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을 위한 인문학 강좌 넷째마당] 동학 시천주(侍天主) - 하늘님 모심
신분제를 무너뜨리다
 
1905년 12월 1일은 일제로부터 핍박을 받던 ‘동학’이 동학이라는 이름으로 조직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어서 ‘천도교’라는 이름으로 바꾼 날이다.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결과이지만, 동학 운동가들은 천도교라는 이름으로 사회 운동을 넘어 근대적 종교 체제를 통해 영성과 사회적 변화를 동시에 추구하는 조직으로 거듭나길 원했다.

서구 문명이 이성과 합리성에 기반을 두면서 선과 악의 구분이 명확했고, 동시에 문명과 야만의 구분도 명확했다. 선과 문명으로 상징되는 서구 문명은 야만과 봉건, 악으로 규정된 문명에 대한 공격을 서슴지 않았다. 전 세계가 이성의 폭력에 맞서 싸워야 했고, 자기 가치를 갖지 못한 문명은 힘없이 무너져야 했다. 아마 조선 후기에 동학이 없었다면 우리는 서구의 기준으로 근대를 맞아야 했을 것이다. 동학은 1860년 수운 최제우 선생에 의해 시작된 이후 1894년 동학 농민혁명이 일어나기 까지 단 30년 정도의 기간 만에 당시 조선 인구의 1/3 이상을 조직했다. 도덕적 정당성과 사회 개혁의 의지를 상실한 양반 계급과 국가를 대신해 사람을 하늘님으로 대하면서 신분제를 무너뜨렸고, 여성이 중심이 돼 어린이를 존중하는 새로운 사회를 스스로의 힘으로 열어냈다. 이후 조선의 근대화 과정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국가 개혁조치는 대부분 동학 운동의 수용일 뿐이다.

수운은 이런 혁명적 변화 과정을 ‘시천주(侍天主)-하늘님 모심’이라고 했다.

수운은 시천주 운동의 과정에서 겪어야 할 고통을 충분히 알고 있었고, 그 스스로 담대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그의 제자들은 삶과 죽음을 넘어선 존재들로 이후 조선 사회 변화의 핵심 세력이 되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근대를 여는 것과 근대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어떤 차이가 있는 지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조선의 지배 질서는 제사에 의해 유지되는 면이 있었고,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위해 살아야 할 정도로 허례허식의 문제가 삶을 억압하고 있었다. 제사의 개혁은 시대 과제 중 하나였다.

조선에 들어온 기독교는 제사의 폐해와 시대 과제를 인식하고, 상당한 부담을 각오하며 제사를 우상 숭배로 지목하고 철폐하면서 조선 사회와 대립했다.

동학은 ‘향아설위(向我設位)’라는 새로운 제사법을 창안한다.

유교의 제사가 위패를 벽에 세우고 벽 너머에 있는 조상 영혼께 드리는 제사였다면(향벽설위向壁設位), 동학은 ‘조상의 영혼이 지금 이곳에서 나와 아이들 속에 숨 쉬고 있다’고 생각하고, 가운데 둥근 상을 놓고 서로 절하고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으로 ‘나와 가족, 이웃을 섬기는 것이 조상을 섬기는 것’이라는 새로운 해석을 내 놓는다. 제사를 존중하면서 동시에 사람들의 삶을 살린 것이다.

동학은 150년 전 이 땅의 지식인과 농민들이 외부에서 오는 폭력적 근대(외세)에 저항해 우리 현실과 국제적 사회 관계의 변화를 정확히 읽고 사회 변화의 길을 제안한  우리 속에서 나온 우리의 인문학이다.  김재형 죽곡농민열린도서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