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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sk ☆140자 다지원 소식


Common City Project 29 ― 전지구적으로 소통하라!


『잉여로서의 생명』 출간 기념 저자 멜린다 쿠퍼와의 만남


서울 - 시드니 실시간 인터넷 화상강연회


잉여로서의 생명 : 과거를 돌아보며 미래를 전망하기
Life as Surplus: Looking Back, Looking Forward


강연 : 멜린다 쿠퍼 (『잉여로서의 생명』 지은이)


▦ 이 강연문은 2017년 3월 19일 일요일 오후 2시

다중지성의 정원에서 열린 멜린다 쿠퍼 화상강연회에서 발표되었습니다. 





What is at stake in the contemporary life sciences?


오늘날의 생명과학에 무엇의 성패가 달려 있습니까?

It seems quite clear to me and many other theorists that there is a question of political economy that needs to be addressed, the question of a growing entanglement between the scientific production of life in vitro and the dynamics of a capitalist economy, but the nature of this entanglement needs to be thought further.


저를 비롯한 여러 이론가들에게 어떤 정치경제학의 문제가 다루어져야 한다는 점은 꽤 분명해 보입니다. 생체 외에서 생명을 과학적으로 생산하는 것과 자본주의 경제의 동학이 점점 더 뒤엉키고 있다는 문제 말입니다. 그러나 이 뒤엉킴의 성격에 관해서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We hear of the growing commodification of life, of the effects of patent law on the availability of drugs, of the transformation of persons into things, but it seemed to me when I wrote this book that there was something more to be said about the relationship between biological life as an experimental artefact and the dynamics of capital accumulation.

우리는 생명의 상품화, 의약품의 가용성에 특허법이 미치는 영향, 사람의 물건으로의 변환에 관한 이야기들을 듣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쓸 당시 저는 실험적인 인공물인 생물학적 생명과 자본 축적 동학의 관계에 대해서 논할 거리가 더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In other words, it seemed to me that advances in the life sciences, along with new legal definitions put forward to capture or regulate them, also entailed a rethinking of the established categories of political economy.


다시 말해서, 저는 생명과학에서 일어난 발전이, 그리고 그 발전을 포착하거나 규제하기 위해 제안된 새로운 법적 정의들이, 정치경제학의 기정 범주들에 관한 재사유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It was not enough to denounce the commodification of life or the effacement of the legal distinction between persons and things, because these categories failed to capture what was new about the life sciences as they had developed after about 1980.


생명의 상품화를 고발하거나 사람과 사물의 법적 구별이 사라지고 있음을 고발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범주들은 대략 1980년대 이후 발전한 생명과학에서 무엇이 새로운지를 포착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Older biotechnologies such as organ transplantation and blood transfusion had already led to situations that could be analysed as a commodification of life that is a rendering of body fluids and parts as abstract, exchangeable equivalents, suspended in time and transferable across bodies, a rendering that could also lead to the exchange of these body fluids and parts for money.


장기 이식이나 수혈 같은 더 오래된 생명과학기술로 인해서, ‘생명의 상품화’로 분석될 상황은 이미 도래한 뒤였습니다. 즉 장기 이식이나 수혈 같은 기술은 체액과 신체 기관들을 추상적이고 교환 가능한 등가물로, 시간 속에서 정지된, 신체들 간에 이전이 가능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로써 체액과 신체 기관이 돈을 받고 사고팔리는 현상으로 이어질 수 있는 그런 상황은 이미 도래한 뒤였습니다.


But what I saw in the contemporary life sciences was something a little different.


그러나 제가 현대의 생명과학에서 포착한 것은 조금 달랐습니다.


It seemed to me that what we encounter here are processes of self-regeneration or auto-valorization, to use a term from Marxist political economy, where what produces and is produced is always in surplus of itself, proliferative, over and above the production and exchange of equivalents.


제가 보기에 우리가 마주하게 된 것은 자기재생 과정, 혹은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의 용어로 말하자면 자기가치화 과정입니다. 자기가치화란 생산자와 생산물이 항상 자기 과잉 상태에 있고, 증식적이며, 등가물의 생산과 교환을 넘어서며 그것을 능가하는 그런 과정입니다.

This is visible, in the first instance, in the actual material and experimental artefacts of the life sciences – immortalized cell lines, quasi-cancerous growths, and parthenogenetic conceptions – what we might call states of permanent embryogenesis.


이러한 측면은 우선 생명과학의 실제 물질적이고 실험적인 인공물들에서 볼 수 있습니다. 불멸화된 세포주, 유사 암세포적 성장, 처녀 생식을 통한 수정 등 우리가 영구적 배 발생 상태라고 부를 만한 그런 것들입니다.


The field of embryonic stem cell research can be seen as exemplary in this regard.


배아줄기세포 연구 분야가 이런 측면에서는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There are many different lines of research in this field, obviously, and embryonic stem cell research is the most constrained in terms of regulation, but it seemed to me that an overarching inspiration and horizon of enquiry here is the idea of returning the cells of the body to a state of embryonic incipience, that is to an emergent state where they are capable of both regenerating themselves and becoming any one of the differentiated forms of cell that constitute the body.


물론 이 분야에는 매우 다양한 연구 분과들이 있고, 배아줄기세포 연구가 가장 규제가 경직된 분야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영감이자 질문의 지평은 신체의 세포를 배아적인 초기 상태로 복귀시킨다는 생각입니다. 즉 세포들이 자기 자신을 재생할 수 있고, 신체를 구성하는 여러 분화된 세포 형태 중 그 어느 것으로도 될 수 있는 그런 창발적인 상태로 세포를 복귀시킨다는 생각입니다.


Embryonic stem cell science produces an experimental, in vitro body that is in a state of permanent embryogenesis.


배아줄기세포 과학은 생체 외에서, 영구적인 배 발생 상태에 있는 실험적인 신체를 생산합니다.


This cellular culturing of life is not necessarily en route to becoming an organized body (although it may well be used in this way in reproductive medicine) but can be provoked to generate any one of the body’s specific cell types for the purpose of therapeutic repair.


이러한 세포적 생명 배양이 필연적으로 유기적 신체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재생의학에서 그런 방식으로 사용될 수는 있습니다.) 세포적 생명 배양은 치료 목적으로 신체의 어떤 세포 유형이라도 생성하도록 촉진될 수 있습니다.


But we can also speak of self-regeneration or auto-valorization at another level – the economic and the legal.


그러나 우리는 또 다른 차원에서 자기재생과 자기가치화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경제적이고 법적인 차원입니다.


From about 1980 onward, with the landmark Diamond v. Chakrabarty case, in vitro experimental life forms such as genetic sequences, genetically modified animals and cell lines were progressively redefined as inventions, a very specific legal term that places them under the category of patent law. 


대략 1980년 이후로, 역사적인 다이아몬드 대 차크라바티 사건 이후로, 유전자 서열・유전자 변형 동물・세포주 같은 실험적인 생체 외 생명 형태가 꾸준히 ‘발명’으로 재정의되었습니다. 여기서 발명이란 이러한 것들을 특허법의 범주 아래 놓는 매우 구체적인 법률 용어입니다. 

What is taking place here is a merging of the concept of legal invention – which also defines the legally permissible reproduction of this invention – and the process of biological reproduction or regeneration.


법적 발명의 개념(법적 발명이라는 개념은 발명의 법적으로 허용 가능한 재생산이 어디까지인지도 정의합니다)과 생물학적 재생산 혹은 재생의 과정이 여기서 융합되고 있습니다.


The reproduction of a legal invention entitles the patent holder to royalties – a form of interest.


법적 발명의 재생산은 특허권자에게 (이자의 한 형태인) 로열티를 받을 권리를 줍니다.


When an experimental life form is patented, this means that the patent holder is liable to earn royalties whenever this life form reproduces itself.

실험적인 생명 형태에 특허가 부여된다는 것은, 이 생명형태가 자기 재생산을 할 때마다 특허권자가 로열티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This may occur in vitro or in vivo but which under particular circumstances occurs automatically because the invention in question is, after all, a living thing. 


이 자기 재생산은 생체 외에서 일어날 수도 있고 생체 내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데,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는 자동적으로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결국 그 문제의 ‘발명’은 살아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So in 1998 Monsanto took a Canadian farmer to court, arguing that he should be forced to pay royalties on the genetically modified seeds that had blown in from a neighbouring field and contaminated his crops.


그래서 1998년에 몬산토 사는 캐나다의 한 농부를 고소했습니다. 이웃한 경작지에서 날아들어 그 농부의 농작물을 오염시킨 유전자 변형 씨앗에 대해서 그 농부가 로열티를 물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역주 : 몬산토는 독성 폐기물 배출로 악명 높은 세계적인 농업 기업이다]
What is going on here in economic terms?

경제 용어로 말하자면,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요?


A legal patent does not transform the patented object into a commodity but rather into a stock of capital or a financial asset, which is defined by the fact that it generates a stream of income in the form of interest, royalties or dividends.

법적 특허는, 특허대상을 상품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본금이나 금융자산으로 만듭니다. 여기서 자본금이나 금융자산은 이자, 로열티, 배당금의 형태로 소득 흐름을 생성하는 것이라고 정의됩니다.


In terms of Marx’s theory of value, a commodity can be defined as an exchangeable equivalent, but a financial asset is defined as “self-valorizing value.”


맑스의 가치론의 용어로 말하자면 상품이란 교환 가능한 등가물이라고 정의될 수 있습니다. 그와 달리 금융자산은 “자기가치화하는 가치”라고 정의됩니다.


Marx has a wonderful metaphorical imagery for talking about self-valorizing value. 


맑스는 자기가치화하는 가치를 설명하는 훌륭한 은유적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In fact, all of his imagery is deeply coloured by the life sciences so when he addresses the question of capital and how to define it he evokes the figure of self-regenerative life, hovering somewhere between the monstrous and the miraculous. 


실제로 그의 묘사는 생명과학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고, 그래서 맑스가 자본이라는 문제를 다룰 때,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라는 문제에서 그는 경이로움과 기괴함 사이 어딘가에 자리한 자기재생적 생명의 형상을 환기합니다. 


To quote Marx: “Value is here the subject of a process in which, while constantly assuming the form in turn of money and commodities, it changes its own magnitude, throws off surplus value from itself considered as original value, and thus valorizes itself independently. For the movement in the course of which it adds surplus-value is its own movement, its valorization is therefore self-valorization…By virtue of being value, it has acquired the occult ability to add value to itself. It brings forth living offspring or at least lays golden eggs” (Marx [1867] 1990, 255).

맑스를 인용하자면 “여기서 가치는 과정의 대상으로서, 끊임없이 화폐와 상품의 형태를 번갈아 가며 취하는 가운데 자신의 크기를 바꾸며, 본래 가치로 여겨지는 그 자체에서 잉여가치를 떼어내고, 독자적으로 자신을 평가한다. 잉여가치를 더하게 되는 과정의 운동은 그 고유의 운동으로, 그것의 가치 증식은 곧 자기 가치 증식이다 … 가치가 된 덕분에, 그것은 자신에게 가치를 더할 수 있는 불가사의한 능력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새끼를 치며 불어나거나, 적어도 황금알을 낳는다”(Marx [1867] 1990, 255쪽).
Obviously the idea that the interest-earning capacities of a financial asset can be compared to a form of self-regenerative life is merely metaphorical in Marx’s work.

물론 금융자산의 이자 낳는 능력이 자기재생적 생명에 비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은 맑스의 작업에서는 은유적일 뿐입니다. 


The very notion that in vitro life forms could be sustained and cultured outside the organism, as a kind of self-animated technology, was unknown in the nineteenth century.


생체 외 생명 형태들이, 자기 스스로 생기를 띠는 기술의 일종으로서, 유기체 밖에서 유지되고 배양될 수 있다는 생각은 19세기에는 알려지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As the anthropologist Hannah Landecker has explained, it was only in the first decades of the twentieth century that we saw the emergence of non-organismic living technologies, when scientists first began to culture cell lines in vitro, outside the environment of the organism.


인류학자 하나 란데커가 설명했듯이, 20세기의 첫 10년에야 비유기체적인 생명 기술이 출현했고, 그때 비로소 과학자들이 생체 외에서, 유기체라는 환경 밖에서 세포주들을 배양하기 시작했습니다. 

Up until this moment, technology was inorganic or dead and labour was living and organic – and these distinctions are very much at work in Marx’s writing, where we find the notions of dead and living labor, organic and inorganic capital. 

그 전까지 기술은 비유기적이거나 죽은 것이었고, 노동은 살아 있고 유기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구별은, 죽은 노동과 산 노동, 유기적 자본과 비유기적 자본의 개념에서 보이듯이, 맑스의 저술들에서 현저하게 작동하고 있는 구별입니다. 

What is fascinating about the contemporary life sciences then, what is fascinating when we look at them in light of Marx’s theory of capital, is that his definition of capital as self-regenerative life has ceased to be metaphorical. 

그렇다면 현대의 생명과학에서 놀라운 점은, 맑스의 자본 이론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현대 생명과학의 놀라운 점은, 자기재생적인 생명으로 자본을 정의하는 맑스의 정의가 은유적이기를 그쳤다는 점입니다. 

In a very precise sense, what is at stake in the contemporary life sciences and their commercialization is the effort to transform self-regenerative life forms into interest-earning stocks of capital.

현대 생명과학과 그것의 상업화에 그 성패가 달려 있는 것은, 매우 정확한 의미에서, 자기재생적 생명 형태들을 이자 낳는 자본금으로 만들고자 하는 노력입니다. 

In more conventional economic terms, you could define these as financial assets.


좀더 상투적인 경제 용어로 말하자면, 이것을 금융자산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Of course this particular process of capitalization was by no means specific to the life sciences. 


물론 이런 특정한 자본화 과정이 생명과학에만 특유했던 것은 아닙니다. 


Beginning in the 1980s, the US economy as a whole underwent a series of shifts that are sometimes summarized by the term “financialization.” 


1980년대 이래로 미국 경제는 “금융화”라는 용어로 종종 압축되는 일련의 전환들을 전반적으로 겪었습니다. 


What we see here is a dramatic shift in monetary policy whereby the central bank became very disciplinary in its efforts to suppress wage and consumer price inflation but very relaxed with regard to the inflation of asset prices.


우리가 여기서 목격하는 것은, 중앙은행이 임금상승과 소비자 물가 상승을 억제하는 데는 매우 규율적이 되고, 자산 가격의 상승에 대해서는 매우 유연하게 대처하는, 통화 정책의 극적인 전환입니다. 


In fact, the defining feature of neoliberal monetary policy is the effort to promote the continuous inflation of financial assets – whether these be stocks and bonds, housing, or intellectual property such as patents.


실제로, 신자유주의 통화 정책을 정의하는 특징은 금융자산의 지속적인 팽창을 촉진하려는 노력입니다. 그 금융자산이 주식이든 채권이든, 주택이든, 특허 같은 지적재산이든 간에 말입니다. 


As income from wages were suppressed, the growth of income from capital in the form of interest, rent or royalties was actively cultivated. 


임금 소득이 억제되면서, 이자・지대・로열티의 형태를 취하는 자본 소득의 성장은 적극적으로 촉진되었습니다.


So in the same way that we have seen a dramatic inflation of property markets in this era, we have seen a similar growth in the value of intellectual property.


이 시기에 부동산 시장의 극적 성장이 일어났던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지적 재산의 가치에도 유사한 성장이 일어났습니다. 

In this context, it made sense that investors would focus their efforts on accumulating financial assets rather than investing in industrial infrastructure or factories or a long-term, secure workforce. 


이런 맥락에서 투자자들이 산업 기반시설이나 공장, 혹은 안정적인 장기 노동력에 투자하기보다 금융자산 축적에 노력을 집중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What was novel about the biotech industry was simply that these asset accumulation strategies were extended to biological life forms.


생명공학 산업에서 새로운 점은 이 축적 전략들이 생물학적 생명 형태들로 그저 확장되었다는 사실뿐입니다.
All of this required a lot of effort on the part of government and the courts to provide the right environment for investors: at the height of the stock-market boom of the 1990s, the US nurtured a vigorous venture capital market which allowed investors to kick-start very early stage biotech ventures in the expectation that they would earn high returns when the biotech enterprise went public on the NASDAQ – the market for technology stocks. 


이 모든 것은 투자자들에게 적합한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정부와 법원의 많은 노력을 필요로 했습니다. 1990년대 주식시장 호황의 정점에서 미국은 활성화된 벤처 자본 시장을 육성했습니다. 이 시장은 생명공학 기업들이 (기술 주식을 위한 시장인) NASDAQ에 공개될 때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에서 초기의 생명공학 벤처를 발동 걸리게 할 수 있도록 하는 시장입니다.

The profits earned by venture capitalists were in turn sustained by the expectation on the part of investors that the patents on biological life forms would yield a constant and rising stream of revenue.


벤처자본의 이윤은, 생물학적 생명 형태에 대한 특허가 꾸준하고도 성장하는 수익흐름을 창출할 것이라는 투자자들의 기대로 지속되었습니다.


But to move on a little, in writing this book, I was also interested in the question of self-valorization at a more systemic level. 


그러나 조금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자면, 이 책을 쓰면서 저는 좀더 체계적인 수준의 자기가치화 문제에도 관심이 있었습니다. 


I was interested in the fact that Marx’s definition of capital, as self-valorizing value, could also apply to capital at a world-systemic level, that is, to the global economy of sovereign debt and world money.


저는 맑스가 자기가치화하는 가치로 자본을 정의한다는 점을, 세계-체제 수준의 자본에도, 즉 국가부채와 세계화폐의 문제에도 적용할 수 있겠다는 사실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The reproduction and renewal of US Treasury debt as a global safe asset since 1971 – when the US abandoned the dollar gold standard and floated the dollar –is sometimes described as a system of autogenerative money, in which the US as economic and imperial power is able to issue and market its own debt and thus to sustain spending at the expense of the rest of the world, which has little option but to invest its surplus dollars in US Treasury bonds, which remain the safest of global assets. 


(미국이 달러 금본위제를 폐지하고 변동 환율제가 도입되면서) 1971년 이후로 미국 재무 부채가 지구적 안전 자산으로 재생산되고 갱신되는 상황은 종종 자동-생성 화폐체제로 묘사됩니다. 즉 경제 권력이자 제국적 권력인 미국이 자기 자신의 부채를 스스로 발행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나머지 세계에 자신의 지출 지속 비용을 전가하는 그런 상황입니다. 이때 미국 이외의 세계는 지구적 자산  중에서 가장 안전한 것으로 남아 있는 미국 재무부채에 잉여 달러를 투자하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지가 별로 없습니다.

Again we find a very interesting intuition of this situation in Marx’s work, particularly in the Grundrisse, where he is attempting to define the dynamics of capital at a world-systemic level. 


다시 한 번 우리는 맑스의 작업에서 이런 상황에 대한 매우 흥미로운 직관을 발견합니다. 맑스가 세계체재 수준에서 자본의 동학을 정의하려 시도하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입니다.


Here Marx imagines capital as a process of self-valorization that tends to include the globe in its systemic embrace, a proliferative movement of debt-based autopoesis that recognizes no finite limits to its expansion – either in space or time. 


여기서 맑스는 자본이, 자신의 체계적 포위 안에 지구를 포함하려는 경향을 띠는 자기가치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증식적 운동은 시간과 공간 모두에서 그 자신의 확장에 어떠한 유한한 한계도 인정하지 않는 부채-기반 자율생성 운동입니다. 

It seems to me that this description of the globalizing ambition of capitalist expansion is very closely realized in the contemporary form of US-centric debt imperialism.


제가 보기에는 자본주의적 확장이 갖는 지구화하는 야심에 대한 [맑스의] 이러한 설명은, 미국-중심 부채 제국주의의 현대적 형태에 상당 부분 현실화되어 있습니다.
This organization of US sovereign debt, I want to argue, not only generates a particular kind of monetary imperialism, but also a specific temporal imaginary which makes it very difficult to imagine finite limits in time and space, and almost impossible to imagine the depletion of resources.


제가 주장하는 것은 미국 국가부채의 이런 조직화가, 통화 제국주의의 일종을 생성할 뿐 아니라, 시공간의 유한한 한계를 상상하기를 굉장히 어렵게 하는, 그리고 자원의 고갈을 상상하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드는, 어떤 특정한 일시적 상상계를 생성한다는 점입니다. 


Unconsciously, I think, the temporal imaginary which informs our contemporary moment, an imaginary that can be found across the most diverse disciplines, is shaped by the peculiar dynamics of US capitalism, which after all draws all national economies in its wake a bit like a moon pulling the tides. 


제 생각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당대의 순간을 형성하는 이 일시적인 상상계는, 매우 다양한 분과들에서 나타나는 이 상상계는, 무의식적으로, 미국 자본주의의 기괴한 동학에 의해 모양 지어집니다. 그리고 미국 자본주의의 이 기괴한 동학은 달이 조수에 영향을 주는 것과 다소 유사하게, 모든 국가 경제가 자신을 따르게 만듭니다. 

When universal time is thought by analogy with sovereign debt, it appears to become self-regenerative or auto-poetic in the manner of US Treasury debt and therefore presents itself as inexhaustible.


보편적 시간[세계시간]을 국가부채에 유비하여 생각해 보면, 보편적 시간[세계시간]은 미국 재무부채의 방식으로 자기생성적이고 자율생성적인 것으로 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하여 보편적 시간[세계시간]은 고갈될 수 없는 것으로 자기 자신을 제시합니다. 
It seems to me that this imaginary goes some way toward explaining the endlessly oblivious and delusional character of popular political opinion in the face of climate change and ecological devastation more generally. 


제가 보기에 이 상상계는 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기후변화와 생태적 파괴에 직면한, 널리퍼져 있는 정치적 견해의 끝없이 부주의하고 망상적인 특징을 설명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됩니다. 


I use the word “delirium” in this context because I don’t think the concept of fantasy or market-fetishism quite captures what is at work here. 


저는 “망상”이라는 단어를 이런 맥락에서 사용합니다. 왜냐하면 환상이나 시장-물신주의라는 말은 여기서 작동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포착하는 데 다소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Freud tells us that the psychotic delirium, as opposed to the neurotic fantasy, is crucially concerned with the breakdown and recreation of whole worlds.


프로이트는 정신병적 망상은 신경증적 환상과 반대로 무엇보다 전 세계의 붕괴 및 재창조와 관련이 있다고 말합니다.


Delirium has a systemic and ontological ambition which needs to be distinguished from the representative logic of the fantasy.


망상은 환상의 표상적 논리와 구별될 필요가 있는 체계적이고 존재론적 야심을 갖습니다.


There is an effort to refashion the world not simply interpret it. 


망상은 세계를 해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개조하려 노력합니다.


In this respect, the concept of delirium, if we take it outside the immediate clinical context of psychoanalysis, has obvious affinities with Marx’s reflections on the self-transformative, world-expansive tendencies of capital. 


이러한 점에서 망상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그것을 정신분석의 직접적인 임상 맥락 밖으로 데리고 나오면) 자본의 자기-전환적이고 세계 팽창적인 경향에 대한 맑스의 성찰과 분명히 유사합니다.


But delirium is no less evident in the rhetoric of the bio-revolution, where speculative meditations on the future of life on earth are never far from the agenda. 


그리고 지구 상 생명의 미래에 대한 투기적 숙고가 항상 의제의 중심에 가까이 있는 생명공학 혁명의 수사법에서 망상은 마찬가지로 뚜렷이 드러납니다. 


This rhetoric isn’t merely peripheral to the real business of the life science industries--the delirium of contemporary capitalism, I want to argue in this book, is intimately and essentially concerned with the limits of life on earth and the regeneration of living futures--beyond these limits.


그러한 수사법은 생명과학 산업 분야의 실제 사업에서 단순히 주변적인 요소가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것은, 현대 자본주의의 망상은 지구 상 생명의 한계 및 ― 그러한 한계를 넘어 ― 산 미래를 재생하는 것과 긴밀하고도 본질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The response of American capitalism to the environmental movement – and to the multiple environmental crises of the 1960s and 70s – is exemplary in this regard.


환경운동과 1960~70년대의 여러 환경위기에 대한 미국 자본주의의 대응은 이러한 측면에서 하나의 전형이 됩니다.

Consider the landmark Report of the Club of Rome on Limits to Growth, published in 1972. 

“성장의 한계”에 대하여 1972년에 출간된 <로마클럽> 보고서를 생각해 봅시다. 


This report was a guiding document of the environmental movement: it detailed the multiple irreversible losses and ecological costs of the Fordist mode of production. 


이 보고서는 환경운동의 지도적인 문서 중 하나였습니다. 보고서는 포드주의 생산양식의 무수히 많은 되돌릴 수 없는 손실과 생태적 비용들을 설명했습니다.


It spoke of polluted soil, air and water, of chemical toxicities in pesticides and in the food chain. 


보고서는 오염된 토양, 공기, 물, 그리고 살충제들과 먹이사슬에 들어 있는 화학물질의 독성에 대해 말했습니다.


It spoke of galloping rates of extinction. 
그 보고서는 멸종률의 급상승에 대해 썼습니다.


It was one of the first documents to seriously speak of climate change or global warming. 
기후변화나 지구온난화에 대해서 진지하게 다룬 최초의 문서 중 하나였습니다.


And it adopted a systems perspective that saw the biosphere, the ocean and geology of the earth as intricately entangled and liable to system-wide breakdown.


또 이 보고서는 생물권, 지구의 대양, 지질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고 보았고 체계 전체의 와해가 일어날  수도 있다고 보는 체계 관점을 채택했습니다.


The focus on the earth as system was relatively new.


지구를 체계(시스템)로 바라보는 접근은 상대적으로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But in positing limits to industrial growth, the report harked back to a much older tradition in political economy, the tradition that from Thomas Malthus to William Stanley Jevons to Nicholas Georgescu-Roegen insisted that quantitative economic growth would at some point come up against ultimate, finite limits to its further expansion.


그러나 이 보고서는 산업생산에 한계를 부여하면서, 양적 경제성장이 어떤 시점이 되면 더는 확장이 불가능한 최종적인 한계에 직면하게 되리라고 주장하는, (토마스 맬서스에서 윌리엄 스탠리 제번스와 니콜라스 조지스큐-레겐에 이르는) 정치경제학에서는 꽤 낡은 전통을 들먹였습니다.
Marx was always very sceptical about limits to growth theories for both political and analytic reasons. 


맑스는 정치적인 이유와 분석적인 이유 둘 다에서 성장의 한계 이론에 대해 항상 회의적이었습니다.


First of all, theories like those of Malthus were often informed by a deeply conservative perspective on demographics and population that located the production of scarcity in biological processes and thus naturalized them. 


우선 맬서스 같은 이론은 희소성의 생산을 생물학적 과정에 위치시킴으로써 그것을 자연화하는, 인구학과 인구에 관한 매우 보수적인 관점을 취합니다. 


At an analytical level, Marx thought that the postulate of limits to growth failed to appreciate what he saw as the propensity of capital to perpetually drive beyond established or actual limits to growth through the speculative conjuring of new modes of production and new frontiers of accumulation. 


분석적인 수준에서 맑스는 성장의 한계라는 가정이 다음과 같은 점을 인정하는 데 실패한다고 보았습니다. 즉 맑스가 보기에 자본은, 새로운 생산양식과 새로운 축적 지대를 투기적으로 불러냄으로써 기정의 혹은 실제적인 성장의 한계 너머로 영속적으로 나아가는 성향을 갖고 있었습니다. 


As a specific kind of systems-formation and a specific mode of calculation, Marx was arguing, capitalism is not even capable of registering external limits to its further expansion – it recognizes only one limit, its own need to produce surplus value, that is profit or capital gains, from any mode of production, but is regularly driven to abandon existing modes of accumulation in favour of new ones.

맑스는 체계-형성의 특정한 종류이자 특정한 계산 양식인 자본주의는 그 자신의 확장에 외부적 한계를 등록할 능력조차 없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자본이 인정하는 한계는 단 하나, 어떤 생산양식을 통해서든 잉여가치 즉 이윤이나 자본수익을 생산할 자기 자신의 필요입니다. 그러나 자본은 기존의 축적양식을 포기하고 새로운 것을 찾도록 정기적으로 추동됩니다. 
This perspective helps to understand the official response – or rather non-response - to the Club of Rome report in the years that followed. 


이런 관점은 <로마클럽> 보고서 발간 이후 몇 년간 제출된 공식적 대응 ― 혹은 오히려 무대응 ― 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The 1970s were a period of crisis for the American petrochemical and pharmaceutical industries – the mainstays of Fordist mass production. 


1970년대는 포드주의 대량생산의 기둥들이었던 미국 석유화학 산업과 제약산업에 위기가 찾아온 시기였습니다. 

But this crisis was felt primarily in the form of declining profits rather than ecological threat. 

그러나 이 위기는 일차적으로 생태적 위협보다는 이윤의 하락으로 먼저 체감되었습니다. 


As is well known, American industries in general began to experience falling profits in this era as Japanese and European exports became increasingly competitive in international markets. 


잘 알려져 있듯이 이 시기에 일본과 유럽의 수출이 국제시장에서 점점 더 경쟁력이 있게 되면서 미국의 산업체들은 일반적으로 이윤 하락을 경험하였습니다. 


Especially hard hit was the whole arena of chemical production, which extended from plastics and fabrics, to fertilizers and herbicides to the pharmaceutical industry – the very stuff of Fordist mass manufacture and monoculture.


특히 강한 충격을 받은 것은 화학생산 부문 전반이었는데, 이 영역은 플라스틱에서 직물, 비료, 제초제, 제약산업에까지 이릅니다. 포드주의 대량 제조 및 단일경작의 핵심 제품들이었습니다.
The American petrochemical industry had flourished as a mass producer of tangible commodities after World War II but by the 1970s was faced with steeply declining profits, which were only exacerbated by the oil price shocks of 1973 and 1979. 


미국 석유화학 산업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유형 제품의 대량생산자로서 번영을 누렸으나, 1970년대 들어 급격한 이윤 감소를 겪게 되었고 상황은 1973년 및 1979년 석유 가격 파동으로 더욱 나빠졌습니다.


Around the same time, the profits that had come from exporting Green Revolution monoculture and chemical herbicides to the developing world were beginning to fall, at least partially as a result of their devastating environmental consequences. 


더구나 녹색 혁명의 대량 단일 경작과 화학 제초제를 개발도상국에 수출하면서 얻은 이윤 또한 줄어들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 중 적어도 일부는 파괴적인 환경 황폐화의 결과 때문이었습니다. [역자 주 : 녹색 혁명은 1960년대에 개량된 농산물 품종 및 화학 비료, 살충제, 개간 기술 등의 보급 및 확산으로 인하여, 개발도상국을 중심으로 식량 생산량이 전 세계적으로 크게 증가한 현상을 일컫는 표현이다.]


Within the United States itself, mounting pressure from the green movement, combined with increasing governmental regulation, meant that chemical industries were being forced to internalize the costs of their own waste production. 


미국 내에서도 정부의 규제가 증가하는 것과 더불어 환경 운동으로 인한 부담이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화학 산업은 자신들이 생산한 폐기물의 처리 비용을 스스로 감당해야 했습니다.

So if environmental limits were being recognized, it was only to the extent that these translated as limits to profitability.

이렇게 환경적 한계들은 그것이 수익성에 대한 한계로 번역되는 한에서만 인정되었습니다. 


The American pharmaceutical industry was similarly affected by a crisis of profitability at this time, in particular because the costs of new federal regulations introduced in the wake of the Thalidomide scandal.


미국 제약산업은 이 시기에 유사한 수익성 위기를 겪었는데, 특히 탈리도마이드 스캔들 이후 새로운 연방규제들로 인한 비용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역주 : Thalidomide. 1957년에서 1961년 사이에 임산부의 입덧 방지용으로 판매되었으나 그 부작용으로 40여 개국에서 1만 명이 넘는 기형아들이 태어났다. 이 비극의 발생으로, 이후 약물의 약효 및 부작용을 모두 파악하기 위한 검증 및 임상 시험 중 부작용 보고가 의무화되는 등 신약 허가 절차상의 기준이 보다 강화되었다.(『잉여로서의 생명』 49쪽)]

So it was in response to the commercial limits posed by regulation (rather than ecological limits per se) that the petrochemical and pharmaceutical sectors began to reorganize, to seek new frontiers of innovation that might allow them to reinvent themselves in a new, more profitable form. 


이런 점에서 석유화학 및 제약 부문의 재편은 (생태학적 한계라기보다는) 규제로 인한 상업적 한계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새롭고 보다 수익성 있는 형태로 재발명할 수 있는 새로운 혁신의 지대들을 추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It is at this point that these sectors start to look toward molecular biotechnology and new biotechnologies in general as a way of offsetting their declining profits.


바로 이때 이들 산업 부문은 하락하는 이윤을 상쇄하기 위한 방편으로, 전반적으로 분자 생명공학과 새로운 생명공학 쪽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So the 1980s was a period in which the American petrochemical and pharmaceutical industries embarked on a kind of self-imposed make-over, reinventing themselves--at least prospectively--as purveyors of the new, clean life science technologies. 


그래서 1980년대에 미국 석유화학 및 제약 산업은 새로운 무공해 생명과학 기술의 공급자로 ― 그때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미래에는 그렇게 되리라 예상했습니다 ― 탈바꿈하기 위해, 자신에게 스스로 부과한 일종의 단장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By the early ’80s, all the major chemical and pharmaceutical companies had invested in the new genetic technologies, either through licensing agreements with biotech start-ups or by developing their own in-house research units. 


1980년대 초반이 되면 모든 주요 화학 및 제약 기업들이 생명공학 신생 기업과의 특허사용계약 혹은 기업 내부 연구 조직의 확장을 통해 새로운 유전학 기술에 투자했습니다.


Even a notorious toxic-waste offender such as Monsanto was convinced that the extractive, petro-chemical industries that had fuelled the boom years of the Fordist economy were destined to be subsumed within the new paradigm of post-Fordist bio-production. 


독성 폐기물 배출로 악명 높던 몬산토 같은 기업도, 포드주의 경제의 호황기를 이끌었던 추출식 석유화학 산업은 새로운 포스트 포드주의 바이오생산 패러다임 안으로 포섭될 운명이라고 설득 당했습니다. 


It’s at this point that we see companies like Monsanto experimenting with all kinds of novel ways to reincorporate their former investments in petro-chemical processes into the ambit of bio-molecular science, taking the lead from recent successes in recombinant-DNA and availing themselves of new patent laws.


이때 몬산토 같은 기업은, 당시의 재조합-DNA 기술의 성공 사례를 따라서, 새로운 특허법을 이용하면서, 석유화학 공정에 대한 이전의 투자를 생분자 과학 분야로 통합시키기 위해 가능한 모든 새로운 방식을 시도하기 시작했습니다.


The commercial calculus was straight-forward--instead of profits from mass produced chemical fertilizers and herbicides, commercial agriculture would displace its claims to ownership onto the actual generation of the plant, transforming biological production into a means for creating surplus value. 

상업적 셈은 복잡하지 않았습니다. 상업적 농업 분야는 화학 비료와 제초제의 대량 생산에 따른 이윤 대신, 식물 자체를 생성하는 쪽으로 자신의 소유권 주장을 이전하고자 했습니다. 즉 생물학적 생산을 잉여가치 창출을 위한 수단으로 바꾸고자 했습니다.


Moreover, it was predicted that biotechnology would expand the geological spaces open to commercial agriculture, making it possible to create plants that would survive on arid land or flourish in the degraded environments created by industrialized agriculture. 


더구나 생명공학이 건조한 토지에서도 생존하거나 산업화한 농업으로 인해 황폐해진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식물을 창조하여, 상업적인 농업을 위한 지리학적 공간 확장을 이룰 것이라고 기대되었습니다.

The idea was that biotechnology would not only allow the old petrochemical sector to overcome the limits of industrial production and escape the costs of pollution, but also that it might eventually turn the waste products of industrialism into new sources of value generation. 


생명공학이 낡은 석유화학 부분으로 하여금 산업 생산의 한계를 극복하게 하고 오염의 비용에서 벗어나게 할뿐만 아니라, 결국 산업주의의 폐기물들을 새로운 가치 생성의 원천으로 바꾸리라는 생각이었습니다. 


Hence we find the idea of bioremediation - the idea that life itself would soon be put to work to metabolize and remediate all kinds of industrial waste, from chemical pollutants to nuclear fall-out. 


여기에서 생물적 환경정화라는 생각을 찾을 수 있습니다. 화학 오염 물질에서 방사성 낙진에 이르는 모든 종류의 산업 폐기물을 정화하기 위한 작업에 생명 그 자체가 곧 투입되리라는 예측입니다.


In short, the geo-chemical laws ruling over Fordist industrial production would be replaced by the much more benign, regenerative possibilities of bio-molecular production.


요약하자면 포드주의 산업 생산을 지배하던 지구화학적 법칙은 더욱 온건한 생분자적 생산의 재생적 가능성으로 대체될 것이었습니다. 

Let us be very clear – when we talk about the tendency of capital to drive beyond limits, what we’re talking about are limits to profitability, not limits to environmental sustainability or the inhabitability of the earth.


분명히 해둘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한계 너머로 운동하는 자본의 경향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수익성의 한계를 말하는 것이지 환경적 지속가능성이나 지구의 서식가능성에 대한 한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What this has meant in practice is that companies have often used new biotechnologies as a way of diversifying their profit sources, without actually overcoming the polluting effects of petrochemicals.


이것이 실제로 의미한 바는, 기업들이 석유화학제품들의 오염적인 효과를 실제로 극복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수익원천을 다양화하는 수단으로 새로운 생명공학 기술을 자주 사용하였다는 것입니다.

A case in point here is Monsanto’s genetically modified soybeans, which were first introduced in 1994. 


여기서 중요한 사례는 1994년에 처음 도입된 몬산토의 유전자변형 콩입니다. 


These soybeans were engineered to be resistant to a chemical herbicide that was also produced by Monsanto.


이 콩은 몬산토가 생산한 한 화학 제초제에 저항력이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So it meant that farmers were using even more herbicides than in the past and that herbicide resistant weeds evolved very rapidly – in fact these mutations very conveniently drove successive updated versions of Monsanto’s genetically modified crops.


따라서 농부들은 과거보다 더 많은 제초제를 사용하게 되었고 제초제에 저항력이 있는 잡초가 급속도로 진화하였습니다. 사실 이런 변이들은 몬산토의 유전자변형 농산물이 계속 업데이트되어 출시되도록 하는 성공적인 동력이 되었습니다.
The process by which one sector of capital pushes beyond limits to profit in no way invalidates older methods of production, which may continue to be profitable at other levels of the global production chain.


자본의 한 부문이 이윤의 한계 너머 가려는 상황은 절대로 낡은 생산방식을 무효로 만들지 않습니다. 구 생산방식은 지구적 생산사슬의 다른 차원들에서 계속 수익을 낼 수 있습니다.


So in the very same period that we have seen a push to move into the frontier of green or bioproduction, we have also seen an intensification of fossil fuel extraction. 


이렇게 녹색생산 혹은 바이오생산의 지평으로 향하는 이동을 목격한 것과 동일한 시기에 우리는 또한 화석연료 추출의 심화를 보았습니다.


The rise of China has spearheaded a massive resources boom and in countries such as Australia, a renewal of old efforts to dispossess indigenous people of their land.


중국의 부상은 호주 같은 나라들에서, 선주민들에게서 그들의 땅을 강탈하려는 과거의 시도들이 재개되는 방식으로, 대량 자원 붐을 이끌고 있습니다. 


The rising political costs of trading with Saudi Arabia has driven the United States to repatriate much of its fossil fuel production and to invest in new, highly polluting modes of extraction such as hydraulic fracking.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교역에 따르는 정치적 비용이 상승함에 따라 미국은 자국의 화석연료 생산의 상당량을 본국에서 진행하게 되었고, 프래킹 같은 환경오염의 정도가 심한 새로운 추출 방식에 투자하게 되었습니다.


We are seeing a kind of Cold War race to appropriate the deep sea resources that are expected to become available with the melting of the polar ice caps. 


우리는 극지방의 해빙으로 사용 가능하게 될 것이라 예상되는 심해 자원의 전용을 둘러

싼 일종의 냉전 식 경주를 목격하고 있습니다.


This last example perfectly encapsulates the delirious character of the capitalist calculus of limits – the impending ecological crisis represented by the melting of the polar ice caps is here registered as the opening of a new frontier of resource extraction, even though this very method of resource extraction threatens the sustainability of human life on earth.


이 마지막 사례는 자본주의의 한계 계산의 망상적 특징을 완벽하게 요약하여 보여줍니다. 여기서 극지방의 해빙이 표상하는 임박한 생태위기는 새로운 자원 추출 영역이 열리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 자원 추출 방식 자체가 지구 상에서 인간 생명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하는 데도 말이다. 
How are we to respond to all of this? 


이 모든 것에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까요?


We are seeing, quite rightly, a renewal of old movements to protest the resurgence of the extractive industries, fights over land rights and over industrial pollution etc.


우리는 꽤 적절하게도, 추출 산업의 부활에 저항했던 이전의 운동들의 재개를, 그리고 토지권과 산업 오염을 둘러싼 싸움들의 재개를 목격하고 있습니다. 


And in a sense the repatriation of fuel extraction to places like the United States and Australia is a positive move, in that it forces those who use the most energy to confront its effects in their own backyard.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연료추출이 미국이나 호주 본국에서 이뤄진다는 것은 긍정적인변화입니다. 왜냐하면 가장 에너지를 많이 쓰는 자들이 자기 뒷마당에서 그 에너지 사용의 효과와 직접 대면할 수밖에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The devastation wrought by energy extraction has not become worse, it has simply come home to remind us that it was never overcome.


에너지 추출이 가져오는 대대적인 파괴는 더 심각해졌다기보다 그것이 결코 극복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기 위해 본국으로 되돌아온 것뿐입니다. 
The need to develop new sources of energy and food production is as urgent as ever then. 


그렇다면 에너지 생산과 식량 생산을 위하여 새로운 원천을 개발하는 것이 여전히 긴급한 과제입니다. 


Yet it is important remind ourselves that most of the alternative forms of energy being developed, even in the most speculative ways, entail their own forms of exclusion and appropriation. 


그러나 현재 가장 투기적인 방식으로라도 개발 중인 대부분의 대안 에너지 형태들이, 모두 각자 그 자체로 배제와 전용의 형태를 수반한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Witness the worldwide food shortage created by the boom in biofuel production.


바이오연료 생산 붐이 창출한 전 세계적 식량 부족 현상을 보십시오. 
It is also important to remember that in the current conjuncture any source of energy that cannot be captured in the legal form of a financial asset, any form of energy that doesn’t lend itself to the extraction of interest or royalties, is precluded from state investment and further exploration. 


또 다음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현재의 국면에서 금융자산이라는 법적 형태로 포착될 수 없는 에너지원천은, 그리고 이자나 로열티 추출에 적합하지 않은 에너지 형태는, 그것이 무엇이든 국가적 투자나 추가적인 촉진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The environmental and health costs of energy innovation will never be addressed as long as limits are only calculated in an economic register.


한계가 경제 수치로만 계산되는 이상 에너지 혁신의 환경적이고 보건적인 비용은 절대로 논의될 수 없습니다. 
Here we return to a question that was at the heart of economic debate at the end of the Great Depression and which is returning to the table in a context of so-called “secular stagnation,” where economic growth seems to have stalled indefinitely. 


여기서 우리는 대공황 끝 무렵에 경제 논쟁의 핵심에 있었던 질문, 그리고 경제성장이 무기한 정체된 것처럼 보이는 소위 “장기침체”라는 맥락에서 다시 화두가 되고 있는 질문으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This is the question of how to finance and protect public or common resources, from energy to environmental resources and infrastructure. 


에너지에서부터 환경적 자원과 기반시설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공적이고 공통적인 자원에 재정을 지원하고 그것들을 보호할 수 있는가입니다. 


There was a certain recognition, after the Great Depression, that resources such as water needed to be provided for free or subsidized, that is precluded from private appropriation, if we were not to deplete them entirely.


대공황 직후에는, 물 같은 자원은 완전히 고갈되는 것을 피하려면 무료로 제공되거나 지원되어야 하며 사적으로 전유되어서는 안 된다는 특정한 인식이 있었습니다. 


In fact, there was a recognition that economic growth itself depended on the public provision of such resources, even though left to itself, private enterprise would never agree to such an arrangement.


실제로 경제성장 자체가 이런 자원의 공적 제공에 의존한다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만일 자원을 내버려 둔다면 사기업들이 그러한 조치에 결코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말입니다. 


There is a notion of gratuitousness and freedom at work here that actively precluded the private appropriation of resources. 

여기서 작동하는 것은 자원의 사적 전유를 적극적으로 불가능하게 한 무상과 자유라는 생각입니다. 


And yet the 20th century notion of public infrastructure was confined to the nation-state and therefore actively ignored the global, non-linear consequences of industrial production – the possibility that is, of climate change as a systemic event wrought by the cumulative side-effects of burning fossil fuels.


그러나 20세기의 공공 기반시설이라는 개념은 국민국가로 제한되었고, 그로써 산업생산의 지구적이고 비선형적인 귀결들은 적극 무시되었습니다. 즉 화석연료 사용의 부작용 누적이 초래한 체계적 사건인, 기후변화의 가능성 말입니다. 
Today we need to renew the call for the deprivatization of natural, biological and biospheric resources and yet we can no longer assume that these resources are containable within the space of the sovereign nation or indeed that they constitute a resource as such, extraneous to human existence.

오늘날 우리는 자연자원, 생물학적 자원, 생물권적 자원의 탈사유화 요청을 재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자원의 문제가 주권국가 공간 안에서 해결 가능하다거나 이런 자원이 인간 존재에 외적인, 보통 말하는 그런 의미의 자원이라고 더는 상정할 수 없습니다. 


What used to be called infrastructure is infra in the sense of being internal to us, constitutive of our existence, and connective beyond the structure of the nation state, across national and species boundaries.

인프라스트럭쳐(기반시설, infrastructure)이라 불리던 것은 이제 우리 자신에 내적이라는 의미에서 인프라[infra, 특정 한도 이내이거나 그것을 넘어섬을 나타내는 접두사 - 역자]이며, 우리 존재를 구성하며, 국경과 종 경계를 가로지르며 국민국가 구조 너머로 연결적입니다. 


How this infrastructure can be shared and renewed without further aggravating depletion or systems breakdown is the critical question before us. 

이런 기반시설이 고갈과 체계의 와해를 더 악화하지 않고 어떻게 공유되고 재건될 수 있을까 라는 문제가 우리 앞에 놓인 결정적인 문제입니다. 


This cannot only be a question of sharing so-called resources but also must involve a sharing of the many sedimented toxicities that have been left behind by the extractive industries and the incalculable exposures that lie before us as a consequence of climate change. 


이것은 소위 자원을 공유하는 문제일 뿐 아니라 기후변화의 결과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추출 산업과 계산불가능한 노출들이 남긴 수많은 독성 찌꺼기들을 어떻게 공유할 것인가라는 문제도 포함해야만 합니다. 


The one thing we can be sure about today is that the risks of environmental destruction are not being shared equally among us, that these risks are borne disproportionately by the racialized poor and the former colonies of the world. 


분명한 것은 오늘날 환경 파괴의 위험을 우리가 동등하게 체험하고 있지 않다는 것, 그 위험들이 인종화된 빈곤층과 과거에 식민지였던 세계의 지역들로 불균형적으로 전달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It is a question then not of pre-empting and overcoming incalculable risks through the endless positing of a new horizon of accumulation, but of redistributing the risks we cannot avert.


그렇다면 새로운 축적의 지평을 끝없이 설치함으로써 계산 불가능한 위험을 방지하고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위험을 재분배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잉여로서의 생명』은 어떤 책인가? (표지를 클릭하세요)




『잉여로서의 생명』(멜린다 쿠퍼 지음, 안성우 옮김, 갈무리, 2016)

이 책은 정치적 힘이자 경제 정책으로서의 신자유주의의 부상을 논의하지 않고서는 생명기술의 역사를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명징하게 보여 준다. 1970년대 재조합 DNA 기술의 발전에서부터 줄기세포 연구에 이르기까지, 쿠퍼는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유토피아적 주장을, 점증하는 상업주의적 생명 과학 내부의 모순과 연결시켜 보여 준다.    




함께 보면 좋은 갈무리 도서 (표지를 클릭하세요)




『인지자본주의』(조정환 지음, 갈무리, 2011)

'인지자본주의'는 인지노동의 착취를 주요한 특징으로 삼는 자본주의이다. 우리는 이 개념을 통해서 현대자본주의를 다시 사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노동의 문제설정을 새로운 방식으로 제기할 수 있다. 이 개념을 통해서 우리는, 금융자본이 아니라 인지노동이 현대세계의 거대한 전환과 사회적 삶의 재구성을 가져오는 힘이라는 생각을 표현할 수 있고, 그 노동의 역사적 진화와 혁신의 과정을 중심적 문제로 부각시킬 수 있다.   



『텔레코뮤니스트 선언』(드미트리 클라이너 지음, 권범철 옮김, 갈무리, 2014)

저자는 벤처 코뮤니즘의 개념을 발전시키면서, 자본주의 내로 문화를 포획하려 하는, 자유소프트웨어와 자유문화에 대한 기존의 자유주의적 관점과 카피라이트(copyright) 체제에 대해 비판한다. 클라이너는 카피파레프트(copyfarleft)를 제안하면서, 또래생산 라이선스의 유용한 모델을 제공한다.



『자본과 정동』(크리스티안 마라찌 지음, 서창현 옮김, 갈무리, 2014)

일본의 도요타 공장에서 가장 최근의 혁신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새로운 노동형태 모델의 전개를 추적하는 마라찌의 비판은 정치경제학을 뛰어넘어 사회생활, 정치참여, 민주제도, 개인들간의 관계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에서 언어가 차지하는 역할 등과 관련된 논점들을 망라한다.   



『베르그손, 생성으로 생명을 사유하기』(황수영 지음, 갈무리, 2014)

베르그손, 깡길렘, 시몽동, 들뢰즈라는 네 명의 철학자들을 생명과 생성이라는 키워드로 엮는 독창적인 관점을 보여 준다.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보편적인 주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1부에서는 생명철학의 측면에서 베르그손의 진화론을 현대의 진화 이론들, 특히 신다윈주의 및 고생물학자 굴드의 이론과 비교하면서 베르그손의 진화 이해에서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통찰이 무엇인가를 찾아낸다. 2부와 3부는 베르그손 철학의 두 면모인 생명철학과 생성철학이 이후 어떻게 분기하여 후대의 철학자들에게 계승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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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 김명환의 삐라의 추억 [자율평론 54호] 삐라의 추억 / 김명환 시인 2017.10.02 129
245 이 책을 주목한다 [자율평론 53호] 『집안의 노동자』 서평 ― 국가는 가족과 여성을 왜 재편성하였는가? / 한태준 / 다지원 여성주의 세미나 길잡이, 『남편도감』 옮긴이, 일본영화연구가 2017.09.24 115
244 이 책을 주목한다 [집안의 노동자] 서평회 발표문 모음 2017.09.23 103
243 이 책을 주목한다 [자율평론 53호] 재생산을 중심으로 뉴딜 정책 다시 보기 ― 복지국가가 기획한 가족과 여성 / 남승현(이화여대 여성학과) secret 2017.09.23 1
242 강연 [자율평론 53호] 인지자본주의와 커뮤니케이션 /조정환(다중지성의 정원) 2017.09.22 81
241 이 책을 주목한다 [자율평론 53호] 노동하는 여성들의 다양한 정체성 / 박재연 (예술사학자, 문화예술교육그룹 Art PicNik) 2017.09.22 117
240 이 책을 주목한다 [자율평론 53호] 가족, 국가, 복지와 여성의 관계를 고민하기 / 박해민(연세대학교 문화학협동과정) 2017.09.21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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