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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환불가능성의 철학: 비트겐슈타인과 데리다


1.

 <논리철학논고>에 나타난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언어와 실재가 교환가능하다는 주장으로 요약될 수 있을까? 이러한 요약은 성급한 것으로 생각된다. 내가 생각하기에 비트겐슈타인은 오히려 언어와 교환할 수 있는 것과 언어로 교환될 수 없는 것의 경계를 명확히 함으로써 '말할 수 없는 것'(=언어와 교환될 수 없는 것)의 중요성을 드러냈다.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실로 언표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이것은 드러난다. 그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논리철학논고>§6.522)


 이렇게 말할 수 없는 것, 신비스러운 것은 레비나스 식의 '초월적 타자성'이라고 손쉽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방식의 이해에 저항하듯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계가 어떻게 있느냐가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라, 세계가 있다는 이 신비스러운 것이다."(<논리철학논고>§6.44)


 말할 수 없는 것, 즉 신비스러운 것이 만약 '초월적 타자성'을 의미한다면, 이 세계가 있다는 것 자체가 신비할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세계'의 경이, 즉 이 세계의 교환불가능한 독특성(혹은 특이성, singularity)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언어와 세계 사이에는 공통의 논리구조가 있지만(§4.014) 이러한 잠재적인 이념은 세계의 특이성을 배제하지 않으면서 현실화된다. '전체로서의 세계'는 명제에 의해 완전히 규정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명제가 있다면 이러한 명제가 재현하는 사실은 사실들의 총체로서 세계의 안에 위치해야 하는데, 세계의 안에 있는 사실이 세계 전체를 완전히 규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한계 지어진 전체로서의 세계에 대한 느낌은 신비스러운 느낌”(§6.45)이라고 말한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세계'는 이렇게 명제에 의해 완전히 규정될 수 없다는 점에서 일종의 '고유명'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전체로서의 세계'는 다른 말에 의해 완전히 교환되거나 대체될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자아 혹은 주체 또한 '말할 수 없는 것', 그러나 '드러나는 것'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이러한 '형이상학적 자아'는 교환불가능한 자아, 독특한 자아, 혹은 특이한 자아라고 볼 수 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필연적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생각하고 표상하는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5.631).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아주의가 뜻하는 것은 전적으로 옳다"(§5.62). 이것은 자아가 사고나 표상으로 대체(교환)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이 옹호하는 유아주의가 엄격하게 관철되면 그것은 순수한 실재주의와 합치되며 이러한 관철에 의해 자아 혹은 주체가 "연장 없는 점으로 수축"(§5.64)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선적으로 이것은 ‘주체’ 혹은 ‘자아’가 하나의 특이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트겐슈타인은 “세계가 의 세계”(§5.62)이며 “의 세계”(§5.63)라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모순을 뜻하는가?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이 ‘’라고 부르는 것과 그가 ‘자아’, 또는 ‘주체’라고 부르는 것을 엄격하게 구별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이 ‘나’라고 부르는 것은 일상적 자아이고 ‘자아’ 혹은 ‘주체’라고 부르는 것은 독특한 형이상학적 자아이다.

 철저한 유아주의에 의해 일상적 자아는 세계와 동일시될 수 있으며, 즉 “세계는 나의 세계”이고 “나는 나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으며, 이러한 환원에 의해 “유아주의는 순수한 실재주의와 합치”되는데, 이러한 환원에 끝까지 저항하는, ‘연장 없는 점’으로 수축된 독특한 자아가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주체는 세계에 속하지 않”고, 그것은 “세계의 한계”(§5.632)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자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철학적 자아는 인간이 아니며, 인간 신체가 아니며, 또는 심리학이 다루는 인간 영혼도 아니다."(§5.641)


 즉 철학적 자아는 인간이라는 일반적 개념의 특수한1) 예가 아니며, 우리의 신체나 영혼으로 환원, 대체, 교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이러한 환원, 대체, 교환에 끊임없이 저항하는 특이점으로서의 자아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처럼 <논리철학논고>를 통해서 말할 수 없는 것, 즉 독특성(혹은 특이성,singularity), 교환불가능성을 옹호했다고 볼 수 있다.


2. 

 데리다의 '차연', 혹은 '차이'의 철학 또한 교환불가능성의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차연' 혹은 '차이'는 우리의 개념으로의 환원화/번역 작용에 저항하는 그 무엇이 끊임없이 도래한다는, 즉 사건이 독특성으로서 끊임없이 도래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로서는 긴급성과 차이(차연) 사이에 어떤 대립이 존재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와는 정반대라고 말해야 할까요? 차이(차연)은...따라서 긴급하고 예견불가능한 것이기도 한 도래하는 것, 도착하는 것과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사건, 사건의 독특성, 바로 이것이 차이(차연)입니다." (자크 데리다, 베르나르 스티글레르, 김재희, 진태원 옮김, <에코그라피>(민음사, 2014),pp34~35)


 사건은 바로 이러한 독특성 때문에 개념이나 일반성으로의 번역/환원/교환이 불가능하다. 만약 이러한 번역/환원/교환이 가능해지면 그것은 더 이상 '사건'이 아니라 기호적이고 인공적인 조작의 대상이 되어버릴 것이다.

 따라서 데리다의 철학도 '교환불가능성의 철학'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비트겐슈타인과 데리다의 철학이 만나는데, 그것은 이 둘의 '독특성'(교환불가능성)에 대한 강조가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독특한 철학적 자아가 인간이 아님을 강조했고, 데리다는 타자를 개념의 질서에 굴복시킴으로써 '전유'하고자 하는 인간/주체 중심주의를 '차연' 혹은 '차이'의 철학을 통해 분쇄시켜 버린다.

교환불가능성, 혹은 독특성(singularity)은 자아, 시스템, 영토의 내면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외부성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독특한 형이상학적 자아는 일상적 자아의 내면성에 끝까지 저항하는 특이점이고, 데리다가 말하는 사건의 독특성 또한 언어체계나 영토 등의 내면성에 종속되지 않는 그 무엇이다.

 이러한 독특성은 '고유성'과 구별되어야 하는데, 고유성은 자아나 체계의 하나의 속성이나 성질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독특성은 이러한 자아나 체계의 속성이 아니며 따라서 적극적인 그 무엇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차라리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의 말대로 '세계의 한계'이며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데리다는 이러한 독특성을 '유령성'의 일종으로 보고 있다.



1)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참조, 특수성-일반성의 짝은 교환가능하고 대체가능한 개체들과 이러한 개체들을 규정하는 일반적 개념이 짝을 이룬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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