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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하기로 한 것은 아니고 기록차원에서 제 스스로 메모만 했습니다. 여기 저기 오가느라고 너무 간단하니 누구든지 보충해 주세요 >>

 

2009년 12월 30일 7시 정각. 서현 님의 사회로 자율광장 시작.

오늘의 프로그램은 세사람의 발표로 구성되었다.

 

우선 갱 님의 '혁명의 세대, 그리움으로 정치를 사유하다'-김연수론'을 들었다.

김연수는 80년대 후반학번 쯤 되고 당시 엔엘계열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촛불집회와 91년 5월의 시위가 어떤 전환점?

-내면화 심리화되어 있는 것, 환지증과의 연결성

- space, topos 와 시간에 대한 개념 설정 검토, 이데올로기가 분절하는 space, 사유의 계기, 촉발성, 신체의 연장으로서의 장소로서의 topos, 단일한 두께 안에서 공존하는 시간으로 설정...

...

 

다음은 서현 님의 '약속의 기록:위기에서 공통의 것으로' (수유너머 r 세미나팀 옮김)요약 발표.

<조선생님의 오역지적 기록>

21p

계급투쟁을 위기의 중요한 원천으로 고려하지 않았던 19세기의 눈으로 21세기의 위기를 고찰할 수 없다.

...

 

다음은 루미 님의 '타인의 고통과 가난의 삶을 받아들이는 교육:시몬느 베이유 읽기

-은총과 축복에 대한 사유

-아름다움의 비율(수학, 기하학) 찾기

-현재의 나의 삶에 대해 지적인 사유를 통한 은총 찾기

-진정한 기쁨의 원천에 고통에 대한 깊은 사유의 존재

 

김연수의 작품 속에 나타나는 '애수'=페이소스(patos), 이 수동적인 시간은 세계와 만나는 시간, 세계와의 합일의 시간, 이는 한편 외부로부터의 폭력 즉 폭력적인 외부적 노출을 의미, 자아와 타자와의 접촉점 찾기, 중력과 은총=자본과 노동으로 재해석 가능. 죽은 노동인 자본은 합리적 방식으로 존재. 은총은 폭발적인 살아있는 노동, 자연과 기계와 관계를 맺으며 조율해 나가는 노동의 모습으로 볼 수도 있다.

금융에 관한 분석적 접근필요. 금융에 대해서는 매몰 혹은 고통으로 관계 맺고 있는 상황. 은총, 노동, 활력의 관점에서 접근해 가야 할 것. 진화되어 나가는 능력들을 포괄해 나갈 필요가 있다. 금융에 관한 적실한 접근이 매우 절실하다.  

 

아메라노, 알마, 루미, 돌민, 서현, 현덕, 루드, 성용, 갱 참가.


2009.12.18 20:26

추운 겨울의 노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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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지원 동료들과 저녁 식사를 하고 있던 중에 마포촛불연대로부터'홍대입구역 노점상과 철거용역 대치중이니 시간되는 분 홍대입구로 가 주세요'라는 문자메시지를 받고 홍대입구역으로 향했다. 홍대입구역 네거리는 공사중으로 분주하다. 횡단보도 표시가 지워진 거리에는 사람과 차들이 뒤얽혀 있다. 다시 보니 지하보도가 없다. 자유로운 영혼들의 그래피티가 볼 때마다 즐거움을 주었던 곳. 무엇으로 채웠는지 흔적도 없이 지워져 버리고 청기와주유소와 제일은행을 잇는 횡단보도가 생겨있다. 개발은 생명의 자취를 하나하나 지워나간다.

 

홍대입구역 5번출구에 도착하니 검정색 서부노련 차가 서 있고 그 뒤 쪽에 늘어선 대여섯 대의 리어카를 중심으로 노점상들이 물건들을 챙기고 있다. 이미 상황이 끝난 것이다. 그 중 한 대의 리어카에서는 한 아주머니가 남은 두부를 뭉텅뭉텅 쓸어서 아마도 싸우느라 식사때를 놓친 것으로 보이는 노점상들에게 나눠 주고 있다. 영하 몇 도의 차가운 날씨에 바람마저 세차다. 서부노련 차량 옆의 바구니에 거꾸로 쟁여져 있는 피켓이 상황을 말해준다. 다른 물건들에 뒤섞여 글자가 가려졌지만 아마도 '용역깡패 동원하여 생존권을 짓밟는 마포구청은 각오하라'는 문구인 듯하다. 예술과 문화의 지역 홍대 앞에 자본의 개발광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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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중지성 강좌정원(다지원) 자유게시판에 오른 {홍대 앞에 무슨 일이}의 한 구절이다.

마포구청에서 2억이나 들여 용역을 고용했다고 한다. 11월부터 매일매일 구청에서 고용한 용역들이 홍대 거리의 노점상을 하나씩 뒤엎고 있다. 오늘도 홍대 앞을 지나다가 어김없이 용역들과 노점상인들의 대치현장을 보았다. 길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처진 구두 발창들을 주워 담을 생각을 하지도 못한 채 멍하니 앉아있는 노점상인을 보았다. 공무원이 깡패라고, 이 얘기 좀 인터넷에 올려달라고, 먹고 살아야 하는데 우린 어떡하냐고 눈물짓는 아주머니 앞에서 할 말을 잃었다.  마포구청측의 입장은 이러하다. '디자인 거리 조성을 위해서 서교로 보도 폭을 넓힐' 계획이고 '노점은 불법이라서 단속해야 할 의무가 있다' 거리를 예쁘게 단장하기 위해서라면 못난 사람들쯤은 합법적인 방법으로 충분히 쓸어버릴 수 있다는, 그렇게 하겠다는 말이다. 더 아름다운 거리를 위해서 조직화된 폭력을 아무렇지 않게 휘두르는 일이 이 나라의 일상이 되어 가고 있다.


이 글에 나타나 있는 권력의 계획, 판단, 대책, 방법, 근거를 분석해 보고 그것을 해결할 대안에 대해 생각해 보자.

1. 마포구청의 계획: 디자인 거리를 조성하기 위해 서교로 보도폭을 넓힌다.

*권력이 예술주체가 되어 공간을 특정한 미관에 따라 디자인한다(환경디자인, 공공미술 등의 전문가와 권력의 결착).
*그것은 특정한 지역과 공간(여기서는 홍대 주변)을 정치적으로 관리하는 것이며 지역가치를 상승시키기 위한 것이다.
*오세훈의 창의시정(창조성에 입각한 도시정책, 창조성을 도시가치의 상승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이 그 정책적 논거이다.
*거리를 어떤 디자인으로 조성할 것인지를 둘러싼 미적 투쟁이 필요한 지점이다. 이것은 미학 전쟁의 영역이다.

2. 마포구청의 판단: 노점상들이 거리미관을 해치고 있고 디자인 거리 조성에 방해가 되고 있다.

*노점상은 시각적으로도 홍대 앞 거리의 독특한 풍경을 구성하며 홍대 앞을 찾는 젊은이들의 소비세계를 구성한다.
*노점상은 거리미관을 해친다는 판단은 가난을 수치로 여기면서 가난의 실재를 숨기려는 권력자와 자본가들의 세계관을 반영한다. 물론 그 가난은 자신들이 권력유지와 치부를 위해 일상 속에서 부단히 만들어내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실재를 감추면서 꾸며질 디자인 거리의 계급성은 명백하다. 그것은 허위, 기만, 화장, 환상의 디자인일 것이다. 도시를 환상여행의 공간으로 조직하려는 술책일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도시의 당당한 일원이고 거리에서 자시의 삶을 추구할 권리가 있으며 바로 그러한 생의 현실적 약동이 진정한 거리 디자인임을 주장하자. 아래로부터의, 삶으로부터의 디자인.

3. 마포구청의 대책: 노점상들을 거리에서 쓸어버린다.

* 불편한 것들을 쓸어버리기. 1980년대에 전두환 정권과 노태우 정권은 사회주의자들을 쓸었다. 지금은 노점상을 쓸어낸다. 이주노동자도 쓸어내어 뒷골목을 헤매게 한다. 유태인에 대한 싹쓸이로 유명해 졌고 인종청소의 형태로 발칸에서 다시 나타났던 이 싹쓸이의 정치는 권력의 입맛에 맞지 않는 모든 것을 쓸어버릴 위험한 사상이다.
*지금 쓸어지는 것이 삶이며 만들어지려는 디자인 거리가 무덤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알리자.

4. 마포구청의 방법: 용역을 동원하여 노점들을 거리에서 강제로 추방한다.

*용역은 불안정노동자이다. 이것은 신자유주의적 정리해고가 만들어낸 노동력 풀이다.
*용역이 용산, 쌍용 등에서 확인되었듯 재개발을 추진하고 파업을 깨고 남들이 손대기 싫어하는 일들을 해결하는 폭력조직이자 해결사로 동원되는 현실에서 용역 문제는 이제 다중들의  직접적 공동문제로 되고 있다.
*용역 대 노점상을 대결하게 하는 것은 다중 내부의 갈등을 심화시키기 위한 정치적 장치로 사용된다.
*무조건적 보장소득운동을 통해 자신의 몸을 용역으로 팔지 않더라도 삶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5. 마포구청의 근거: 노점은 불법이다.

*노점은 토지가 사유화되어 있고 국유지나 공유지조차도 사적인 것으로 이해될 때 불법으로 된다.
*토지가 사적 혹은 공적으로 소유되지 않고 다중의 공통의 공간으로 이해되는 조건의 창출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제헌능력으로 현행의 법을 불법화시키고 새로운 법을 창안해야 한다.

노 점, 용역, 구청의 관계로 나타나는 이 사안은 사실상 우리 시대의 모든 문제들이 중첩되면서 나타나는 현장이다. 이 문제에 연루되지 않은 사람들은 예술, 노동, 소득, 토지, 권력 등에 걸쳐 거의 아무도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어떻게 지역적 사안으로 나타나는 이 문제에 대한  다중의 공동의 대응을 조직할 수 있을까? 어디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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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스는 [잉여가치학설사] 435쪽에서 맨더빌(『꿀벌의 우화』원문은 다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원문; 최윤재의 번역문은 다음에서 찾아볼 수 있다. 번역문)을 "모든 직업-직종의 생산성에 관한 변호론적 견해"의 하나로, 그러나 속물적 변호론자들보다 훨씬 대담하고 정직했던 변호론으로 인용한다.

"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악이라고 부르는 것은 도덕적인 것이나 자연적인 것이나 다 같이 우리를 사회적 존재로 되게 하는 위대한 원리이며 예외 없이 온갖 직종과 직업의 확고한 기초이며 생명령의 지주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온갖 예술과 과학의 진정한 원천을 찾아 내야 한다. 그리고 악이 없어지게 되는 바로 그 때에는 사회가 완전히 파괴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조락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footnote]『꿀벌의 우화』원문은 다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원문 최윤재의 번역문은 다음에서 찾아볼 수 있다. 번역문[/footnote]

맑스는 맨더빌의 이 말을 악행이나 범죄노동이 자극하는 생산적 효과라는 문맥에서 인용한다. 물론 맑스는 범죄노동이 스미스적 의미에서(즉 가치생산적인 것만이 생산적이다는 의미에서)의 비생산적 노동임을 염두에 두면서 범죄노동의 생산성을 주장하는 변호론자들을 조롱하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용역산업의 적지 않은 부분은 범죄노동이다. 기업주들은 깡패들을 고용하여 파업을 깨거나 개발에 항의하는 사람들을 구타하고 추방하고 심지어 죽인다. 이러한 노동은 생산과정에서 분리되는 생산물을 낳지는 않지만 고용되어 수행된다. 이들은 임금을 받고 산업평화를 생산한다. 이들의 임금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이들은 잉여가치 중의 일부를 소득으로서 가져가는 것일까? 아니면 교환가치를 생산하고 그 중의 일부를 자신의 재생산에 필요한 것으로 가져가는 것일까?

[잉여가치학설사]의 맑스는 [경철수고]의 맑스와는 달리 사회적 삶을 생산하는 노동 일반을 규명하려하기보다(이럴 때는 모든 직업 직종이 생산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방직노동자뿐만 아니라 철학자 시인 목사 교수가, 그리고 범죄자뿐만 아니라 착취자가 생산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자본주의 사회를 생산하는 노동이라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힘을 규명하는 데 집중한다. 왜 사회적 삶을 자본이 지배하게 되는가, 다시 말해 자본관계를 생산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맑스의 탐구목적이다. 자본관계, 가치관계를 생산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지배적인 생산개념이며 자본주의적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만이 생산적이라고 규정할 때에만 자본관계를 극복할 잠재력에 대한 정의가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여기에서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을 구분하려는 맑스의 노력의 진의가 드러난다.

이 분화에 대한 윤리적 독해는 전자를 생산적인 것, 후자를 기생적인 것으로 보면서 전자에 혁명적 역할을 특화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경향은 맑스가 생산적인 노동과 비생산적인 것을 가르는 과정에서도 때로 나타나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좋은 노동자와 나쁜 노동자를 구분하려는 시도가 아니었다. 아니 생산적 노동자도 잉여가치생산을 통해 자본관계를 생산하므로 비자본을 추구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생산적 노동자도 나쁜 노동자다. 심지어 비생산적 노동자들이 잉여가치를 생산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자본에게는 낭비와 비용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비자본주의적이고 탈자본주의적이라고 말하는 것도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을 가르려는 맑스의 시도가 노동 일반으로부터 역사적 노동으로의 개념 전위를 통해 역사에 개입하는 이론적 방법이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이행을 노동일반에서 역사적 노동으로의 이행으로 단순화시킬 수 없다. 노동 일반은 사회적 삶의 생산활동으로 남는다. 이 속에서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분화가 나타난다. 그것은 자본관계, 즉 잉여가치 착취관계에 직접적으로 포섭된 노동과 그렇지 않은 노동 사이의 구분이다. 직접적으로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만이 생산적 노동으로 분류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노동은 비생산적 노동으로 분류된다.

이 분류와 '물질적 노동/ 비물질적 노동'은 어떤 관계에 있을까? 맑스는 비물질적 노동인 지식과 봉사가 자본관계 외부에 놓여 있는 역사적 조건에서 이 문제를 파악했다. 즉 비물질노동이 비생산적 노동과 거의 동의어인 상황에서 연구를 계속했다. 그래서 그는 비물질생산을 생산적인 것으로 간주하려는 노력 일반과 대립하면서 그것을 부르주아지의 착취에 봉사하는 변호론적 관점으로 밀어내는 경향이 있다. 지금 우리는 이 양자의 동일성이 붕괴하고 비물질노동이 잉여가치 생산적 노동으로 되고 있는 상황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음으로 비물질노동의 역사적 성격에 대한 맑스의 설명은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앞서 예를 들었던 부르주아를 위한 용역노동에 대해서는 이윤으로부터 보상이 주어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역노동 일반을 생산적인가 비생산적인가라는 기준에서 볼 수 없고 잉여가치 생산적인가 아닌가라는 관점에서 용역노동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어려움은 비물질생산과 비물질노동은 물질생산과 물질노동이 가치를 생산하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가치를 생산한다는 것에 있다. 그래서 비물질노동과 비물질생산에서 잉여가치를 확정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다. 비물질적인 생산적 노동은 노동이라는 점에서 가치화의 대상이지만 가치척도의 확정과 적용이 쉽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착취하는 자본의 입장에서도 커다란 위기에 직면한다.

비물질생산이 우세한 생산지형으로 등장하면 할수록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경계가 흐려지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자본을 위한 지식제공이나 용역이 자본가의 소득으로부터의 파생적 지불에 의해서가 아니라 임금관계, 고용관계 속에서 전개될 때, 그리고 반대로 명백하게 생산적인 노동이 고용관계 외부에서 전개될 때 생산적과 비생산적 사이의 경계확정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 모호성이야말로 맑스 탐구에 온갖 난해성과 애매함을 남기고 있는 그 조건이었던 것은 아닐까?

노동을 역사적 형태에서 고찰하면서 맑스는 (혼란을 겪긴 하지만) 처음부터 생산적 노동을 비생산적인 것보다 우월하거나 정당한 노동으로 사고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양자가 상호전제의 관계에 있다고 보았다.[잉여가치학설사, 318] 우리가 맑스로부터 일정하게 추론해 보면 자본주의라는 역사적 착취형태가 자신의 고유한 토대로 삼는 것은 물질적인 생산적 노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질적인 생산적 노동이야말로 명확하게 가시적이고 측정가능한 방식으로 임금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노동형태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발전의 전성기에 비물질적인 노동은 생산적 노동으로서는 미약하고 주변적이었고 그래서 맑스는 그것을 자신의 핵심적 분석영역으로 끌고 들어오지 않았다.[footnote][직접적 생산과정의 제 결과] 참조[/footnote] 

고유하게 자본주의적인 착취지형을 물질적인 생산적 노동으로 본다면 비물질적인 생산적 노동의 우세는 자본주의의 위기 국면을 함의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척도가 가치 생산과 축적의 기반이었다면 이제는 명령이 그것을 대신한다. 자본주의는 '경제적 사회구성체'이기보다 '정치적 사회구성체'로 변환된다. 모든 것은 정치의 지형에서 움직인다. 자본권력은 삶권력으로 전환된다. 과거에 비생산적이었던 것의 많은 부분이 이제는 생산적인 것으로 되었다. 가치생산의 지형은 확장되어 전지구적 협력체 전체로 넓어진다.

물질적인 생산적 노동을 고유하게 자본주의적인 생산기반으로 설정한다면 지금은 자본주의의 위기 국면일 것이다. 비물질적 생산적 노동의 헤게모니화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관계들에 커다란 변형을 강제한다. 사회적 삶 전체가 잉여가치 생산적으로 되면서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구분이 아니라 생산적 노동의 이중성이 더 중요한 문제로 부각된다.  

가치척도법칙의 하위법칙으로의 추락 이후 (잉여가치법칙의 확정에 온 힘을 쏟았던)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은 이 과정에 어떤 빛을 던져줄 수 있는가? 가치척도법칙의 종말 이후에 가치화는 어떤 방식을 통해 달성되고 있는가?

맑스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남는다. 대체 자본관계는 어떻게 생산되고 재생산되며 확장되는가? 그것의 기저에 남아 있는 잉여가치의 정체는 무엇인가? 잉여가치의 역사적 성격은 무엇인가? 운동과 혁명이 잉여에 대해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인가? 잉여생산활동으로서의 인간노동의 비전은 무엇인가? 노동을 그 역사적 형태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맑스의 방법론은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그럴 때 물질적 생산적 노동보다 비물질적 생산적 노동이 더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고 비물질적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을 구분하는 것이 또한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는 점이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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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제기되지만 반드시 필요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되는 근거 중의 하나는 부르주아지의 반혁명을 진압하려면 조직된 폭력이 필요하고 국가가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다.

이 이유는 파리코뮌으로부터 맑스, 엥겔스, 그리고 레닌이 끌어내고 있는 교훈들 중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도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맞을까?

이 문제에 대한 답은 반혁명의 개념과 그 역사적 변천에서 찾아야 한다. 고전적 반혁명 개념은 혁명을 억압하고 파괴하는 반동계급의 대응방식이다. 하지만 이미 그람시가 옥중수고에서 서술하고 있듯이 반혁명은 수동혁명으로 변신했다. 1917년의 프롤레타리아 혁명 이후 혁명에 대한 대응을 둘러싼 부르주아지 내부의 논쟁에서 케인즈주의의 승리가 그람시 명제의 설득력을 제공한다. 케인즈는 반혁명 방식의 변환, 즉 노동계급의 힘의 정치경제적 수용과 자본주의 발전동력으로의 활용이라는 수동혁명 이념의 원형을 제시했다. 우리는 이후 부르주아 지배전략의 역사는 수동혁명의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케인즈주의, 신자유주의는 전자는 1917년 혁명에 대한, 후자는 1968년 혁명에 대한 수동혁명적 반혁명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반혁명이 수동혁명으로 나타날 때, 반혁명은 특정한 순간에 폭발하는 공포의 대응이 아니라 계획적으로 일상속에서 추진되는 혁명의 관리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반혁명을 특정한 혁명의 순간에 나타나는 일시적 사태로 파악하는 것은 이제 부적절해진다. 지금 필요한 것은 반혁명을 진압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이 반혁명을 관리하는 것, 그것의 힘을 역전시키고 재전유하는 것이다. 이 과제에서 국가는 관리와 조절과 해체의 대상이지 그 이상은 아니다.

물론 우리는 국가가 수동혁명적 태도를 버리고 순수폭력적 기구로 전환되는 어떤 순간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아마도 혁명이 반혁명을 규율하는 과정에서의 어떤 구멍에서 이러한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고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조차 국가를 반혁명을 진압하기 위한 도구로 장악하여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일시적으로 성공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혁명을 위해 그렇게 하는 주체 자신이 바로 반혁명의 세력으로 (본의와는 전혀 무관하게) 전환하고 말 것이라는 의미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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