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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미학_삶과 예술



12일에는 『보이는 것과 자연』「철학적 물음」 의 1장 【반성과 물음】을 공부하였습니다. 
1장 【반성과 물음】은 3개의 소제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 지각적 신념과 그 불투명성
2. 과학은 지각적 신념을 전제할 뿐 설명하지는 않는다.
3. 지각적 신념과 반성

이 소제목들로 메를로-퐁티가 가졌던 문제의식을 정리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각적 신념 불투명하다. 불투명하기에 우리는(철학은) 그것에 물음을 던져야 한다. 하지만, 과학은 지각적 신념이 무엇인지 묻지 않는다. 과학은 (특정한 형식의) 지각적 신념을 전제하는 학문이다. 철학적 물음은 바로 이 지각적 신념에 관한 물음이어야 한다. '반성'은 이러한 철학적 물음이었다. 하지만 '반성철학'은 큰 오류를 범했다."

이장의 가장 큰 문제의식은 '반성철학'의 오류에 이어 '과학'이라는 학문이 정초 된 후, 우리가 더는 '지각적 신념'에 물음을 던지지 않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는 앎知의 발전에 매우 해로운 것이라고 퐁티는 말합니다.

1. 지각적 신념

'지각적 신념'에서 '지각'은 불어로는 perceptive, 영어로는 perceptual, 한자로는 知覺입니다. 이렇게 번역되는 단어들을 살펴보면, '지각'이란 단순한 감각적 앎이라는 의미를 넘어, 알아서 깨닫는 능력 혹은 어떤 것을 알고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단어의 의미를 살피다 보니 퐁티가 제목에 달아둔 각주의 내용이 더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퐁티는 이장의 제목에 '신념의 개념을 보다 명확히 할 것.'이라는 주석을 달아두었습니다. 퐁티가 달아둔 주석에 의하면, '지각적 신념'에서 '신념'은 '결단의 의미가 아니라 입장을 취하기 이전의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신념'입니다. 각기 다른 상황에서 '곰'을 보게 된 두 사람의 예를 통해 퐁티가 주석에서 이야기한 신념을 생각해 보면 재밌을 것 같습니다.
TV에서 곰을 본 사람과 등산 중에 곰을 만난 사람. 이 두 사람의 예를 통해 신념을 각각 달리 해석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장 어떤 행동을 취해야만 하는 극단적인 상황과 그렇지 않은 상황을 가정해 본 것입니다.) 우선, TV를 보고 있는 사람은 화면에 등장한 털이 잔뜩 달린 커다란 몸채를 보고, 자신이 알고 있는 수많은 동물의 이름 중 하나를 결정하여 그것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저것은 곰이다. 나는 저것을 알고 있다." 이는 신념의 첫 번째 의미 즉, 결단의 의미에서의 지각적 신념입니다. 다음, 등산 중에 곰을 보게 된 사람의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털이 잔뜩 달린 커다란 몸채를 이번에는 산에서 본 사람은 그것과 자신의 관계에서 본인이 취해야 할 입장 이전에 발생하는 지각적 신념을 가집니다. "저것은 곰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저것이 '곰'임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 경우, 특성을 통해 그것이 어떤 동물인지를 알아내는 것은 이 사람의 지각, 즉 앎의 한 일면에 불과합니다. 그는 곧이어 곰과 자신이 맺을 수 있는 가능한 관계들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대부분) 그 곰이 나를 알아채기 전에 재빠르게 도망갑니다. 물론, 그 사람이 뛰어난 애니멀 커뮤니케이터라면 또 다른 입장을 취할 수도 있겠지만요! 어쨌든, 이 두 번째 경우 '지각적 신념'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서 깨닫고 그것과 내가 맺을 수 있는 관계를 아는 것까지 포함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대상에 대한 앎뿐만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자신에 대한 앎까지 함께 따라올 것입니다.

2. 철학적 물음

퐁티는 서두에 우리가 갖는 가장 기본적인 지각적 신념을 표현하는 문장을 소개합니다.
"우리는 사물 자체를 본다. 세계란 우리가 보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17)
이는 우리에게 가장 공통적이며 가장 우선시되는 (자연스러운) 지각적 신념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삶의 가장 깊은 곳에 뿌리내리고 있기에 우리는 지금 보는 그것을 믿고 어떤 입장을 취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이는 일상에서는 매우 익숙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지각적 신념'을 명확한 명제나 진술로 정의하려 할 때입니다. 막상 이러한 신념을 명확한(엄정한) 명제나 진술로 정의하고자 하면 우리는 무수한 어려움에 빠집니다. 위 문장에서 등장하는 '우리', '사물', '세계',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두 다시 정의해야 할 입장에 처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는 확실히 '철학적 물음'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과연 우리에게 이러한 철학적 물음이 (굳이) 필요할까요?
퐁티는 '철학'에 대해 오랜 기간 누적되어온 사람들의 불쾌감을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은, 철학이 '철학적 물음'을 통해 명쾌한 삶의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어 버렸다고 불만을 제기하고 그것이 불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퐁티는 이에 관해 '그렇다' 또 '아니다'라고 동시에 답하고 있는 듯합니다.
퐁티는, 철학자들이 불필요한 복잡함을 만들어서 우리의 삶을 힘들게 만들었는가? 라는 질문에는 "그렇다."라고 답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렇다면, 이제 모든 철학적 물음을 중단해야 하는가?"라고 질문하면 이에는 '결단코 아니다'라고 답합니다. 이렇게 두 가지 질문과 답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철학자들이 모두 '철학적 물음'을 던지는 자들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철학자의 물음'이 곧 '철학적 물음'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인류를 수탈하는 (일명) 철학자의 철학적이지 않은 물음'과 '철학 하는 자의 철학적 물음'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퐁티가 말하는 '철학적 물음'은 이를 구별하는 데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퐁티는, "철학 하는 자란 자신의 내면에서 활동자들로서 끊임없이 스스로 형성되고 있는 세계와 세계에의 시각에 물음을 던지는 것"(19) 임을 강조하며 우리 모두가 "세계를 보는 방법을 배워야" 하고, 철학적 물음을 통해 "우리라는 것이 무엇인지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3. 외눈이미지와 공조적 지각

두 가지 '봄'이 있습니다. 퐁티는 이를 '외눈 이미지'와 '공조적 지각'으로 구분해 이야기합니다. 
'외눈 이미지'는 선-사물입니다. 이 '외눈 이미지'는 다양하게 이야기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들은 자기네들을 흡수하여 완성하는 진정한 시각의 초벌이거나 잔재에 불과하다."(23)는 말에 힌트를 얻어 생각해 보면, '외눈 이미지'는 우리가 축적된 경험을 통해, 즉 이전에 보아서 알고 있는(기억하고 있는) 사물에 대한 표상 정도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따라서 '외눈으로 본다' 하면 선입견 속에서 사물을 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철학적 물음' 이전의 봄, 혹은 '철학적 물음'이 제거된 봄이라 할 수 있고, 또 어떤 면에선 '지각적 신념'의 불투명성이 제거된 상태의 봄이라 할 수 있겠는데, 사물 자체와의 만남에서 발생하는 모순이 특정한 입장을 취함으로써 정리되고 바로 그 특정한 입장에 의해 고정된 상태로 기억 속에 저장된 이미지로만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또 다른 봄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공조적 지각' 즉, 두 눈으로 자유롭게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 눈으로 자유롭게 바라봄으로써 진정한 사물에 도달합니다. "우리들은 바라볼 때, 세계에 눈을 뜰 때, 외눈 이미지에서 공조적 지각으로, 선-사물에서 사물로 이행을 실행할 수 있으며, 우리들은 이 이행에 방관자로서 참관만 할 수는 없다."(23) 라고 퐁티는 말합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봄'은 각각을 분리해서 우리가 취사선택 할 수 있는 두 종류의 독립된 행위를 일컫는 것은 아닙니다. '외눈 이미지'는 우리의 지각에 필수적인 한 측면입니다. 다만 이 '외눈 이미지' 즉 선-사물을 보는 것에만 그쳤을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즉 세계를(사물을) 바라볼 때, '내가 보는 것이 저것이다. (저것은 곰이다!)'라는 '지각적 신념'을 그 자체로 자명한 것으로 전제하고 나머지 한눈을 (결코)뜨지 않을 때 문제가 생기는 것이겠지요. 선-사물을 보는 것, 즉 표상 능력은 분명 우리 눈의 능력입니다. (더는 선-사물에만 머무르지 않겠다는 결단으로 방금 나에게 외눈의 이미지를 주었던 그 눈을 뽑아버린다면 결국 남는 것은 하나밖에 없는 눈입니다.) 중요한 것은 '선-사물을 보는 것과 사물 자체를 보는 것 사이의 선택'이 아니라 '두 눈으로 바라봄으로써 선-사물에서 사물로 이행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4. 외눈으로 보는 과학

두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지각적 신념'의 불투명함 안에서, "끊임없이 스스로 형성되고 있는 세계와 세계에의 시각"에 물음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물음을 던지지 않는 과학은 세계를 외눈으로, 즉 선-사물들의 세계로만 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코, 두 눈으로 바라보지 않는 과학은 '지각적 신념'의 불투명함을 제거해버리고 자신들의 앎이, 자신들이 목격한 사물이 그 자체로 자명한 것인 양 그것들을 절대적 앎의 질서에 투영시킵니다. 하지만 '지각적 신념'의 불투명함은 결코 독단적 태도를 보임으로써 제거해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이렇게 독단적 입장을 취하는 과학은 지속적인 위기의 상태에 있게 됩니다. 이러한 위기는 앎知의 발전을 저해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위기 속에서 오히려 우리의 삶을 알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물리학자, 심리학자들이 탄생합니다.
과학은 '주관'개념과 '객관'개념을 분리하여 그 관계를 알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과학은 이 세계를 오로지 객관적인 물리 법칙에 의해 구성된 사물들의 세계로 바라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이야기하는 법칙이란, 그들이 가정한 조건에 의해 모든 변수를 통제할 수 있는 진공의 실험실 안에서나 절대적으로 작동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공의 실험실에서 만들어낸 사실들이 객관적 진실의 자리를 차지하는 동안, 세계는 더욱 알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과학은 물질을 바라보며 관념이 아닌 사물의 질서에 집중하는 척하지만, 실상 그들이 도모한 일이란, 세계를 그들이 준수하는 함수적 관계에 맞추어 모조리 관념화(추상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퐁티는 이러한 과학의 모습을 선-과학적 편견의 모습이라 지칭하기도 합니다. 앞에서 '일명 철학자'와 '철학 하는 자'를 구분했듯이 '선-과학적 편견에서 멈춰버린 일명 과학자'와 '과학 하는 자'를 구분할 필요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의 삶을 알 수 없는 복잡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물리학자와 심리학자가 바로 '일명 과학자'들의 모습이라 할 수 있겠네요. 어쨌든, 퐁티는 '과학 하는 자'로서 혹은 '철학 하는 자'로서 이러한 선-과학적 편견을 해체하고, 그들이 규정하는 '주관 관념'과 '객관 관념'의 관계를 다시 고찰하고 해명하기를 촉구합니다.

5. 세계의 선존재성

퐁티는 1장이 끝나갈 즈음 정신과 세계의 관계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정신과 세계는 한쪽이 다른 한쪽을 선행할 수도 없고, 또 한쪽이 다른 한쪽을 포괄할 수도 없음을 강조하며 덧붙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세계가 정신에 한발 걸치고 있다거나 정신이 세계에 한발 걸치고 있다는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 세계가 세계에 대한 나의 의식보다 앞서 존재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다."(75)  퐁티가 이어서 말하고 있듯,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나 없는 세계도, 그러한 세계를 내가 생각한다는 사실로 인해 세계가 되는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퐁티가 이야기하는 '세계의 선존재성'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미 존재하는 세계란 선-사물의 질서 안에 놓여있는 세계의 한 측면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다만 각자가 알고 있는 선-사물의 질서가 아니라 우리가 공통으로 알고 있는 것으로써의 '선-사물'의 세계라고 할 수 있겠지요. 예를 들면, '삼각형의 정의'와 같은 것, 또 '곰'의 정의 같은 것입니다. 나는 내가 직접 연역적으로 삼각형의 정의를 증명한 경험이 없어도, 내가 직접 관찰하고 그 특징을 분류하여 '곰'을 정의하지 않았어도, 그것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나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계는 우리의 지각 이전에 존재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선-세계는 어디까지나 선-사물의 질서 안에 있는 것이지 "끊임없이 스스로 형성되고 있는 세계"자체의 질서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내가 몰랐을 때도 미국은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이 미국(선-미국)은 내가 알기 이전에 타인들이 지각하는 양상으로 존재한 것입니다. 내가 알기 이전부터 존재하던 미국은 타인들이 알고 있었고, 또 그러한 타인들의 앎 덕분에 이제는 나도 알게 된 미국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미국이라는 세계 자체는 아닙니다. 나머지 한눈을 뜰 때, 즉 "자신의 내면에서 활동자들로서 끊임없이 스스로 형성되고 있는 세계와 세계에의 시각에 물음을" 던질 때, 우리는 선-미국(선-사물)에서 미국자체(사물자체)로의 이행을 실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세미나 시간 토론했었던 내용을 바탕으로 1장의 내용을 갈무리해 보았습니다. 퐁티의 치밀한 사유와 그의 철학적 물음들을 따라가는 일이 마치 낯선 식물들로 뒤덮인 우림을 탐험하는 것처럼 흥미진진하네요^^, 그럼 모두 즐거운 공부 하시고,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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