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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환의 삐라의 추억
2017.08.08 09:37

[자율평론 53호] 깃발 / 김명환 시인

조회 수 138 추천 수 0 댓글 0

김명환의 삐라의 추억 6

 

깃발

 

 

 

다니던 출판사에서 박남원 시인의 시집을 냈다. 시집이 매장에 잘 깔려있는지 보기 위해 종로서적에 갔다. 종각역에 내려 계단을 오르는데 뭔가가 밟혔다. 집어보니 ‘공무원시험안내서’였다. 내 나이에 갈 데가 있나? 종각역 입구에서 안내서를 뒤적였다. 아, 딱 한 군데 있었다. 맑스도 떨어졌다던, 철도공무원! 출판사에 돌아와 사직서를 내고, 수험서를 사러 노량진으로 갔다. 철도에 들어가면 멋진 삐라를 만들어야지! 삐라 제호를 “전진하는 철도노동자”로 정했다. 소비에트연합 해체 이후 처음으로 가슴이 뛰었다.

 

돈도 벌고 글도 쓰고 삐라도 만들 수 있는 철도는 천국이었다. 하지만 나는, “전진하는 철도노동자”를 만들지 못했다. 삐라를 창간하며 제호를 정할 때마다 내 뜻을 관철시키지 못했다. 2000년 ‘철도노조 전면적 직선제 쟁취를 위한 공통투쟁본부’ 기관지를 창간하며 편집장이 되었지만 제호는 “바꿔야 산다”로 정해졌다. 2007년 철도노조 기관지를 창간하며 편집주간이 되었지만 제호는 “철도노동자”로 정해졌다.

 

2006년에 철도노조 기관지 창간을 준비하며, 기관지 깃발을 미리 만들었다. 깃발을 볼 때마다 가슴이 뛰었다. 혁명전야의 고요 속에 고고하게 나부끼는 깃발! 나는 꼭 그런 삐라를 만들고 싶었다. 정확하고 아름답고 멋진! 메이데이집회에 들고 나갔다. 여기저기서 깃발 주문이 들어왔다.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 노동사회과학연구소, 철도해고자원직복직투쟁위원회……. 하지만 정작 철도노조는 깃발이 마음에 안 들었던 거 같다. 철도노조 창고에 보관해 놓은 깃발은 그날 저녁 사라졌다. 한나절을 나부끼고 사라졌다.

 

“저 깃발, 누가 만든 거니?”
메이데이집회에서 만난 조세희 선생이 철도노동자와 함께 전진하는 깃발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지, 누구겠어요.”
“저거, 조그맣게 하나 만들어줘. 집에 걸어놓게.”
“이제, 저 깃발 같은 삐라가 나옵니다.”
“니 삐라는, 단단해서 좋아…….”
조세희 선생이 쓸쓸하게 웃었다.
지금도 삐라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리다. 삼촌도 그럴 것이다. 나는 “노동해방문학”에서 쓸쓸하게 퇴각했다. 삼촌은 “당대비평”에서 쓸쓸하게 퇴각했다. 우리는 ‘멋진 문예지’를 만들지 못했다.

 

새끼깃발 두 개를 만들어 하나를 드렸다. 나머지 하나는 철도노조에 들른 소설가 김하경 선생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깃발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가방에 쑤셔 넣었다.

혁명전야의 고요 속에 고고하게 나부끼는 깃발! 나는 꼭 그런 삐라를 만들고 싶었다. 정확하고 아름답고 멋진! 깃발은 한나절을 나부끼고 사라졌지만, 지금도 내 가슴 깊숙한 곳에서 나부끼고 있다.


* 김명환은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84년 사화집 『시여 무기여』에 시 「봄」 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89년 월간 『노동해방문학』 문예창작부장, 2000년 ‘철도노조 전면적 직선제 쟁취를 위한 공동투쟁본부’ 기관지 『바꿔야 산다』 편집장, 2007년 철도노조 기관지 『철도노동자』 편집주간으로 활동했다. 시집 『첫사랑』, 산문집 『젊은 날의 시인에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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