 저자를 부정하곤 한다. 이것은 전형적으로 이데올로기적 독해법이며 외재적 비판법이다. 많은 경우에 현재의 자신의 생각 자체가 순수한 자기생산물이라기보다 다른 저자들, 교사들, 친구들 등의 영향하에서 먼저 형성되어진 생각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 태도는 하나의 저자에 다른 저자(광의의)를 대치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럴 때, 생각은 발전할 수 없고 비판은 불모의 것으로 머문다. "나는 이 저자의 생각이 싫어." 혹은 "좋아"라고 말하는 것에 머물 때 만남은 이루어질 수 없다. 이렇게 비판이 취향의 표현인 한에서 독서는 취미활동 이상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닫힌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비판이며 그런 한에서 정태적이다. 이러한 비판은 변화를 가져올 수 없고 반복만을 가져올 뿐이다. 책이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거듭된 자기확인을 가져올 뿐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데 많은 시간을 바친다 하더라도 접근법이 이렇게 보수적인 한, 그 시간은 낭비와 소모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유효한 비판은 이와 어떻게 다를 수 있을까? 비판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비판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변화할 수 있을까? 이 문제를 생각해 보기 위해서는 우선 책이 무엇이고 책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책을 읽는 것은 새로운 만남이고 새로운 경험이다. 지난 문헌들과의 만남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새로운 시간 속에서의 다른 만남이다. 책은 그 자체가 당대의 시간들 속에 개입하면서 산출된 하나의 역사적 사유사건이기 때문에 독서는 그 역사적 사건과의 만남이자 참여이다. 그리고 현재의 독서는 지금의 시간 속에서 그 역사적 사건과 만나는 것이고 그 사건을 우리가 속해있는 삶사건, 사건삶 속에 참여토록 하는 것이다. 독서는 이런 의미에서 이미 실천적인 행위망의 일부이다.

 

따라서 비판적 독서는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무엇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라는 물음에서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다. 이 물음들을 가지고 역사적 책들을 만날 때, 나/우리와 그/그들 사이의 간격과 차이는 간단히 건너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차이와 다름이야말로 바로 우리가 우리 시대의 문제를 생산적으로, 유효하게 생각하기 위해 머물러야 할 창조적 공간이자 실험실이다.

 

이 실험실에서 독서행위를 하는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우선 저자가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저자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하나하나의 문자들이, 그리고 그 문자들의 관계들이 있는 그대로 읽혀지고 평가되어야 한다. 저자의 생각이 낯설면 낯설수록 "아마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일꺼야, 그래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게 틀림 없어"라며 자신의 상상틀, 사유틀을 저자에게 폭력적으로 부과하는 경우가 많다. 이 사유 폭력은 저자가 말할 기회를 봉쇄하고(즉 읽지 않고) 책과의 만남을 사유폭행이 반복되는 밀실로 만들어 버린다. 이것은 책을 이해할 수 없게 만든다. 차이공간이 사라지고 독자 자신의 전횡만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해의 과정은 비판이 유효하고 내재적일 수 있는 필수적 전제조건이다. 이해는 수용과 동일시될 수 없다. 그러나 이해 없이는 수용도 거부도 창조도 불가능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해를 했다면 이제 그 이해된 것을 역사적 문맥 속으로 가져가는 일이 남는다. 그것은 "이 저자는 왜 이렇게 생각했는가?"를 묻는 것이다. 생각의 구조와 문법, 그리고 내용을 바로 그 생각을 낳는 상황과 사건 및 저자의 역사적 실천 속에서 조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책에 대한 고고학적 해석작업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저자를 둘러싼 전통과 상황, 그가 속한 사회적 계급적 사상적 위치, 저자가 설정한 문제의식, 저자의 실천적 지향, 저자가 선택하는 전략과 전술, 그것이 낳은 결과들 등을 세밀하게 조사해야 한다. 이것은 텍스트를 넘는 폭넓은 조사작업을 요구하는 것이다. 텍스트를 이렇게 당대의 물질적 비물질적 콘텍스트 속에 넣어 괄호침으로써 우리는 저자의 생각과 너무 직접적으로 부딪힘으로써 차이공간이 사라지는 유착현상을 피할 수 있다. 교조주의나 냉소주의는 이 유착이 낳은 부정적 결과들이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만약 콘텍스트를 저자의 시대로 한정해 버린다면, 책은 그저 역사적 탐방대상 이상이 아닐 것이다. 당대적 콘텍스트를 통해 괄호쳐진 텍스트는 다시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 바로 지금여기의 시간 속으로 가져와야 한다. 즉 당대적 콘텍스트 속에 괄호쳐진 텍스트가 괄호쳐진 그대로 우리 시대라는 콘텍스트 속으로 가져와져야 한다. 이 콘텍스트는 독자인 내/우리가, 우리의 시선이 그 요소로 작용하는 바로 그 콘텍스트이다. 이 콘텍스트 역시 광범위한 탐구의 대상이다. 우리를 에워싼 환경들, 그 환경들과 우리의 관계양식들, 그 내부의 모순들, 그 과정에서 우리 내부에서 끓고 있는 욕망들 등이 탐구되어야 하며 바로 이 탐구를 바탕으로 그 콘텍스트화된 책과의 만남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 이중의 콘텍스트화를 통해 "저자는 왜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했나"에서 "우리/나는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고 행할 것인가"의 대질이 가능해진다. 이해와 고고학적 해석을 거쳐 도달하게 되는 이 대질은 당연히 커다란 간극을 발생시킨다. 이 간극이야말로 독자인 나/우리가 어떤 회피도 없이 눌러앉아야 할 실천의 장소이고 새로운 시작이 이루어질 발생과 창조의 공간이다. 여기가 로두스이므로 바로 여기서 뛰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