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amelano.net/1787


Carlo Vercellone, The new articulation of wages, rent and profit in cognitive capitalism, http://www.generation-online.org/c/fc_rent2.htm 중에서 자본론세미나강좌( http://waam.net/xe/wherecapital )를 위해 맑스의 지대론을 다룬 부분(1.1)을 먼저 번역한다. 오늘날의 금융지대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다. -아멜라노



맑스의 지대론: 『자본』에서 일반지성으로

맑 스는, 자신의 많은 저작들에서, 지대와 이윤을 구분하기 위해 위의 두 가지 기준(첫째 자본이 생산과정에 내적이라는 것, 둘째 이윤은 생산과정에 재투자되며 생산력의 발전과 희소성과의 투쟁에서 긍정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아멜라노)을 공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고전 경제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자본 일반에 대한 분석(1권과  2권)에서 맑스는 산업자본가가 그 자신의 자본을 소유하고서 자신의 기업을 경영하는 것으로 가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런 것이 『자본』을 쓸 당시에 일반적인 경우였다. 산업자본가는 그래서, 그가 직접 생산관계에 포함되며 생산력의 발전(및 자본의 희소성의 축소)을 향한 투자를 하는 한에서는, 금리생활자의 형상과는 대립하는 것으로 보였다.

두 번째의 더욱 중요한 이유는, 맑스의 사유가, 그가 말하듯이, 생산의 순수하게 전제적인 작동과 생산의 자본주의적 조직의 객관적 기능이 서로 융합하는 것으로 보이는, 실질적 포섭을 향한 경향의 틀 내에서 작동한다는 것이다. 이 수렴은 고정자본에 고정된 과학의 체현, 그리고 구상노동의 실행노동으로부터의 분리가 자본의 경영에 생사력의 물질성 자체에 기입된 객관적 기초를 얼마나 제공하느냐에 의존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맑스는 '자본가 및 임금노동자가 생산의 유일한 두 주체'라고 주장하며 반면 '고대와 중세 세계에서 생산의 핵심적 주체였던 지주는 산업 세계는 무용지물이라고 주장한다.(Marx, Theories of surplus value , volume II).

『자본』 3권에서 이자 및 기업이윤의 담지자로서의 자본에 대한 분석을 발전시키면서 맑스는, 지대 범주의 정의를 오직 토지지대에만 한정하는, 이윤과 지대 사이의 대립이라는 맥락을 의문에 붙인다. 그는 이 추론을 더 밀어부쳐서 결국 이윤 및 자본가 소유의 지대되기를 고려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하기 위해 그는 자본의 두 가지 규정들 사이, 다시 말해 소유와 기능[자본 수행] 사이의 개념적 구분을 도입한다. 그리고 이 구분을 소급해서 자본소유로부터 나오는 소득으로서의 이자와 생산을 관리하는 기업가의 적극적 이윤 사의의 구분으로 연결한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 그는 계속해서 두 가지 상보적인 테제를 발전시킨다.

첫 번째 테제는 신용과 주식 회사의 발전 경향이 자본소유의 경영으로부터의 깊은 분리로 나아가는 방식과 관련된다. 맑스에 따르면, 자본소유권은,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에서 토지(지대)의 소유권과 유사한 경로를 따르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생산영역과의 관게에서 외부적으로 되고 있었다. 그리고 토지소유권처럼 자본소유권도, 노동조직에서 더 이상 어떤 기능도 수행하지 않으면서, 잉여가치를 추출하고 있었다.

그래서 생산과정에는 기능인만 남고 자본가는 불필요하게 되어 사라진다.(Marx, Capital volume III, chapter XXIII) 이처럼 맑스는, 경영에서 소유의 분리의 결과로, 경영자의 형상으로 점차 구체화되는자본 소유권의 수동성과 자본 수행의 능동적 성격을 구분한다. 경영자 형상에서 노동지도의 기능과 노동착취의 기능은 생산에서 구상업무와 조직업무를 실행하는 임금노동자라는 거짓 외관을 취한다.

많은 점에서 맑스는 여기에서 1930년대의 위기에 대한 케인즈의 분석을, 기업가의 형상이 투기자의 형상에 대립하며 지대의 개념을 자본소유권에까지 명백하게 확장하는 일반이론을 예상한다. 이 기초 위에서 케인즈는 금리생활자[지대소득자]의 안락사를, 그리고 자본에 삽입된 가치 착취에서 자본가에 의해 취해지는 추가적인 억압권력의 점진적 소멸을 예고했다. 사실상 케인즈는 '이자는 오늘날, 토지지대가 그렇듯이, 진정한 희생을 치르지 않는다.' (TG, Notes finales , chapter 24, p. 369).

그런데 『자본』 3권에서 맑스는 케인즈보다 훨씬 더 나아가서, 지대소득자[금리생활자, 불로소득자] 및 자본의 기생적 성격이 생산적 자본 그 자체와 연결되는 상황의 윤곽을 그린다. 실제로 두 번째 가설은 자본/노동 관계의 진화와 관련된다. 여기에서 자본 소유권이 생산 외부에 위치한다는 사실은 노동자들에 의한 지식재전유의 과정과 연결된 실질적 포섭의 위기와 연동된다.이러한 틀 속에서 맑스는 우리에게, 생산에서 경영자의 혹은 자본의 기능인의 조정기능 역시 불필요하게 되고, 그 자신을 자본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조직힐 수 있는 생산적 협력에 직면했을 때에는, 순전히 전제적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이 문제에 관해서 맑스는, 일반지성 이론의 발전에서 상당히 영향력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호지스킨으로부 인용문을 가져온다. 여기에서 호지스킨은, '이 나라의 목공들 사이에 교육이 널리 확산되어 특유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의 수를 늘림으로써 모든 장인과 고용주들의 노동 및 숙련의 가치가 매일 줄어든다.(Hodgskin, Labour Defended Against the Claims of Capital , London, 1825: 30), 그 결과 자본에 의해 생되되는 경영적 지적 기능이 점점 불필요하게 된다. 요컨대 우리는 3권에서 단지 초고로 서술되었을 뿐인 이 자본-지대 이론이 일반지성에 관한 명제의 맥락에서는 두 가지 이유로 이론적 역사적 중요성과 힘을 얻는다.

확산된 지성의 출현에 직면하여 자본의 비생산성에 관한 호지스킨적 명제는 자본의 모든 기능들(소유와 수행)의 속성으로 된다. 이 틀 소에서 맑스는, '기업이윤과 관리임금의 혼동에 대한 마지막 구실마저도 제거된다'고, 그리고 후자[관리임금]은 '실제로 이론에서 단순한 잉여가치로, 어떤 등가도 지불되지 않는 가치로, [지대처럼] 실현된 불불노동으로 나타난다'

지식의 주도적 역할에 기초한 경제에서 노동시간에 근거하는 가치법칙은 위기에 처한다. 이 위기의 함축들 중의 하나는, 생산을 위한 직접적인 필요노동시간이 지금 매우 취약한 한에서, 생산의 화폐적 가치 및 그와 연관된 이윤의 급격한 축소의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자본은, 교환가치 및 보장이윤의 우월성을 강제로라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공급의 희소화에 기초한 소득 메커니즘을 발전시키기에 이른다.

요컨대, 『자본』 3권의 분석의 발전은 『정치경제학 비판』과 더불, 탁월한 예견력으로, 우리로 하여금 생산의 주체적 조건뿐만 아니라 객관적 조건의 관점에서 자본의 지대되기가 왜 불가피한가를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그러나 맑스는 이 조합[지식주도와 자본의 지대되기의 결합-아멜라노]을 만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가설은 단지 잠재적 되기일 뿐이고 당시로서는 장기의 안목 속에 정위된 경향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죽은 뒤에, 그리고 19세기 말의 대공황과 1930년대의 위기 사이의 역사적 시기를 특징지은 금융지대의 난류와 팽창에도 불구하고, 산업자본주의의 발전을 위한 틀은 여전히 실질적 포섭에 의해 대체로 특징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