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자 다지원 소식
3. 지각과 물체
실재 전체의 운동 속에서 물체는 어떻게 지각되는가? 감각질(qualité sensible)들의 연속성, 의식 외부 세계, 지각세계에서 나타나는 직접적 경험
세계를 언뜻 보자마자, 심지어는 우리가 거기서 물체들의 경계를 정하기도 전에 우리는 거기서 성질들을 구분해낸다. 하나이 색이 다른 색에 이어지고 하나의 소리가 다른 소리에 , 하나이 저항이 다른 저항에 부단히 이어진다. ...... 이 성질들은 , 분석해보면 각각 무한수의 작은 진동들로 분해된다. 거기서 진동을 보건 그것을 아주 다른 방식으로 표상하건 간에 한 가지는 확실한데, 그것은 모든 성질은 변화라는 것이다. 게다가 변화 밑에서 그 주체가 되는 사물을 찾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창조적 진화』445-446)
칼릴레오, 데까르뜨, 로크등 근대 학자들이 감각경험을 제1성질과 제2성질로 나누었다. ① 제1성질 - 물체의 형태, 운동, 정지, 수 등 기하학의 대상이 되는 것들 ② 제2성질 - 색, 소리, 맛, 냄새, 저항(촉각)등 제1성질만이 대상의 참된 모습을 재현하며, 제2성질은 주관적이고 가변적이라고 생각함. 베르그손은 근대인들의 감각경험을 탈구된 경험이라고 본다. 인식의 기반은 지성의 실용적 기원이다. 감각질의 연속성으로부터 뚜렷한 윤곽을 분리해내고 전체의 운동 안에서 부분들의 운동에만 주목하는 것은 바로 삶의 필요성 때문이다. 생명체는 욕구를 가진 존재이며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대상을 선별한다. 욕구와 그 충족대상이라는 이원성은 감각질의 연속성에서 최초의 분리를 생산한다.
생명체는 행동을 통해 생명을 영위하고, 그것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대상들을 분리하며, 나아가 대상들이 존재하는 물질적 지대를 구성한다. 대상들의 분리와 구성은 순수인식의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지각은 순수인식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가능적 행동’을 반영한다. 우리의 욕구들은 모두 감각적 성질들의 연속성으로 향하면서 거기서 구분되는 대상들을 그려내는 빛나는 묶음들(faisceaux)이다.
개체라는 것은 물질계에서는 불론 생명계 안에서도 명확한 구분이 아니다. 베르그손이 위에서 ‘빛나는 묶음들’이라고 표현한 욕구가 들뢰즈에서는 부분대상들, 즉 기관- 기계들을 서로 가르는 기준이라 할 수 있다.
행동이 기반하는 일상적 형식을 순수인식의 영역으로 이전할 때 생기는 환상을 지적한다. 실체화는 언제나 철학자들의 환상의 소산이다. 우리가 고체적 원자, 충돌을 생각하는 것은 우리 일상적 삶에 가장 필요한 것이 고체들이기 때문이다. 물질의 기본 상태는 고체가 아니다. 고체. 액체와 기체 상태에는 연속성이 있다. 패러데이는 원자들을 ‘힘들의 중심’ 혹은 ‘무한한 역선(힘의 노선)들이 교차하는 수학적 지점’이라 말하고, 이것은 원자들의 개별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원자들은 중력이 전개되는 공간 전체를 점유하며, 모든 원자들은 상호침투 한다.
소용돌이 역선과 같은 상징들이 말하는 내용이 자신의 심리학적 분석의 결과인 흐름의 연속과 일치한다고 강조한다. 물리학에서는 상징들에 불과한 의미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그것들은 구체적 연장을 가로질러 가면서 우리에게 긴장 또는 에너지의 변양, 교란, 변화를 보여준다.”
지속을 긴장이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긴장의 변양들인 파동과 리듬이 등장한다. 베르그손의 지속이론이 우주론으로 발전하는 데 가장 심층적인 영향을 준 것이 19세기 에너지 물리학이다.
4. 지속의 긴장과 이완 - 파동과 리듬의 우주
실재적 운동과 물질의 연속성은 지속개념의 보완과 확장이다. 실재적 운동이 있으며, 그것은 ‘질적 변화’이다. 감각질의 측면에서는 질과 양을 매개하는 파동의 개념으로, 물질의 측면에서는 연장과 공간을 매개하는 확장의 개념으로, 감각질과 물질 사이의 거리를 좁히려 한다. 어떤 생명체든 세계를 인식하는데 나름의 방식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동시에 일정한 한계 내에서 이루어진다. 이 한계들이 곧 한 종에 고유한 지각체계를 의미한다. 이 지각체계는 무한한 수의 파동을 한 종에 고유한 방식으로 고정해서 파악하는 기제이다.
질적 다양체와 수적 다양체의 구분 -리만의 생각을 빌린 것 - 질적 다양체는 지속하는 실재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고, 수적 다양체는 공간화 된 실재, 지성이 파악하는 대상 세계의 도식이다. 질과 양의 구분에서 진짜는 언제나 질의 쪽에 있다. 질이야말로 지속과 동등한 무게를 갖는 존재론적 규정이다. 질은 겉으로는 부동적이고 고정된 것으로 나타난다. 감각질의 세계가 아무리 유동적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거기서 고정된 색깔, 소리, 맛 등을 구분하는 것은 질의 외양이 어느 정도 그러한 구분을 하게끔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이 생각에 의지하여 질과 양의 발생을 ‘강도’개념으로 다시 추적하였다. (『차이와 반복』510-511)
안정된 질의 발생을 설명하기 위해 수축(contraction)또는 응축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한정되지 않은 이 다양체가 순간들을 분절하기에는 지나치게 좁은 지속 속에서 수축될 수밖에 없는 필연성에 기인한다. 다양체의 구성소인 파동들은 시간 속에서 무한히 진행되지만 우리 의식은 그것을 순간 속에서 포착한다. 지속하는 우리의 의식 속에서 지각된 파동들은 우리 지각체계의 구조에 따라 수축될 수밖에 없다. 지각의 고정성은 바로 수축이라는 무의식적 행위에 기인하다. 지각한다는 것은 고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의식이 체험하는 지속은 특정한 리듬을 갖는다. 각 종에는 고유한 리듬이 있다. 우리가 동질적 시간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난다면 지속의 유일한 리듬은 없으며 자연계에는 무수한 지속의 리듬이 있다. 베르그손은 이 다양한 지속을 ‘비동등한 탄력을 갖는 지속’이라고 표현하면서 그 각각이 ‘의식의 긴장이나 이완의 정도에 필적하는 것’이라고 한다. 결국 지속은 의식의 긴장과 유사한 원리에 의해 우주 도처에서 다양한 리듬을 산출한다. 이 다양한 리듬들은 모두 지속을 구성하며 지속의 상이한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들뢰즈는 『베르그손주의』의 4장에서 이 부분을 설명하고 있다. 베르그손은 후에 『지속과 동시성』에서 ‘하나이고 보편적이며 비인격적인 시간’을 결정적인 것으로 제시하지만, 그렇다 해도 의식과 물질, 생명(『창조적 진화』에서 지속의 세 종류로 한정함)을 구분하거나 일반적으로 변화를 설명할 때는 언제나 긴장과 리듬이라는 생각으로 되돌아온다. 그것만이 부분적 변화와 전체의 지속이라는 생각을 연결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변화는 도처에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심층적으로 존재한다. 단순한 장소의 변화는 자신 안에 우주적인 변형을 응축하고 있다.
5. 구체적 연장과 동질적 공간
물질은 특정한 공간을 점하고 있는데, 이 공간은 수학적인 순수공간이 아니라 언제나 감각질과 하나로 뒤섞인 질적 공간이다. 베르그손은 감각질과 연장 모두 주관이 아닌 객관세계에 속한 것으로 본다. 단지 거기에 의식이 가한 수축작용으로 인해 그것들이 우리에게는 ‘주관적’인 것으로 파악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주관과 객관의 차이는 수축과 이완, 또는 긴장과 이완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즉 지각과 물질 사이에 부분과 전체의 차이 혹은 정도 차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시론』에서 구체적 연장과 순수공간을 구분한다. 구체적 연장은 직관적이고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는 공간적 특성이다. 동물의 공간감각을 지성(지능, 자기현상, 후각, 전파감지능력)자체라고는 볼 수 없다. 인간은 동물에게서 볼 수 있는 공간 감각이 부족하기 때문에 본능보다는 기하학적 추론에 더 의지한다. 이 능력은 기하학적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추상력이다. 따라서 동물이 느끼는 공간은 질적이고 구체적인 연장이며 인간이 추론하는 공간은 양적이고 추상적인 공간이다.
대상의 윤곽을 뚜렷하게 구분하는 우리 인간들의 행위는 공간적 사고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각 생명종이 가진 지각체계가 감각질의 파동을 수축시킴으로써 나름대로 구분되고 정돈된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다. 인간이 지각세계에서 나타나는 구분을 기하학적인 방식으로 선명하게 고정하는 것은 지성의 작용이다. 이때 지성이 사용하는 도식은 순수공간 혹은 동질적 공간이다. 동질적 공간은 무한한 분할을 가능하게 하는 기반이다. 단순히 사유된 기체, 임의적이고 무한한 분할의 이상적인 도식이 바로 동질적 공간이다.
이미지들의 세계는 지속하는 흐름의 우주에서 우리가 매순간 행하는 절단으로부터 나타난 순간들의 세계이다. 공간은 순수인식의 기반이라기보다는 “실재의 움직이는 연속성에 받침을 확보하고, 거기에 행동의 중심을 고정하는”실용적 기원을 가진다. 우리는 행동을 목적으로 실재의 연속성을 고정하고 다수로 분할한다. 동질적 공간은 이러한 고정과 분할의 원리이고우리가 구체적 연장들 밑에 던지는 그물망이다. 우리가 사물을 대체로 구분해서 인식하는 활동의 기원은 생물학적인 것이며, 그것을 순수공간의 도식에 의해 기하학적 형상들로 명확히 구분하는 것은 인간에 특유한 것이다.
구체적 연장, 즉 감각적 성질들의 다양성은 공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 감각적 성질들의 다양성 안에 놓는 것이 바로 공간이다, 공간은 실재적 운동이 자리 잡는 지반이 아니다. 반대로 공간을 자신의 아래에 놓는 것이 바로 실재적 운동이다
존재하는 것은 연장된 감각질의 다양성이며, 공간은 차후에 우리 인간에 의해 그 밑에 있다고 가정되어 세계를 기하학적으로 인식할 조건이 된다. 『창조적 진화』에서 이러한 공간이 어떻게 생명 진화 속에서 형성되는지를 탐구하고 있다. 인간의 지성은 공간적 사고와 더불어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공간은 실재적 연장들 속에서 보이는 모호한 윤곽들, 물질의 운동(파동)이 보여주는 경향들을 지성적 상상력이 극단으로 밀고 나가는 데서 성립한다. 그러나 우리는 표현상의 이점과 물질적 삶의 요구에 종속되어 존재하는 것을 공간적인 것, 부동적인 것으로 가정하고 정지와 운동의 순서를 역전시킨다.
6. 정신과 신체의 관계
이 관계는 존재 자체의 연속성에서 어떻게 구분이 이루어지는가 하는 존재론적 문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세 가지 차원으로 구별된다. ① 파동과 리듬의 세계, ② 감각질과 연장의 세계, ③ 순수공간의 세계
베르그손의 경우 감각질의 내부에서 진동하는 우주, 파동과 리듬의 세계야말로 물질 자체이다. 이 파동의 세계에서 감각질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단절은 존재하지 않는다. 감각질은 파동과 리듬의 우주가 각 생명종의 지각체계, 즉 그것이 가진 고유한 ‘긴장’ 또는 ‘활력’에 의해 수축되어 나타난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파악하는 감각질이 무한히 느린 리듬으로 이완된다면 그것은 물질 자체의 운동에 가까워진다. 수축과 이완이라는 용어들은 정도 차이만을 가지고 있어서 물질의 내적 파동으로부터 그것이 표면상 나타난 감각질까지 죽 연속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지속의 긴장이나 이완이라는 관점에서 물질을 바라보게 되면 물질은 불가해한 것이 아니며 우리 의식의 지속과도 절대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순수지가 속에서 의식은 부분적이나마 물질과 절대적으로 일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칸트의 구도가 공간적 차원에서 성립하는 반면 베르그손의 구도는 시간적 차원에서 성립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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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의 차원 |
실용성의 차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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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동과 리듬 (물질 자체) |
(공간 지각된)물체(구성된 현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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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질과 연장(순수현상) |
순수공간(이념-이데아, 원자, 수학) |
파동과 리듬에서 감각질과 연장으로 이어지는 지속의 존재론에서 물질과 지각은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순수지각 속에서 정신은 이미 물질에 접하고 있다 . 심신문제를 공간적 차원에서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ㅡ이 경우 데까르뜨의 이원론이나 평행론, 부대현상설 같은 이율배반에 빠지게 된다. 거기에는 정도 차가 없이 절대적 차이만 있다. 그러나 베르그손은 물질과 정신 사이에 무한한 정도 차를 인정한다. 물질의 파동에서도 여러 리듬을 인정한다. 파동하는 우주는 시간 속에서 다양한 리듬으로 무한히 흐르는 우주이다.
베르그손은 정신이 물질과는 분명히 구별된다고 한다. 그것은 시간의 본성을 다른 방향에서 끝까지 추적할 때 나타나는 존재이다. 따라서 『창조적 진화』에서는 방향의 차이만을 갖는 두 운동, 해체하는 운동과 생성하는 운동으로 이 둘을 규정한다. 게다가 물질이 그 전체로 볼 때는 “그 안에서 모든 것이 평형을 이루고 보완되고 중화되는 어떤 의식처럼 존재 한다”고 한다. 지속의 관점에서 볼 때 물질의 부분들이 서로 미세한 면까지 영향을 미치는 하나의 열린 전체를 이루기 때문에 바로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의식’과 유사한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의미다. 그렇지만 그것은 상당히 균일한 방식으로 진동하기 때문에 진정한 의식과는 다르다.
정신은 단지 서로 중화되고 균형을 이루는 파동이 아니다. 물질이 균일하게 반복되는 파동이라면 정신은 수축하는 활동이다.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엄청난 긴장으로 수축시키고 또한 물질의 파동을 자식의 방식으로 수축시키는 정신이야말로 진정한 시간의 요리사가 아닌가? 물질의 파동과는 다른 방향으로 운동하는 이 정신의 활동을 기억(mémoire)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부를 수 있을까? 물질의 운동은 끝없는 진동이고 떨림이지만, 그것은 계속적인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반대로 이 진동을 수축하는 정신은 어느 정도 자유롭게 창조하는 존재이다, 베르그손은 정신이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존재라고 말하지 않는다. 자유는 정도 혹은 등급을 가지고 있다. 정신이 물질의 운동에 삽입되어 그것을 삶을 위해 응축하는 만큼 자유의 실현은 여러 수준과 정도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신과 물질은 둘 다 시간적 본성을 가진 존재들인 만큼 시간 속에서 서로 결합할 수 있다. 단지 물질은 과거를 반복할 뿐이며 정신은 과거를 ‘기억’하고 보존한다. 과거의 기억이야말로 미래를 위해 새로운 것, 즉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초가 된다.
만일 물질이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물질이 과거를 끊임없이 반복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다소간 자유롭게 전개되는 존재는 매순간 새로운 어떤 것을 창조한다.(3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