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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통을 발명하고 보호하라
『자본과 정동』서평


김의연(대안기획 연구모임)



* 이 글은  2014년 6월 3일 인터넷신문 『참세상』에 게재되었습니다.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category2=137&nid=78465



더 이상 안전한 거처는 없다


3백여 명의 소중한 목숨을 허망하게 앗아간 대참사 앞에서 온 사회가 비탄과 자괴감의 수렁에 빠져든 후로 정확히 한 달 보름의 시간이 흘렀다. 세월호 뱃머리가 수면 아래로 사라지는 광경을 화면으로 지켜보던 사람들 대다수는 저마다 눈을 의심하면서 국가의 무능함과 비정함에 몸서리를 쳐야 했다. ‘침몰하는 대한민국호’라는 표현은 이제 익숙하다 못해 식상한 비유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지난 날 시민 대다수가 국가의 정책적 선의나 시혜에 크게 미련을 두어 온 것도 아니었다. 지난 20여 년간 ‘전 국민의 1인기업화’라는 살벌한 구호가 온 사회에 유일한 생존의 논리로 강요되어온 탓이다. 그 사이 많은 사람들은 각자도생에 매달리느라 국가가 자신의 사회적 권리를 보호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일찌감치 접어 버렸다. 승자독식의 논리에 발 빠르게 적응한 일부는 아예 치부책으로 무장한 호모 에코노미쿠스로 변신해서 국가의 머리 꼭대기 위에 올라앉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두가 자신과 국가 사이를 연결하고 있다고 믿었던 실낱같은 끈, 즉 국가가 적어도 ‘공중’의 안전에 관한 한 보호막이 되어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마저 속절없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다시 켜진 촛불은 국가와 자본의 결탁 앞에서 극도의 사회적 무권리 상태를 강요받고 생명의 위협마저 감내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무기력한 자화상을 반추하는 성찰의 물결을 이루고 있다. 우리의 사회적 거처들이 더욱 안전해질 때까지 촛불은 꺼지지 않아야 한다.


일상화된 위기


최근 출간된 크리스티안 마라찌(Christian Marrazzi)의 <자본과 정동>(갈무리, 2014)은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총체적 위기의 원인과 의미를 더듬어 볼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스위스 태생의 자율주의 경제학자이자 주요 사상가 중 한 사람인 마라찌는 그동안 <자본과 언어>(갈무리, 2013), <금융자본주의의 폭력>(갈무리, 2013)을 통해 한국의 독자들과 접촉을 넓혀 왔다. 그러나 한국어판 출간의 순서와는 달리 1994년 스위스에서 출간된 <자본과 정동>은 크리스티안 마라찌의 3부작 가운데 첫 번째 저작에 해당한다. 


<자본과 정동>은 1990년대 초반의 경제위기를 배경으로 포드주의에서 포스트포드주의로의 이행이 초래한 변화를 다각도로 조망하고 있다. 마라찌는 경제이론, 정치이론, 사회이론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복잡다단한 금융시장 메커니즘과 변화무쌍한 경제정책들의 효과를 다루며, 비상한 통찰력으로 금융자본주의 하에서 부단히 반복되는 위기의 본질을 냉철하게 분석한다. 경제조직과 정치적 통치형태들의 변화를 씨줄날줄로 연결하는 그의 분석 속에서 오늘날의 금융위기는 예측 불가능한 이례적 상황의 산물이 아니라 자본 축적의 불가결한 구성요소이자 그 메커니즘이라는 사실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정동 노동의 착취


그러나 마라찌의 독자적 기여는 무엇보다도 포스트포드주의 경제 시스템과 정치적 형태의 변형을 언어적 차원과 결합시킨 해석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마라찌는 언어를 “생활세계에 한계와 금지를 부과하는 구조”로 파악하지 못하는 하버마스의 ‘소통 행위’ 이론이 지닌 한계를 비판하면서 포스트포드주의 하에서 언어가 갖는 의미를 발본적으로 사유한다. 하버마스의 소통 행위 이론은 체계와 생활세계를 병렬시킨 다음 후자를 권력의 진공 상태에서 벌어지는 언어 게임을 통해 자유로운 합의가 도출될 수 있는 공간으로 특권화하는 ‘정치적 순진함’으로 귀결된다. 따라서 하버마스의 생활세계 분석은 필연적으로 생산 행위의 문턱에서 멈출 수밖에 없으며, 생산 영역과 불가분하게 연결된 정치적 변화들에 대한 근본적 이해를 가로막는다. 


포드주의 시스템이 조립라인 노동자들에게 침묵을 강요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포스트포드주의 하에서는 소통과 생산이 융합되고 사실상 동일시됨에 따라 도구적 영역과 소통적 영역의 경계를 날카롭게 구획하던 전통적 이분법도 모호해진다. 따라서 오늘날 자본의 지속적인 축적은 생산자들의 육체적 노동 능력이 아니라 언어 능력과 정동을 여하히 착취하느냐에 달려 있다. 자본은 생산과정에서의 잉여가치 추출 단계는 물론 ‘실현’의 단계, 즉 잉여가치를 화폐화하는 국면에서도 노동자들의 언어 능력에 불가피하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위기의 사회적 결과들


소통이 생산에 틈입할수록 포드주의 정치형태들 역시 점점 더 격렬한 위기와 복잡한 변형의 압력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포스트포드주의 체제로의 전환은 정치의 행정으로의 대체와 더불어 의회제도를 비롯한 전통적인 대의제도들의 위기를 수반한다. 오늘날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 하에서 ‘정치계급’의 무능력을 질타하고 혐오하는 분위기가 고조되는 반면 기업가의 위신이 상승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사회적 소통의 능력과 흐름을 포획한 기업이 도구적 행위와 소통적 행위 양편의 주체를 자임하기 때문이다. 기업가 스스로 대의민주주의에 전형적인 경제적 영역과 정치적 영역 사이의 간극을 매개하고 조작함으로써 통치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베를루스코니의 집권을 포스트포드주의의 거버넌스 실험들 가운데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하나의 에피소드로 간주하는 저자의 해석은 보기 드문 탁견이 아닐 수 없다. 마라찌의 해석에 비추어 본다면 멀게는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정치적 수사를 통해 권력을 획득한 클린턴 정부와 가깝게는 집권 기간 내내 ‘부민덕국’ 담론을 내걸었던 이명박 정권의 통치 전략 역시 부단히 변화를 거듭하는 포스트포드주의적 정치 실험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마라찌는 더 나아가 언어 과정들, 따라서 정신활동 그 자체가 자본주의적 가치화의 과정에 종속되는 양상에 주목한다. 생산과 소통의 융합 속에서 언어는 직접적인 생산력으로 전화된다. 소통적인 생산 능력의 전유를 보장하는 과정에서 권력은 날이 갈수록 삶의 형태, 사회 공동체의 구체적 신체에 대한 명령으로 정의된다. 소통과 상호주체적 관계들에 노동을 강제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정동, 나아가 삶 전체에 노동을 강제하는 것이다. 


그 결과는 지금껏 우리가 현실에서 숱하게 목격해 온 바와 정확히 일치한다. 포스트포드주의적인 경기 순환의 주기는 갈수록 단축되고 그 파급력은 훨씬 더 강력해진다. 화폐화 과정의 내재적 모순들은 실시간대에 전 지구적 차원으로 확산되고, 기술적·금융적 미봉책들은 절대 다수의 노동자들에게 극도로 유동적인 가치창출 및 실현 과정에 매순간 적응할 것을 요구한다. 더 나아가 저스트인타임 생산 시스템은 고용 불안과 만성적 실업에 시달리는 사회적 개인들을 포스트포드주의적인 부채 노예로 전락시킨다. 이러한 메커니즘들을 통해 부자와 빈자 간의 사회적·경제적 격차는 날이 갈수록 증가하고 과거에는 공적인 것으로 간주되던 다양한 부문들이 사적 자본의 수중으로 차례차례 양도된다. 심지어 긴급한 재난에 처한 시민들에 대한 구호 기능마저 비밀스런 거래를 통해 보험사와 사적 기관의 돈벌이 수단으로 속속 전환되고 있다. 


평등한 삶을 위한 투쟁과 합리적 중재의 공간을 열어 나가기


마라찌가 그리는 대안은 무엇일까? 그는 시민사회를 속류화된 행위자가 아니라 헤게모니 투쟁의 전장으로 간주하는 그람시의 시민사회관을 전유한다. 언어의 가치화와 정동에 대한 착취를 둘러싼 일상적 투쟁이 벌어지는 공간 내에서 공통의 파괴에 대항하고 공통을 창출하며 보호하는 활동을 강조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마라찌는 주변화된 사회적 개인들의 사회적 정치적 권리들을 방어하기 위한 새로운 시민권의 형태들과 대의의 층위들을 적극적으로 탐색할 것을 요구한다. 다시 말해 다양한 사회적 주체들의 소통적 복수성과 자유를 보장하면서 이들 주체가 보다 평등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투쟁과 새로운 합리성에 입각한 중재의 공간을 발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 책에서 다루어진 내용들이 어느덧 우리에게 익숙해져 버린 ‘사회적 사실들’에 대한 재확인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비칠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짧은 책의 미덕은 정형화된 이론들의 타당성을 테스트하기보다는 포스트포드주의적 변형의 성패에 목을 걸고 있는 주류 경제학자들과 비즈니스계의 ‘거물’들이 제시하는 주장에 대한 ‘내재적 비판’을 통해 새롭게 등장하는 사회경제 시스템의 본질을 해부한다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태리어판 <자본과 정동>이 출간된 이후로 상당한 시일이 흘렀지만 이 저작의 생명력이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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