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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실험

― 브라이언 마수미의 『가상과 사건』에 대한 에세이 서평 ―

 

이름 (무위예술가)

 

 

만약 당신이 “지각 가능한 것만이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나는 당신의 출입이 잦은 공공도서관이나 개인 책장의 철학과 과학서 사이에 『가상과 사건』이라는 책을 꽂아 두겠습니다. 책의 두께와 디자인이 눈에 잘 띄지 않을 만큼만 세련된 표지의 책이라는 가시적인 판단은, 곧 이 책의 잠재성이 당신에게 어떻게 사건으로 발생하는가를 관조하기 위해 유보합니다. 철학적 사유는 과연 여기서부터 시작될까요!
 
처음 마수미의 가상에 관한 이론을 나는 땀구멍으로 읽으면서 땀방울 같은 이런 류의 전제들부터 대면해야 했다. ‘ “지각 가능한 것만이 존재한다”고 확신하는 이들에게는 위험하거나 무모할 수 있는 내용이기에 권하고 싶은 책이나 전달하는 때와 방법이 중요하다 …… ’ 이런 판단과 고려가 동시에 범하는 무례함이 있는데 이는 ‘과연 “지각 가능한 것만이 존재한다”고 믿는 헛똑똑이들이 얼마나 될까/많을까!’ 라는 주관적 기우로 결국 “지각 가능한 것만이 존재한다고 믿고 싶은 사람들”로 고쳐 쓰게 된다.  

 

그러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지각 가능하지만은 않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더 많다고 생각하는 독자로서의 내 경험을 참조하면, 『가상계』에 이은 『가상과 사건』에서 철학과 과학의 경계가 애매할 정도로 가로지르는 마수미의 사유는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주관적이고 물질적인 다른 두 세계의 구분과 영역을 무색케 하면서 저자가 비중 있게 다루는 개념들인 가상과 사건, 활동주의 철학이나 체험된 추상 그리고 사건 발생적 예술에 대한 확고한 고정관념을 가진 독자에게는 난감함이나 난해함을 담보한 탐험의 여정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브뤼노 라투르의 책에 대한 첫 인상과 공통점이 있다. 

 

구체적으로 이제까지 추상화 개념이 준 영향으로 “확고부동한 현실의 질서”를 따르고 규범화하는 독자들이 처음 이 책을 맞닥트린다면, ‘낭만적 관념’이라는 소회의 진동을 내뱉을 수 있다. 기꺼이 자신의 눈으로, 손가락으로 스승인 예수의 못 자국 상처를 지각으로 확인 가능한 것만 믿는 도마의 후예들 역시, 이 책을 대할 때 자신이 진공 상태에 던져지는 불안감으로부터 회피하고 싶을 것이다. 

 

따라서 독자들은 “추상이 그간 이성의 영역으로 환원되어 온 개념이었음을 상기시키고, 20세기 이래로 고착되어 가는 추상의 개념을 구제”하고자 한다는 마수미의 추상에 대한 연구의도를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덧붙이자면, “체험된 추상”이란 명제와 함께 “구체적인 것에 채 담기지 않는 생명의 퍼텐셜(potential)을 긍정하는” 방식으로 전개하는 설명에서 마수미 특유의 구상과 추상의 관계를 볼 수 있다. 특히 “지나가면서 현재를 알리는 미래성의 느낌”이자 “순간의 핵심에서 관계성을 표현하는 그 느낌”에서나 “체험된 추상으로서 가상은 유아론적으로 사유에 빠진 주체의 반영이 아니며 관계적으로 변화에 빠져 있는 세계의 반영”이라는 마수미의 주장에서 비약컨대 나로 하여금 관계미학의 형태론을 작위적으로 떠올리게도 한다. 

 

무엇보다 저자는 예술품에 내제된 관계성에 주목하며 미적 차원만큼이나 정치적인 것이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는 것을 창조적 활동 전반에 적용함으로써, 예술실천으로서 활동주의 예술에 대한 고찰을 폭넓게 시도한다. 따라서 저자는 자신이 천착하게 되는 활동주의 철학과 사건발생적 예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입장을 정리한다. “활동주의 철학은 주체-대상의 2항적 관계를 극복하고 형상의 역동성을 사유하고자 하며 ‘사건의 발생’이라는 관점에서 다양한 예술적 실천의 정치성을 말한다.” 오늘날 한국의 미술인들에게 유독 뜨거운 화두가 되고 있는 ‘예술과 정치’라는 영역을 염두에 두고 읽자면, 마수미는 예술과 정치를 동시에 사유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치적 구호를 전달하는 정치적 예술과는 구분”해서 사건과 발생을 통해 역설함에 주목하게 된다.  

 

『가상과 사건』에서 주로 인용되는 윌리엄 제임스,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질 들뢰즈의 입장은 마수미가 비중 있게 수용한 이론으로서 저자 사유와 궤적을 함께하나, 그 외에도 이 책에서 회자된 여러 (예술) 철학자들과 예술작품에 대한 독자의 이해부족을 감안한다면, 부피와 두께에 비해 집중력을 요하는 책이다.

 

와중에 『가상과 사건』의 구성은 마수미의 이론적 맥락을 재구성하기에 적절히 유기적이다. 2장 「벌어지는 것에 대한 사고-느낌: 근본적인 것을 경험론으로 되돌려 놓기」의 인터뷰 형식으로 풀어놓은 전달방식에서 마수미 이론의 표정과 현장감이 생생하게 전달된다. 글쓰기 형식의 변화를 통해 예술작품과 지각작용의 상호작용이 섬세하거나 확장적으로 사유되고 서술된 것은 이론연구보다 예술작업을 현장에서 해 온 예술가들에게 더욱 관심을 끄는 논제들이기도 하다.  
 
이 책의 기능적인 면을 들라면, 그간 예술장에서 시도되어 왔던 학제 연구나 숱하게 펼쳐졌던 다원예술에서의 크로스오버 형식들의 한계 지점들을 상기시킨다는 데 있다. 만약 그것이 사상적, 이론적 근간에 대한 결핍에서 기인한다면, 브라이언 마수미의 주장은 흥미롭고 충분히 고무적이다. 그 동안 관람자나 관객들이 예술작품 앞에서 서성이며 땀방울처럼 솟아나던 의문과 궁금증은 어느 독자가 가상실험 중 책장에서 무심히 발견한 『가상과 사건』과 함께 사건발생적 예술로 증폭되어 다가 올 수 있다. 

 

마수미는 결론적으로 “단순한 가상이 되지 않는 이상, 또한 예술작품이기를 멈추지 않는 한 어떤 예술작품도 완전히 생생하게 나타날 수 없다.” 라는 벤야민의 문구를 인용하며 이 책을 마무리한다. 그리고 『가상과 사건』의 가상실험으로서의 서평도, 나의 예술적 멈춤도 이렇게 시작하면서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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