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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환의 삐라의 추억
2017.01.10 14:33

[자율평론 51호] 비애 / 김명환 시인

조회 수 138 추천 수 0 댓글 0

김명환의 삐라의 추억 5

 

비애

 

 

 

“사북역에 내렸을 때, 무언가가 가슴을 치지 않으면, 거기, 몇 달이고, 몇 년이고 있어도 소용없어. 넌 글쟁이가 아니니까. 바로 올라오는 차를 타고 돌아와!”

1987년 겨울이었다. 사북에 거처를 마련해 준 조세희 선생이 작별인사차 들른 내게 말했다. 청량리역에서 사북역까지 가는 동안 두려웠다. 가슴을 치는 무언가가 없으면, 돌아와야 한다. 사북역에 내렸다. 무언가가 묵직하게 가슴을 쳤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광산노동자들과 소모임을 했다. 토론 결과를 시의 형식으로 정리하고 함께 읽으며 고쳤다. 노동자들은 정리된 시를 유인물로 만들어달라고 했다. 인근에서 유일하게 복사기가 있던 도계성당에서 시 5편으로 삐라 200마리를 만들었다. 토론에 참여한 10여 명의 노동자들은 가명을, 나는 실명을 표지에 넣었다. 탈의실 옷장에 배포했다. 그 탄광에 다니고 있던 나와 이름이 같은 노동자가 붙잡혀 곤욕을 치렀다는 말은 사북을 떠나고 나서 들었다. 정치지망생이었던 사용자에 대한 신랄한 풍자가 사단을 일으킨 모양이었다.

 

술을 마시고 밤늦게 어두운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갑자기, 멀리 앞쪽에 있던 1톤 트럭이 시동을 걸었다. 트럭이 내게 질주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길가 화단으로 몸을 날렸다. 트럭은 화단 턱에 부딪쳐 튕겨나갔다. “미친 자식, 술 처먹었나!” 투덜대며 집에 오자마자 골아 떨어졌다. 다음날 밤에도 술을 마시고 늦게 어두운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멀리 앞쪽에 있던 1톤 트럭이 시동을 걸었다. 나는 차가 다닐 수 없는 골목길로 뛰었다. 문득, 며칠 전에 걸려온 전화가 떠올랐다. 토론에 참여했던 광산노동자들 중 한 명이 안부전화를 했었다. 그 길로 다른 지역으로 떠났다. 무서웠다. 안기부보다, 보안대보다, 경찰보다 무서웠다. 6개월이나 지나서 집에 돌아왔다. 글을 쓴다는 게, 삐라를 만든다는 게,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라는 걸 비로소 알았다.

 

세월이 흐르고, 그때, 사북역에 내렸을 때, 내 가슴을 치던 묵직한 것이, “목숨을 걸어야 하는 노동”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산굽이 돌아 사북에 이르면 슬픔이 묻어난다

저물어 돌아가는 길을 따라 어둠이 내리고

저린 가슴으로 견뎌온 생애가 등성이 넘어

보이지 않는 빛살로 다가오면

가난을 사고파는 시장

어두운 골목으로 아이들이 달려가고

몸살을 앓던 젊음은 탄더미로 묻히는데

끝모를 어둠으로 내려가는 갱도를 따라

지친 육신은 잠겨들고 희미한 불빛으로

바라볼 수 있는 희망은 지척일 뿐

더 깊은 어둠으로 들어가야 하는

내일은 보이지 않는다

 

- 졸시 「사북에 이르면」 전문

 

사북에서 쓴 시를 다시 읽으며, 그때, 사북역에 내렸을 때, 내 가슴을 치던 묵직한 것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노동을 하는 “비애”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 김명환은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84년 사화집 『시여 무기여』에 시 「봄」 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89년 월간 『노동해방문학』 문예창작부장, 2000년 ‘철도노조 전면적 직선제 쟁취를 위한 공동투쟁본부’ 기관지 『바꿔야 산다』 편집장, 2007년 철도노조 기관지 『철도노동자』 편집주간으로 활동했다. 시집 『첫사랑』, 산문집 『젊은 날의 시인에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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