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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람시<옥중수고1> p.87~123

발제문 조회 수 414 추천 수 0 2018.01.20 16:01:44

다지원 [그람시의 옥중수고 1] 서설 2018120발제자: 김아리

텍스트: 안토니오 그람시, 그람시의 옥중수고 1, 거름, 2004, 87~123

 

 

그람시 지도 하의 PCI(1924~1926)

1.1. 그람시가 PCI를 이끌었던 2년의 정치적인 상황을 보면,

(그람시가 옥중에서 쓴 기본적 정치저작들을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1924년 초부터 코민테른의 정책과 정치활동은 갈수록 러시아 당 내 투쟁에 얽매였으며, 1927년부터는 러시아의 발전이 코민테른 활동에서 규정적 요인이 되었다. 1924~26년은 이행국면이었으며 이 기간 동안 개별정당인 PCI는 아직 독자적 활동영역이 많았다. 또한 19246월 제 5차 코민테른 세계대회 후 코민테른이 취한 전술적인 좌경화PCI좌익주의가 맞아 떨어져, 코민테른과 PCI의 전략이 일치하게 된다.

1925년 영국에서는 맥도널드, 프랑스에서는 에리오의 퇴각, 독일에서의 힌덴부르크의 정권정악과 KPD 탄압, 이탈리아에서의 무솔리니 정권의 새로운 안정, 폴란드와 에스토니아에서 사태의 반동적 선회 등의 상황 변화 후 코민테른은 자본주의의 일시적 안정화를 이야기하면서 그간의 좌경적 선회를 역전시켜 버린다. 그러나 이탈리아 당의 노선에는 그에 상응하는 우경노선이 없어 그람시의 구속이후에도 계속된다. PCI가 독자적인 활동방향을 견지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코민테른 내부의 복잡한 권련관계 때문이었다.

이 기간 내내 의장이던 지노비예프는 1924년에는 스탈린과 제휴하여 트로츠키의 반농민적정책을 공격했다가 26년에는 트로츠키와 제휴하여 스탈린과 부하린의 친농민적정책을 공격했다. 1925년 초부터 코민테른 안에 부하린 우파가 부상하기 시작했는데, 1924년에 코민테른 대표로 이탈리아에 와서 타스카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던 드로츠는 인터내셔널 라틴지구를 맡기 위해 모스크바로 돌아갔다(1925)가 부하린과 가까운 그는 1929, 부하린과 함께 숙청된다. 지노비예프와 부하린 우파의 권력투쟁으로 인해, 독일, 이탈리아에서는 좌경적정책과 중국, 미국, 영구,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우경적정책이 공존할 수 있었다. 각 나라의 정책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국제적인 요인보다는 국내적 요인이었다.

1.2. 1923년 말, 지노비예프와 스탈린읜 트로츠키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였고 지노비예프가 지원하던 브란들어의 독일공산당의 폭동적 봉기가 실패하자, 브란들러를 속죄양으로 삼고자 했고 트로츠키와 라데크는 브란들러가 모든 책임을 혼자 떠맡는 것을 반대했다. 그러나 독일공산당 좌파는 우익편향을 비난하며 주도권을 잡았고 지노비예프는 코민테른이 전적으로 좌경화하는 것을 주도했다. 공개적으로 된 당 내 싸움에서 러시아 당 다수파는 러시아당 반대파가 국제적 동맹자를 얻지 못하게 하기 위해, 보르디가를 코민테른의 지도부로 끌어들이고자 했다. 또한 지노비예프는 PCI 내부 분열에 대한 최선의 해결책으로 중앙파와 좌파의 연합으로 보았고, 독일에서의 패배 이후, 전술적으로 좌경화한 결과이기도 했다. 그러나 보르디가는 국제적 소수좌를 조직하기 위해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지위는 받아들이려 했으나 PCI 내에서의 지도부 자리를 거부했다. 5인터내셔널의 노선이 밑으로부터의 통일전선, 파시즘과 사회민주주의 각각에 대한 양면적 투쟁(그람시의 지도부는 그 후 계속해서 이 노선을 견지)’으로 전환되었음에도 조직적인 측면에서 보르디가는 고립되었다.

1.3. 19246월 말, 5차 코민테른 세계대회에서 보르디가와 톨리아티의 파시즘과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보고를 통괄해 지노비예프는 파시즘과 사회민주주의는 (적어도 그 지도자들에 관한 한)근대자본주의의 오른손과 왼손이다라며 파시스트와 사회민주주의자가 무엇을 하든 어느 쪽으로 가든 그들은 단지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수차에 물을 대줄 뿐이라고 했다.

1.4. 세계대회 이후, PCI의 중앙위원회와 집행위원회 지명 때, 중앙파는 양 기구 모두에서 다수파가 되었고 우파와 이제 입당한 3인터내셔널파가 각각 소수파를 차지했다. 두 달 후 그람시(중앙파)는 당의 선출된다.

1.5. 표면 상 좌측으로 기울어진 제 5차 코민테른 세계대회의 정세분석은 PCI의 중앙파와 좌파가 주장하는 것과 대체로 일치하여 이탈리아당과 인터내셔널 사이의 균열이 메워졌다. 그러나 이에 대한 그람시의 평가는,

19242월 그람시는 인터내셔널의 좌경화를 믿지 않았고 독일패배에 대한 지노비예프의 브란들러는 우익주의자다.’라는 해명을 거부했다. 독일 당내에서의 분파 역시 어느 쪽이 우익이고 좌익인지의 문제가 아니라 비잔티니즘(어떤 이론적 문제에 대해, 그것이 특정한 실천과 상관없이 그 자체로 가체를 지닌 것인 양 취급하는 퇴행적 경향. 그람시의 규정)이라고 넘겼고 이 당시 대체로 러시아 좌파의 관점에 동조했다.

“191711월 레닌과 다수파가 정치적 권력뿐만 아니라 경제적 권력까지도 장악해야한다는 트로츠키의 견해로 옮겨 갔을 때,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여전히 전래적인 당의 관점에 빠져서 혁명적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했다. 최근 러시아에서 일어난 논쟁을 보면, 트로츠키를 비롯한 대부분의 좌파가 레닌이 당 지도부에 오랫동안 참여하지 못하는 동안 혁명에 해를 입힐 낡은 입장이 부상할 위험이 있다고 걱정해왔으며, 당생활에서 더 큰 프롤레타리아적 요소의 개입과 관료주의 권력의 감소를 요구한 것은 기본적으로 혁명의 사회주의적·프롤레타리아적인성격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으며 아울러 발전된 자본주의 껍데기인 민주주의적 독재로 점차 이행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1.6. 1924년 봄 이래, 각 국의 코뮤니스트당은 러시아 당 다수파와 제휴하라는 압력이 가해지는데, 그람시 역시 초기에는 전술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이나 네 가지의 서로 연관된 주요 요인으로 인해, 1926년에 이르면 이 제휴에 확신에 찬 것으로 보인다.(<옥중수고>에도 반영)

러시아 당 내 투쟁의 도구가 되어버린 코민테른을 통해, 해외 코뮤니스트들에게 러시아 당 내 투쟁에 관계된 제안사항이 전달되었다.

그람시는 새로운 중앙파 지도부의 기초로 삼은 것은 코민테른과의 마찰 해소와 국제적 기강의 완전한 승인이었고, 이를 보르디가파와의 차별점으로 두었다.

러시아 반대 파의 주장과 이탈리아 당 좌파의 주장은 192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었다.-보르디가와 트로츠키는 당의 기강과 분파의 형성과 관련하여 비슷한 문제를 일으켰다.

그람시의 국내전략은 남부의 농민쪽을 지향하여 노동자·농민의 동맹을 강화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 이와 관련해 1926년 러시아의 합동반대파의 입장이 위협이 된다고 보았다.

1.7. 19246월 사회민주주의 지도자 마테오티 암살 사건 이후, 잠시 반파시즘 세력이 신망을 얻고 그람시 지도부도 당세를 강화시킬 기회를 얻지만, 이탈리아에서 공개적인 존재를 유지할 수 있었던 나머지 2년 동안 PCI는 극도로 불리한 상황에서 수비적인 활동으로 일관한다.

1.8. 그람시조차도 파시즘적 현상에 대한 일관되고도 적합한 이해를 견지하지 못하고 1924년 전에는 파시즘은 사회민주주의적 방식으로 대체될 수도 있다고 했으며 그렇게 되면 프롤레타리아 혁명 또한 가까워 질 것이라 믿었다.

1.9. 마테오티 살해 이후, 반대당들이 국회에 보이콧 실시, 아벤티네에서 별도의 집회를 가졌고 PCI도 여기에 참석한다. 이 위기상황은 비타협적인 파시스트 도당이 더욱 독재적 정권을 수립하거나 파시스트와 반대당들 사이에 타협이 이루어 지는 방향으로 갈 수 있다고 예측하고 그람시 역시 대중투쟁 없이는 파시즘을 몰락시킬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1.10. 그 후, 그람시는 민주주의적 반대당들이 여전히 민중적 반파시즘의 축이라는 것을 인정했으나 그 당들은 타도되야 하며, 아반티네 반대파를 준파시스트라고 했다. 그람시는 파시즘이 해체되고 있다고 보는 상황에서 자본주의 국가의 실질적인 세력들이 반대당으로 넘어갈 것이고 따라서 그들이야말로 주된 적이라는 신념에서였다.

1.11. 이런 상황에서 PCI의 전략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다수파를 장악하는 것으로, 직접적인 목표로 공장평의회 창설을 선택했다.

1.12. 이 시기 그람시가 배제한 관점 2가지 (파시스트 정권의 힘과 내적 발전 가능성을 과소평가했다는 한계가 있다.)

파시즘과 프롤레타리아독재 사이에 어떠한 이행국면도 있을 수 없다(극좌적 관점-세번째 시기의 특징적 관점)

당분간 코뮤니스트의 목표는 파시즘에 대한 투쟁과 부르주아 민주주의 회복에 한정-사회민주주의자와의 투쟁도 보류-파시즘과 프롤레타리아독재 사이에 안정된 이행국면이 있으리라는 전제(극우적 관점-1927~28년에 이르는 기간을 대표하는 관점)

: PCI의 반합법적인 상태의 2년은 바로 이러한 상황판단의 실패로 인해 규정되었고 그람시의 이탈리아 잔류로 인해 구속되는 결과도 이러한 잘못된 상황판단이 원인이 된다. (PCI 외에도 다른 반대당들 역시 비슷한 판단오류를 하고 있었다.)

1.13. PCI 의원들이 국회로 돌아온 것도 당의 기대대로 파시즘이 붕괴될 경우, 아반티네 반파시즘파를 상대하기 위해서였고 그들은 여전히 밑으로부터의 통일전선 이외의 구상은 거부했다.

1.14. 1924년 말, 마테오티의 죽음이후 PCI는 당원 수가 증가하고 여전히 압도적으로 노동계급의 당이었으며, 10월 혁명에 뒤이어 자본주의의 세계적인 패배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 이 시기까지도 당 조직 전체에서 좌파가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보르디가가 여전히 동맹들의 다수를 장악했다. 당 지도부 역시 보르디가의 부르주아의 반혁명은 혁명의 불가피성에 대한 증거이다.”라는 말에 동조한다.

1.15. 5차 코민테른 세계대회에서 러시아의 당 내 투쟁이 표면상으로 그쳤으나 1924년 트로츠키가 <10월의 교훈>을 펴냈을 때, 당 내 투쟁은 다시 시작되었고 바로 직후, 보르디가와 트로츠키가 제휴했다. 이 제휴로 그람시와 PCI 지도자들은 러시아의 당 내 투쟁을 자신과 보르디가와의 갈등과 떼어 생각할 수 없었다.

1.16. 19252월 보르디가는 트로츠키의 세계적인 발전의 전망’(점증하는 미국 자본주의 힘과 확대되는 미국의 유럽에 대한 헤게모니)에 대해 지지발언을 했고 그람시는 이를 반박했다. 그람시의 지적대로 스탈린은 바로 몇 주 전 처음으로 일국사회주의론을 제창한다.

1.17. 이 시기의 코뮤니스트 정당들이 볼셰비키화되고 러시아 당과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당 내 분파문제가 커지고 있었고, 그람시는 코뮤니스트 정당의 볼셰비키화는 레닌주의적 안정화를 뜻한다고 말하고 보르디가의 입장은 세계조직에 합류하기를 거부하는 지역주의적 경향이라고 규정했다.(보르디가 역시 그람시의 전략이 혁명문제를 일국적 측면에서만 보는 지역주의적 경향이라고 오래전부터 규정해 왔다.)

1.18. 1925년 트로츠키를 지지하는 보르디가의 글과 스탈린의 종용으로 트로츠키를 공격하는 내용을 쓴 스코치마로의 글이 7<우니타>에 함께 개재되었으나 그로 인해 논쟁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이 시기에 트로츠키는 소련의 당 내 투쟁에서 빠져 나왔으며 스탈린·부하린 파와 지노비예프·카메네프 파 사이의 불화가 급히 부상했다. 그람시는 이러한 코민테른의 일반적인 경향에 대해 반대했다. 그는 제 3차 당 대회의 날짜를 발표하며, 당 내의 문제 뿐 아니라, 노동자 농민의 동맹 등 더 본질적인 문제를 두루 검토하기 위해 사전 화합을 가지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1.19. 1925년 한 해 동안 파시스트 정권의 독재성은 강화됐으며, 그람시는 파시즘은 부르주아지에게 계급의식과 계급조직을 안겨주었다고 말했고, 이 정권이 빠른 시일 내에 무너지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예측했다. 새로운 탄압의 상황에서 PCI는 더욱 좌경화되었고 그람시는 계속해서 PSI와 그것의 대중지배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지속적으로 노동자·농민 위원회슬로건을 가지고 캠페인을 벌였다.

1.20. 1925년부터 당 지도부가 지속적으로 체포되었고, PCI 활동의 주된 초점은 노동조하븨 자율성을 위한 투쟁에 맞추어졌다. 10월이 되자 고용주 동맹은 파시스트 조합과 협정을 체결하고 오직 조합만이 단체교섭권을 인정받고 내부위원회는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CGL도 이미 존재가 희미하나 개량주의적 지도자들은 벌써 완전한 해체를 준비했다. PCI의 전략은 자율적 공장위원회를 설립하는 것과 그람시의 표현대로 노동조합운동이 우리 통제 하에 다시 태어날 수 있게끔 하기하기 위해 CGL의 독립성을 수호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전략은 중앙위원회에서 타스카와 충돌하게 되고, 타스카는 PSI에 좀 더 적극적인 자세를 취할 것과 CGL의 개량주의적 지도자들과 함께 남은 노동조합의 독립성을 수호하기 위한 공동투쟁을 하자는 주장을 했다.

1.21. 192511월 반합법적 존재가 인정된 사회당과 공산당의 기관지 <아방티><우니타>를 제외한 모든 야당계 신문이 분쇄되어 파시스트의 통제 하에 들어간다. 이러한 상황에서 코민테른은 다시 통일전선정책을 진지하게 추구하라고 권고하고 1926년 내내 그러한 권고에 저항했다.

1.22. 1925년 가을동안 코뮤니스트들에 대한 검거가 진행됨에 따라 제 3차 전국대회를 준비하던 기간동안 당은 거의 완전히 재조직되어야 할 형편이 되었다. 1925년 동안의 당이 이룩한 성과는 어려운 상황에서 당원 수를 지속적으로 유지했는데, 노동계급 당원이 상당한 정도로 상실되었으나 그 결손부분을 농민부분에서 보강했기 때문이다.

1.23. 1925년이 말쯤이 되자 당 지도자들은 상황이 변화됨을 각성하고 그람시는 당 대회의 테제와 남부문제에 대한 전략개념을 수립하기 시작한다. 새로운 전략개념의 기본요소는 파시즘은 이탈리아 지배계급은 성공적으로 통일시켰으나 경제적 모순은 여전히 남아있으므로 점차 파시스트 블록으로부터 중간층(특히 남부)이 떨어져 나올 것이며, 이러한 전망은 북부 프롤레타리아트와 남부 농민 사이의 동맹을 새로운 방식으로 전개 시켜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1.24. 19261031일 무솔리니의 피살시도가 있었고 이는 새로운 탄압의 구실이 되었다. 당은 그람시의 스위스 망명을 계획했으나 그는 떠나지 않았다. 아벤티네 의원들만이 면책특권을 상실할 위험에 처해 있다고 믿었으며, 새 법안을 심의하기 위한 국회에 코뮤니스트 의원으로 참여하겠다고 결정했다.

 

감옥

2.1. 1927, 28, 당에는 지하활동을 하는 소수의 헌신적인 당원 6,000여명만 남고 이후 1934년에 이러 그 숫자는 2,500명 정도로 산정된다. 당시 지도부는 해외로 망명한 상태였고 부하린이 코민테른을 지배하던 시기에 지도부의 핵심은 톨리아티, 그리에코, 타스카 등이었다. PCI 내부는 청년조직과 좌익반대파가 부상하는 세번째 시기(1929년 이후 PCI가 좌경화한 시기)’의 당 노선을 예고하고 있었다. 코민테른 역시 좌경선회가 일어나 부하린과 우파가 분쇄되었고 당시 모스크바에 있던 PCI 대표 타스카는 그러한 처사에 반대하다가 제명되었다.

2.2. 1928~29년에 나왔던 슬로건(파시즘에 대한 인민혁명’, 인민혁명 뒤에 이을 이행국면’, 이행국면의 중간목표로서의 공화국 의회’) 대신에, 이탈리아에 일기 시작한 혁명의 파고, 파시즘의 임박한 붕괴, 개량주의의 사회적 기초의 소실, 파시즘과 프롤레타리아 독재 사이에 이행국면이 개재할 수 없다는 것 등을 이야기했다.

2.3. 정치위원회 내부에서 반대파가 부상하여, 위원 8명 중의 3명인 레오네티·트레소·라바촐리니는 핵심지도부(타스카)의 우익노선을 좌익노선으로 전환하는 것은 기회주의 적인 것이라고 주장하고, 당의 자기비판을 요구했다. 이 셋의 주장은 모순적인 주장을 하여 큰 힘을 얻지는 못했지만 지하 당 조직, 지하 신문 발행, 코뮤니스트 노동조합 작업에 책임을 맡고 있었는데, 좀 더 대중적인 성격의 지하조직을 수립하자는 제안을 했다가 패배하였고 이후 트로츠키와 연계를 맺다가 제명되었다.

2.4. 당이 좌경선회한 이후 당 지도부는 산산조각이 났다. 1928년 정치위원회 멤버였던 8명 중 5명이 1931년까지 제명되었다. 보르디가(수감중이었지만 중앙위원회의 공식멤버) 역시 1930년에 제명되었다. 새로운 당 정책에 따라 이탈리아에 온 당원의 대부분이 검거되었다.

2.5. 그람시는 체포된 후, 6주일 구류기간동안 동료수감자인 보르디가와 함께 정치수감자들을 위한 교육과정을 진행했다. 1927120, 그람시는 밀라노로 이송되었다. 밀라노에서 1년 이상을 독방에서 지내며 읽고 쓰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고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보내졌다.

2.6. 1928528, 무장폭동을 준비했다는 이유로 그람시·테라치니·스코치마로 등 20여명이 기소되었다. 법적논고나 증거는 부적절했으나 파시스트 정권은 유죄판결을 결정하고 본보기 징벌을 가했다. 검사는 그람시에게 우리는 20년 동안 이 자의 두뇌가 작동하지 못 하도록 해 놓아야 한다.”고 선언했고 그람시에게 20년 형을 선고했다. 719일 튜리 형무소에, 건강악화로 포르미아 병동으로 이감될 때까지 4년 반의 시간 동안 수감된다. 바로 여기서 19292월 이래 그람시는 <옥중수고>를 집필하게 된다.

2.7. 기질적으로 내향적 ·금욕적인 성향이었던 그람시는 의지력과, 감옥 속에서 조차 혁명운동의 대열에 속해 있다는 신념 외에는 기댈 곳이 없었다. 특히 파시스트 정권의 호의를 인정하는 것으로 보일 만한 어떤 특권과 특별대우도 거부하고 오직 정치적 수감자로서의 법적인 권리를 정확히 받아내고자 끝까지 투쟁했다.

2.8. 동료수감자의 당 보고의 내용에 따르며, 그람시는 당의 좌경선회와 정면 공격을 정책을 비판했으면, 당 정책의 맥시멀리즘적인 요소와 그에 따른 파시스트 정권의 힘에 대한 과소평가를 비판했다고 한다. 수감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토론에서 그람시의 주장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유기적 지식인으로서 당 개념,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부르주아 국가 권력을 접수할 수 있는 군사조직의 필요성, 이는 근본적으로 정치적인 조직이어야 한다.

제헌의회라는 중간적 슬로건의 중요성,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배계급에 대한 투쟁의 동맹세력을 얻기위한 수단으로서 의미이며 모든 평화적 개량계획에 대하여 투쟁하며 유일가능한 해결책이 왜 프롤레타리아혁명인지를 보여주는 교두보로서의 뜻을 지닌다.

5차 코민테른 세계대회의 슬로건 - ‘이탈리아 노동자·농민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바꾸어야 하는 필요성.

부르주아 반동의 특수한 형태로서의 파시즘 규정. 파시즘 하의 금융자본의 힘이 점차 지배적으로 되어 가는 특징의 기원은 이탈리아 역사발전의 특수한 성격(부르주아지의 계급통일의 결여, 카톨릭 교회의 비중들)에서 구해야 한다. 그리고 파시즘의 직접적인 배경이 된 것은 제 1차 세계대전 후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트의 분열이 심화되어 어느 쪽도 굴복시키지 못하는 힘의 균형상태를 유지했다는 사실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모든 객관적인 조건이 존재한다. 하지만 권력장악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농민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 확립이 적대적으로 시급하다.

2.9. 튜리에서의 말기에는 읽고 쓰지 못할 정도로 심하게 앓고 지냈으며, 정신적으로도 힘든 시기였다. 1933년 그람시의 건강악화를 듣고 친구들의 구명이 벌어지고, 이후 포르미아 병동으로 이감되고 <옥중수고>의 집필을 계속한다. 그러나 건강은 회복될 수 없을 만큼 악화되어, 1937421, 형기가 끝났음에도 병원 밖을 나가지 못하고 427일 사망한다. 그의 딸인 타티아나가 장례를 준비하면서 그의 방에 있던 서른 세권의 공책을 빼내, 외교관 가방을 통해 모스크바로 가져갔다. 이 노트는 나의 내적인 삶의 초점이었으며 그람시의 혁명가로서의 삶이 그려져 있다.

 

3.1. 서설에서는 혁명적가로서의 그람시의 생애 속에 들어 왔던 중심적인 정치적 경험(튜린에서의 투쟁, 이탈리아 공산당의 형성, 파시즘의 대두와 강화, PCI 내부와 코민테른에서 벌어졌던 전략적인 논쟁 등)을 중심적으로 정리했다. 특히 이러한 부분은 그람시가 <옥중수고>에서 공개적으로 쓰기 가장 어려웠던 부분이기도 하다.

3.2. <옥중수고>로 대표되는 그의 총체적인 지적 성취에 대한 평가는, 오직 투옥 전의 정치적인 경험과의 연관 하에서만 이뤄질 수 있다.

3.3. PCI10월 혁명과 제 1차 세계대전에 이은 혁명적 봉기의 실패 이후 형성되었고, 형성된지 2년이 채 되지 않아 파시스트 권력의 탄압으로 당의 경험이라는 것이 거대한 난관에 대항하는 방어적 투쟁의 연속이었다.

3.4. 타스카는 파시즘의 진정한 중대성에 대하여 좌파나 중앙파보다 더 현실적인 이해를 했으며 보르디가는 러시아와 인터내셔널 일반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지니는 함축적 의미를 중앙파나 우파보다 정확하게 더 일찍 간파했다.

3.5. 그람시는 PCI를 영도하던 짧은 기간 동안에, 보르디가의 맥시멀리즘·분파주의·경제주의와, 타스카의 비관주의·‘청산주의’·문화주의에 대해 성공적으로 싸워나갔고, 당 내의 규율과 대중의 자발적인 행동에 대한 민감성이라는 면에서, 진정으로 레닌주의적인 정치적 실천을 전개하고자 모색했다.

3.6. 그람시의 전략은 전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자율적인 계급조직의 창출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것은 <오르딘누오보>개념의 연속선 상에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계급유기체 속에서 권력 장악과 혁명투쟁을 조직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전위정당과의 변증법적인 연관 속에서 이뤄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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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공지 안토니오 그람시, 『그람시의 옥중수고』 세미나 참가자 모집! ― 1월 6일 토요일 오후 4시 시작! [8] 김하은 2017-12-04 2298
공지 공지 발제문 서식입니다~ file 김정연 2016-10-01 2146
공지 공지 정치철학 고전읽기 세미나 운영에 관한 결정사항입니다~ 김정연 2016-10-01 2049
공지 세미나를 순연하실 경우 게시판에 공지를 올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김정연 2016-03-15 1956
공지 공지 <정치철학 고전 읽기 세미나> 세미나 참가자 명단 - 2018년 2월 secret 김하은 2015-05-11 88
260 발제공지 2월 24일 (토) 발제공지 <그람시의 옥중수고 1> 한길 2018-02-05 467
259 발제문 [2/03] 옥중수고 148~174 강은진 2018-02-03 415
258 발제문 2/3 <옥중수고> "현대의 군주" 예측과 전망~상황의 분석과 세력관계 hong 2018-02-02 448
257 발제문 [2/3] 옥중수고 211~224 file 한길 2018-01-29 448
256 발제공지 2월 3일 발제공지 <그람시의 옥중수고 1> 강은진 2018-01-22 448
» 발제문 그람시<옥중수고1> p.87~123 김아리 2018-01-20 414
254 발제문 [1/20] 옥중수고 127~148 강은진 2018-01-20 384
253 발제문 [1/20] 옥중수고 174~190 김정연 2018-01-20 383
252 발제공지 1월 20일 발제공지 <그람시의 옥중수고 1> 김아리 2018-01-10 388
251 자료 [참고자료] 파시즘론의 현재적 의미 / 조정환 김정연 2018-01-06 431
250 발제문 그람시 [옥중수고 1] p.61~87 김아리 2018-01-06 505
249 발제문 [1/6] 옥중수고 23~61 김정연 2018-01-06 423
248 발제문 <프랑스 내전> 4장 발제문 hong 2017-12-21 425
247 공지 1월 6일(토) 정치철학 고전읽기 발제 공지(<그람시의 옥중수고 1>) hong 2017-12-21 430
246 공지 12월 16일(토)에는 세미나가 열리지 않습니다 김정연 2017-12-15 408
245 발제공지 12월 16일(토) 4시 <프랑스 내전> 세미나 공지입니다 김정연 2017-12-02 529
244 발제문 12/2 <프랑스 내전> 서설~두번째 담화문 발제문 hong 2017-11-30 525
243 공지 칼 맑스, 『프랑스 내전』 세미나 참가자 모집! ― 12월 2일 토요일 오후 4시 시작! 김하은 2017-11-24 643
242 발제공지 12월 2일 정치철학 고전읽기 발제 공지(<프랑스 내전>) (수정) hong 2017-11-20 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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