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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sk ☆140자 다지원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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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에 '정동' 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된 일련의 논의에 대한 개입글이다. 조정환의 블로그 '공통기계'에 처음 발표되었다. 이에 관한 좀더 정리된 생각은 <들뢰즈의 정동이론>(계간 『파란』 3호, 2016년 가을)에 서술되었다. 

 

들뢰즈의 affection/affect에 대한 기원론적 접근에 대해

 

최근 진태원 철학 연구자는 affection은 '정서'가 아니라 '변용'으로, affect는 '정동'이 아니라 '정서'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으면서 이것이 '국내 네그리 연구(자!)들의 들뢰즈/스피노자 이해'(내가 그 '기원'이자  '중심'으로 지목되었다)의 '초보적' '오류'를 바로잡는 획기적 주장이라고 내세우고 있다.( http://blog.aladin.co.kr/balmas/8386452 ) 다루는 문제(번역용어문제!)에 비해 좀 길게 느껴진 그의 글을 두 세 차례 읽어보아도 네그리 연구자들의 들뢰즈/스피노자 이해가 왜 초보적인지, 왜 그것이 오류인지, 또 왜 번역어를 그의 주장처럼 바꿔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제시된 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1)'정동'이라는 단어는 낯설다는 것이며, (2)'정서'라는 단어는 '다음 사전에 따르면' 물체와 마음의 관계인데 affection은 물체와 물체의 관계이므로 그 단어는 번역어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첫째로 낯선 것은 피해야 한다는 생각은 친밀성을 선호하는 보수주의적 정서를 표현하는 것이다. 둘째 주장은 '정서'의 의미근거를 '다음사전'에서 찾는 협소성 외에도 훨씬 중요한 문제들을 포함하고 있다. "affectio는 물체와 물체 또는 물체와 신체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물리적인 작용을 가리키는 용어다."라는 이해를 들뢰즈의 affection/affect 개념에 직접 적용하는 것은 affectio(affection)에서 신체-뇌(body-brain)의 특권적 중심성이라는 (베르그송에서 유래하는) 들뢰즈 이미지론의 핵심을 삭제하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는 그가 좀더 '본격적인' 글을 준비하겠다고 쓰고 있으니 좀더 지켜본 후에 나의 생각을 좀더 상세하게 피력할 기회를 얻어보고자 한다.

 

이 글에서 주제로 삼고 있는 번역용어 문제에 집중하면,  affect를 '정서'로, affection을 '변용'으로 번역하면 affect-affection 사이의 연결관계가 우리말에서는 끊어져 버리게 되고 들뢰즈가 동일한 말뿌리를 갖는 두 개념의 차이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의미가 사라져 버리게 된다. 번역용어와 관련된 한에서 아주 단순화시켜서 표현하면, 우리는 affect를 affection의 잠재성으로, 거꾸로 affection을 affect의 현실태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말에서 '정서'(=정동작용)를 '정동'의 현실태로, 정동을 정서의 잠재태로 이해한다는 뜻이다.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affect는 '행동할 역량'으로 강도(intensity) 수준에서 이행하고 있는 신체이다.  이런 의미에서 affect는 표현으로서의 '정(情)'이며 affection은 신체에 의해 재현되는 '정'이다. 정서는 신체들의 마주침에서 출현하는 표현적 정동을 함축하고 포함할 뿐만 아니라 봉인하는 방식으로 재현한다. 여기서 같은 어원을 갖는 봉인(envelope)과 함축(involve)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들뢰즈가 굳이 involvere를 프랑스어로 impliquer라고 하지 않고 envelopper라고 쓰고 있는 이유가 있다면) affection이 갖는 선별과 은폐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진태원 연구자가 제시하는 '변용'과 '정서'라는 번역어는 우리말에서 양자의 내적 관계를 표현할 어떤 공통요소도 갖지 않는다. '변'(변한다)과 '서'(펼친다)를 괄호치고 나면 '용'과 '정'이라는, 음운상으로만이 아니라 의미상으로도 서로 별개인 두 말이 남는다. 이렇게 언어가 풀어져 버리면 우리는 우리말로 사유를 밀도 있게 전개할 수 없게 된다. 즉 '철학하기'가 불가능해진다. 철학하는 것은 철학을 연구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런 탈철학적 주장에 대해 들뢰즈나 스피노자에 대해 일가견이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사람들조차 '구구절절이 맞는 주장'이라느니 '좋다'느니 '정동'이라는 말이 마음에 안 들었는데 '고맙다'느니 하는 채무자적 아부언사 밑에 자신의 지적 나약성을 숨기는 것을 보게 되는데, 참으로 낯 뜨거운 일이다.

 

여기에서 진태원 연구자의 논리전개 방식에서 발견되는 다른 한 가지 중요한 측면에 대해서 언급해 두고 싶다. 한국에서 최근 관심을 끌고 있는 '정동'의 이론은 들뢰즈보다 브라이언 마수미에 의해 추동되고 있다. 브라이언 마수미는 그가 연구하고 소개한 들뢰즈의 철학적 개념들 중에서도 affect 개념을 자신의 사유의 핵심으로 전유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의 정동론은 <<가상계>>( The Parables of the Virtual: Movement, Affect, Sensation; 조성훈 옮김, 갈무리, 2011)를 통해 국내에 소개되었고 멜리사 그레그와 그레고리 시그워스가 편집한 <<정동이론>>(Affect Theory Reader; 최성희 외 옮김, 갈무리, 2016)의 중요한 이론적 배경으로 기능한다. 아직 출판되지 않은 그의 인터뷰집의 이름도 <<정동의 정치학>>(The Politics of Affect; 근간예정)이다. 이토 마모루의 <<정동의 힘>>(情動の權力: メディアと共振する身; 김미정 옮김, 갈무리, 2016)도 브라이언 마수미의 이론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최근 국문학계나 영문학계 등에서 일고 있는 '정동적 선회' 담론을 이해하고 또 비판하려면 브라이언 마수미의 정동(affect) 개념으로부터 접근하는 것이 응당 옳을 것이다. 

 

그런데 진태원 연구자는 브라이언 마수미가 아니라 <<비물질노동과 다중>>(갈무리, 2005)에 실린 들뢰즈의 강의록, '정동이란 무엇인가?'(서창현 옮김)에서부터 문제에 접근한다. 기원으로의 첫 번째 퇴행이다. 그런데 정작 그는 들뢰즈가 affect나 affection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에 대해서는 진지한 관심을 갖지 않는다. 들뢰즈의 affection/affect는 단지 출발점으로 기능할 뿐 그것의 고유성이 무엇인지는 논의되지 않고 곧바로 스피노자의 affecio/affectus 개념으로 치환된다. 이것이 두 번째 퇴행이다. 진태원에게서 철학은 이렇게 기원적인 것을 찾는 인디아나 존스적인 여행이다. 이 여행 속에서는, 스피노자에서 들뢰즈/가타리로, 다시 들뢰즈/가타리에서 브라이언 마수미로, 다시 이들에서 일본과 한국의 철학적 사유로... 시간 속에서 전개되는 철학적 노력들,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개념창조작업들은 간과되고 무시되고 '오류'로 단죄다. 기원을 척도로서 사랑하는 자, 그래서 스스로를 기원의 대리자로 참칭하고자 하는 자들은  '초보적 수준' '초보적 오류' 등 지성의 위계를 공고히 하려는 지적 프레이밍 작업에 참여하기를 좋아한다. 프레이밍은 항상 수익(profit)과 결부되어 있는데, "국내의 <<윤리학>> 번역(또는 스피노자 저작 번역) 중에서 학문적으로 신뢰할 만한 번역은 하나도 없다."는 표현에서 그의 기원론적인 프레이밍은 거의 독선의 수준에 이른다. 

 

그렇지만 우리는, 번역은 "학문적 신뢰"(즉 지적 신앙)의 대상(지성의 신)을 만들어 내는 작업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실천에서 사용할 수 있는 무기를 벼려내는 집단지성적 작업이며 창조적 실천이라고 말해야 한다. 창조적 사유는 기원에의 충실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들뢰즈가 강조하듯이, 기원에 대한 배반, 기원에 대한 반역에서 나온다. 맑스, 들뢰즈, 네그리에게서 모든 고전은 훈고학적 고전이 아니라 넘어섬의 계기를 포함하는 고전, 요컨대 배반되는 과정 속의 고전이다. 역사의 "실재적 경향"은 그 '배반'을 불가피한 것으로 만드는 조건이다. '넘어섬'(beyond)과 '초월론'(transcendentalism)의 사유 전략은 그 불가피성에 대한 이론적 응답이다. 이런 맥락에서 진태원 연구자가 여러 글들에서 일관되게 보여주는 기원에 대한 집착과 기원론적 프레임을, 나는, 동양의 훈고학파('경')나 서양의 스콜라학파('신')가 역사적으로 보여주었던 것, 즉 다양하고 특이한 넘어섬의 아나키에 대한 공포 대응으로, 다양성과 특이성들을 기원적 권위와 질서 하에 복속시키려는 권력야욕과 철학적 보수주의의 증상으로 읽지 않을 수 없다. 

 

단두대와 도약대 사이에서

 

"기원론적" 관점은 "그는 이렇게 말했다"(묘사) - "그 말은 다른 뜻이 아니라 이런 뜻이다"(해석)를 반복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을 인간에게 전해온 사제의 사유방식과 언어습관을 반복한다. 오늘날 동서를 막론한 모든 대학(학교들과 교회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다)은 이러한 사유와 발화의 양식을 대규모적으로 재생산하는 전지구적 공장이다. 이러한 사유와 발화 양식은 우리를 어떤 권력중심에 묶어놓는다. 선배가 이렇게 말했다, 그 교수님이 이렇게 말했다, 사장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VIP가 이렇게 말씀하셨다....그건 이런 뜻이다...그러니 ...가 기원론적 담화양식의 순환양상이다.  우리는 이 구도 속에 금융자본, 돈, 군대와 경찰, 정보기관, 신고, 몽둥이, 폭음, 이지메, 자포자기, 정리해고(앞으로는 일반해고까지) 등등이 그 재생산의 부품들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이 장치들을 통해 기원(아니, 이미 목적을 내장한 것으로서의 아르케)은 단두대로 기능하며 공포를 우리 삶의 가장 일반적인 정서로 구축한다. 그 효과는 다중의 공통적인 것의 사적 전유이며 자본주의적 축적의 확대재생산과 더 큰 지배이다.

 

나는 정말 기원이 실재하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어떤 것이 기원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고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기원들에 대해 우리가 취해야할 태도는 무엇일까? 순명일까? 아니다. 그 모든 기원의 장을 전장으로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단두대가 아니라 도약대로 활용하는 것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높이 뛰어야 한다(hic Rhodus, hic salta!). 그리고 거기서 도주선을 그어 나가야 한다. 

 

'정'의 두 양상으로서의 '정서'와 '정동'

 

affection/affect를 용어상에서 구별하고 또 양자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진태원 연구자에게는 철학연구의 문제이고, 번역의 정오를 다투는 문제이며 지성의 위계를 가르는 문제로 나타나지만 나에게 그것은 생명과 자유의 동태를 이해하고 혁명의 실재적 조건을 인식하는 문제로 다가온다. 사람들은 두 사람이 싸운다고 생각하고 그 귀추를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지만 정작 이 차이에 대해서는 크게 주목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번역 용어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를 생각하기 전에 우리가 같은 말뿌리(프랑스어에서 두 단어는 affect를 어간으로 갖는다. 어원적으로 거슬러 가 보면 '만들다, 행하다'는 뜻의 facere에서 파생된 것이다)를 갖는 이 두 용어를 개념적으로 왜 구별하는가? 그것을 구별함으로써 무엇을 사유하려고 하는가? 그것이 실천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가? 등에 관심을 먼저 갖는 것이 좋은 일일 것이다.

 

나는 앞에서, 정서(affection)를 정동(affect)의 현실태로 정동을 정서의 잠재성으로 규정했다. 잠재성과 현실태의 관계 자체가 쉽지 않은 문제거리로 되지만 여기서는 양자가 공유하는 '정'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보고 싶다. 나는 '정(情)'을 물체적인 것보다 물렁하고 정신적인 것보다는 단단한 것, 요컨대 베르그송이 '이미지'라고 정의한 것과 유사한 성격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情은 마음 심(心) 부를 갖고 있지만 진태원 연구자처럼 이 심을 신체와 구분되는 것으로서의 마음으로 이해하게 되면 '심'이, 그리고 '정'이 관념적인 어떤 것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그런데 신체에서 마음을 빼버리면 신체는 물체와 다른 없는 것으로 되는데, 이것이 진태원 연구자가 혼란 속에서 계속 빠져드는 물체주의적 경향이다. (나는 유물론자이지만 이런 물체주의적 유물론은 거부한다.) 정은 물체의 마주침이라는 조건에서지만 신체와 마음이 불가분하게 결합되어 있는 것으로서의 신경계와 뇌를 떠나서는 이해될 수 없는 사건이다. 즉 정은 생명에 내재적인 현상이다. 

 

이런 의미에서의 '정'은 정서와 정동이라는 두 단어가 공유하는 말줄기다. 그런데 정서와 정동은 '정'의 다른 양상를 지시한다. 정서에서 '서'(緖)는 실 사(糸) 部를 갖는 '실마리' '서'자인데, 실마리란 어떤 일이 순서와 계통을 밟아 체계적으로 질서 있게 전개되도록 만드는 출발점이다. 즉 그것은 계통과 질서라는 뜻을 함축한다. 반면 정동에서 '動'은 그것이 부로 삼는 힘 '力'을 기초로 삼는 움직임이다. 정동은 정서와 달리 계통이나 질서보다 소용돌이, 즉 정의 카오스적 움직임을 지칭한다. 별로 유의미하지는 않지만, 우리말 사전에도 이러한 차이가 약간은 반영되어 있다. 정서를 "사람의 마음에 일어나는 여러가지 감정"이라고 정의한 것과는 달리, 정동은 "희로애락과 같이 일시적으로 급격히 일어나는 감정. 진행 중인 사고 과정이 멎게 되거나 신체 변화가 뒤따르는 강렬한 감정 상태"로 정의하고 있는 것이 그렇다. 정동은 카오스이며 정서는 질서이다. 정동은 표현이며 정서는 정동적 카오스의 재현이다. 정서는 카오스적 정동에서 건져된 한 줌의 질서이다. 정동이 우선적인 것이며 정서는 그것에 뒤따르는 것이다. (하지만 우선적인 것과 뒤따르는 것을 가치론적으로 이해하지는 말아야 한다. 좋은 것/나쁜 것, 중요한 것/사소한 것이라는 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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