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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align=center><span style="font-size:10pt;"><b>다중이 실패했다고?</b></span></p>
<hr size=1 width=100%><font color='#483d8b'>이 글은 조정환 선생님의 블로그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출처는 http://amelano.net/1499</font> ■ 편집자주<br><hr size=1 width=100%>
2009년 11월 27일 오후 4시부터 7시 30분까지 백남준 아트센터에서 '자율주의와 한국 사회운동' 토론이 있었다. 질의응답 과정을 가상적으로 새롭게 구성한다면 다음과 같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아래의 문답은 실제의 문답과정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아멜라노
문: 촛불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는데요. 다중이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아닌가요?
답: 다중의 촛불봉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면 1987년의 노동자대투쟁도, 1980년 5월의 민중의 반란도, 1968년의 시민혁명도, 1935년의 민중반란도, 1917년의 볼셰비키혁명도, 1870년의 코뮌도, 뮌처의 농민반란도, 스파르타쿠스의 노예반란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노예도, 농민도, 노동자도, 민중도 모두 실패했다는 의미를 함축하면서 다중의 실패를 추론하는 것인가요?
문: 촛불은 유독 아무 것도 얻은 것 없이 사라졌습니다.
답: 얻은 것의 정도로 혁명을 평가하려는 것은 혁명을 상행위와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손에 뭔가 거머쥐는 것이 목적이라면 혁명을 하기보다 스펙을 쌓고 경쟁에서 이기고 뒷거래를 잘하는 능력을 키우는 편이 더 나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혹은 요즘 일단의 학생들이 그러듯이 집단적으로 말입니다. 안 그런가요?
문: 촛불이 달성하고자 한 것이 모두 거품으로 돌아갔다는 의미입니다. 미국소 수입도, 대운하도, 교육민영화도 착착 진행되고 있지 않습니까?
답: 촛불을 이명박 정부의 정책에 대한 비판운동 정도로 축소한다면 그런 평가가 가능하겠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투쟁은 투쟁이 내거는 요구나 슬로건 이상을 함축합니다. 권력에 대한 항의, 존엄의 선언, 새로운 삶의 가능성에 대한 단언... 실제로 역사의 모든 투쟁들에서 객관적 요구들이 쟁취되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설명 쟁취되는 경우에도 쉽게 회수됩니다. 그렇게 객관적 요구들이 쟁취되지 않는 과정이 반복되는데도 혁명들, 반란들, 투쟁들이 계속되는 것은 바로 그 객관적 요구들 이상을 혁명들이 함축하고 바로 그 지점에서 승리가 계속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문: 패배하는데 승리한다구요?
답: 그렇습니다. 맑스도 이미 말한 바 있지만 노동자들의 투쟁들에는 늘 패배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습니다. 하지만 그 투쟁들이 활력의, 제헌권력의 실재성을 단언하고 투쟁에 참여하는 특이성들의 협력의 필요성을 가르치고 또 그것을 달성하게 하는 한에서 모든 투쟁들은 승리하는 것입니다.
문: 너무 낙관적으로 사태를 평가하시는군요. 촛불이 패배하고 나서 개개인들은 더욱 치열한 경쟁 속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답: 개개인들의 수준에서 사태를 보면 그럴지도 모릅니다. 투쟁, 반란, 봉기, 혁명의 과정 밖에서 개개인들은 서로 경쟁할 수밖에 없도록 내몰리니까요. 그렇지만 경쟁은 항상 제한적이며 근본적이지도 않습니다. 자본은 다중의 경쟁을 자신의 계급투쟁에 유리한 방향으로 이용할 수 있지만 그것을 착취할 수는 없습니다. 즉 경쟁하기만 하는 노동자들은 자본에게 가치있는(즉 잉여가치를 가져다주는) 존재가 아닙니다. 자본은 어떤 형태로건 노동하는 사람들이 협력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자본이 착취하는 것은 노동하는 사람들 사이의 협력이지 경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생께서 경쟁을 중심으로 개인들의 관계를 바라볼 때 자본관계 속에서조차 필연적으로 강제되는 이 협력의 관계를 놓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근본적인 것은 경쟁이 아니라 협력이라는 점에 선생께서 갖고 있는 시각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문: 자본 속의 협력을 과대평가하시는 군요. 그것은 자본을 위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속에서 노동자들은 노예임을 면치 못합니다.
답: 그렇습니다. 자본관계 속에서 노동자는 노예입니다. 하지만 투쟁과 반란과 혁명에 나서게 되는 것은 노예인 바로 그 노동자이고 그 노동자가 단순한 노동자가 아니라 인간임을, 자유인임을 선언하면서 스스로 변형되는 순간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바로 자본관계 속에서 발전되어온 사람들 사이의 협력을 바탕으로 합니다. 혁명의 힘과 의미는 바로 이 변형을 실재화하는 데 있습니다. 정체성이 파열되어 특이성으로 되며 가치생산적 협력이 공통체생산적 협력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문: 지식인인 선생께서 혁명에 아무리 그러한 의미부여를 해봐야 실제의 다중은 맑스도 네그리도 알지 못하며, 얻을 것이 없으면 물러나고, 의식 속에서는 자유주의나 민족주의에 가까운 이데올로기를 반복할 뿐입니다.
답: 지식인이라는 이름을 사양하고 싶어지는군요. 선생께서 다중과 분리된 위치에서 지성작업을 하는 사람을 부르기 위해 그 이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지식인의 위치에서라면 혁명은 관조될 수는 있지만 사유될 수는 없고 해석될 수는 있지만 실천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나의 입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의 생각에 따르면 다중은 모두 지식인이기도 합니다. 디자이너나 의사, 간호사가 지식인이듯이, 한 사람의 농부도 지금은 토양, 천문, 화학, 생태 등에 관한 박물학적 지식인이지 않으면 안되도록 강제되고 있고 그 경향은 점점 강화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 그렇다고 촛불의 다중이 맑스나 네그리의 다중을 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답: 촛불의 다중이 맑스나 네그리를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나 자신이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촛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점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어떤 지휘부도 없이 봉기적 행동을 훌륭하게 조직해 냈다는 점입니다.
문: 자유주의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한계 속에서겠지요.
답: 아닙니다. 자유주의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한계를 넘어서입니다. 리얼리즘에서 방법이 세계관을 넘어서는 힘을 갖듯이, 다중의 봉기적 행동은 다중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가졌던 세계관들을 넘어서는 힘을 갖습니다. 봉기의 생명력은 변형, 변이에 있기 때문에 설명 개개인들이 자유주의나 민족주의를 갖고 있었더라도 봉기행동의 전진은 그 세계관의 틀을 넘어서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중은 하나의 이념 형태로서의 일관된 세계관으로 통일된 집단을 지칭하기 위해 고안된 이름이 아닙니다. 그것은 과정 속에서 혼종되고 변이하며 이 다양성과 이질성들이 서로 공통평면에서 움직이게 되는 공통화의 특질을 파악하기 위해 발명된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제의 '그/녀'가 오늘도 바로 어제의 '그/녀'라고 생각해야 될 아무런 근거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불안정, 변이, 유동, 유연은 우리 삶의 중요한 요소로 되었고 다중의 제도화는 바로 이 변이성의 제도화 이외의 다른 것으로 나타날 수 없습니다.
문: 그런 '넘어섬'의 능력이 있었다면 촛불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없지 않았을까요?
답: 처음 문제로 돌아왔군요. 촛불이 사라졌다고 보는 것은 선생의 눈입니다. 인간이 보지 못하는 밤에 부엉이는 100배 이상되는 야간시력으로 사물을 분간합니다. 더 깜깜해지게 되면 부엉이는 시각이 아니라 청각으로 대상과 자신의 관계를 지각합니다. 사라졌다는 것은 선생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지 그것이 없어졌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다중의 형성운동을 지각하기 위해 더 높은 시력, 그리고 다른 감각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다중의 자기형성적 여정은 지금 2008년 거리운동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그것은 금융위기와 경제위기 속에, 이명박과 한나라당의 두려움 속에(이대로 가다간 정권 잃는다), 야당들의 행보 속에, 공무원노조의 통합움직임 속에, 용산의 끈질긴 저항 속에, 새로운 결집의 기회를 기다리는 인내심 속에, 2008년이 무엇이었던가를 성찰하는 토론 속에 ..... 흩어져 있습니다.
문: 정말 선생께서는 혁명이 가능하다고 보며 그것을 진정으로 꿈꾸는 것입니까?
답: 혁명이 불가능하다는 전제위에서 나오는 질문인 것 같은데요.
문: 그렇습니다. 나는 혁명이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답: 그랬군요. 나는 혁명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일상적으로도 늘 전개되고 있으며 나 자신이 그 속에 참여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모든 역사적 혁명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처럼 보이는데도 혁명이 중단되지 않는다는 것은 혁명의 불가능성을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혁명이 영원하다는 것, 그것은 옮은가 그른가, 가능한가 불가능한가의 담론적 심판과 해석을 넘어서 혁명 그 자체의 존재론적 실재성을 웅변하는 사태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문: 생각의 차이가 분명하군요.
답: 생각의 차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능의 차이입니다. 혁명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주권의 도구로서 기능하기 시작합니다. 왜냐햐면 주권권력이야말로 혁명의 한계와 그 불가능성을 웅변하는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역으로 혁명은 주권권력의 한계(그것은 지금까지의 부단한 주권 위기와 재구성 과정으로 나타납니다)를 구성하는 잠재력의 현상학 그 자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