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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보면서 미술을 가르치는 교과서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어떤 연유로 이 책을 접하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난다. ‘하면 된다’를 주장하는 토건주의자인가 의심해서 집어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전혀 상관없었다. 


움베르또 마뚜라나는 인지생물학자로서 존재론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성하고 삶과 사회에 대한 윤리적 성찰까지도 이끌어낸 철학자이자 교육자이다. 그는 굳이 자기를 규정하자면 ‘슈퍼 실재론자’라고 말하면서 객관적 실재론을 부정하고, 진리라고 떠받드는 보편성에는 언제나 특정한 관찰자가 있다고 못박았다.


책은 독일의 저널리스트 푀르크젠과의 대담을 기록한 것인데, “왜 그토록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깊이 사로잡혀 있는가”라고 묻자 그는 일찍부터 질병을 앓게 되어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고 대답한다. 


열네 살 때 시체와 바위의 차이를 질문했던 그는 “시체는 살아 있었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바위와 다르다”고 시를 썼단다. “그러니까 살아 있다는 사실은 물질의 속성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의문은 이어진 것이다. 여기서 생명에 대한 서술, 자기 생산이론으로 불리는 오토포이에시스라는 핵심 개념을 공고히 한다. “살아 있는 존재의 의미와 목적은 다른 게 아니라 바로 현재의 그것이 되는 것이다.”


이 대화의 놀라움은 과학자가 설명하는 인지 과정의 순환성이 바로 사랑과 삶, 타자에 대한 윤리로 설파된다는 것이다. 


“내가 무엇이 되든지 그 모든 것을 온전히 존중하며 내 자신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하나의 축복이란 것”을 증명했다. ‘관찰하기’는 사랑이 인간의 토대이기 때문이고 타자들을 지각하고 인정하게 한다는 것, 다름 아닌 자기성찰을 뜻하고 자기조직체계로 이른다는 말이었다. 이후부터 내게 과학자는 형식주의 문제에 쏠려 있는 외계인의 언어를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임민욱 미술작가


경향신문

2011년 6월 8일자


기사 링크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6072150245&code=960205